그녀, 현정

by 센터 posted Oct 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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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길날 농사짓는 사람



막막하고 먹먹한 시절은 누구에게든 온다, 그리고 간다. 이왕에 겪어야 할 고비들이라도 한때 지나가는 감기처럼 스치듯 겪어 내면 좋을 텐데 모질도록 길게 부딪치며 견뎌 냈어야 하는 이(들)에겐 그때를 돌아보는 일이 기억과 함께 찾아드는 통증을 견뎌야 하는 일일 수 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현정은 수도권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이 정차하는 사당역에서 걸어 15분 내외 거리에 있는 반지하 셋방에서 2년째 살고 있다. 이전에 살던 곳도 사당역에서 도보로 20분가량 떨어진 반지하 셋방이었다. 그녀는 사당역 주위를 오가며 이른 아침부터 정오가 가까운 시간까지 녹즙을 배달한다. 새롭게 이 일을 시작한 게 지난 7월 중순 경이니 이제 두 달이 되어간다. 그 전에도 녹즙 배달하는 일을 두어 번 했는데 짧게는 몇 주, 길게는 1년 정도를 채우고 그만두었다. 처음엔 고객을 확보하는 일이 힘들어 발품을 파는 것에 비해 손에 쥐게 되는 돈이 정말이지 얼마 안 되어서, 두 번짼 가맹점 지사장과의 마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기도 했으나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별다른 경력도 쌓지 못한 그녀를 기다리는 일자리가 쉽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전에 해봤던 일들 중 비교적 최근에 했던 일인 배달 일을 다시 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 일을 그럭저럭 해내고 있다. 취직이라고 한 거긴 하지만 4대 보험 가입이 되지 않고 기본급도 따로 없이 철저히 ‘배달한 만큼’ 몫을 챙겨가는 구조 속에서 하루 예닐곱 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80~90만 원을 번다.


현정은 마흔이 넘어서야 결혼을 했다. 관계 맺기에 대한 회의와 체념 때문에,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오래 자신 속에 갇히어 있어야 했다. 가난한 집안의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낮에는 신발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십대의 끝자락을 보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일어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공장에 다니며 방송통신대학에 등록하여 공부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20대 중후반 무렵, 유사종교에 빠져드는 바람에 공장 일도 공부도 접고 집을 나가 수년간을 떠돌아야 했다. 아버지란 사람은 가정에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데다 폭력적이었고,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엄마의 고달픈 삶은 무기력해만 보였으며, 터울이 제법 길게 지는 동생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고 있었으니 그녀가 짊어져야 했을 몸과 마음의 짐이 가벼웠을 리 없다. 도망치듯 종교에 빠져들었는데 하필 휴거를 말하는 사이비 교단이었다. 여기서 빠져나오기까지 수중에 있던 얼마 안 되는 돈과 수년간의 세월을 고스란히 털어내야 했다.


이후의 삶도 순조롭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어릴 적 겪은 좋지 않은 일들과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 사이비 종교에 몰입했던 기억으로 사람에 대한 불신과 피해의식이 극에 달한 상태가 지속되었고, 그래서 어디에 있어도 편치 않았다. 거리에서 버스와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뭇사람들과 다투기 일쑤였다. 아버지와는 수십 년째 연락을 끊고 살았으며 나머지 가족과도 아주 가끔씩 통화를 하는 정도였다. 혼자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가야 했으므로 허름한 셋방에서 고시원에서 매일 생활정보지를 뒤져야 했다. 적당한 일자린 찾기가 힘들었고, 어쩌다 발길을 옮길 곳을 찾았다 싶어 가서는 사기를 당하는 때마저 여러 번 있었다.


그렇게 수도권 여기저기를 떠돌며 마흔을 맞았다. 이따금 연락이 닿는 형제자매들 중 일부가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그들 또한 자신들의 삶을 건사하기에도 바듯한 처지들이어서 궁핍한 삶은 질기게 이어졌다. 이처럼 살아가야 할 바를 찾지 못해 헤매면서도 자신은 이렇게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 사람이 아니라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인터넷 바다에 떠도는 허위 과대 과장 광고에 혹하기 일쑤였다. 늘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가능할 리 없었다. 더군다나 판단력도 오랫동안 흐려져 있는 상태였다. 의논할 만한 친구 하나 남지 않았으며 가족도 가까이에 없었다. 그렇게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어쩌면 자초한 일이었다. 현실의 자신이 끔찍이 싫었기에,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당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성공’하기 전까지, 안정적인 기반을 닦아 당당해지기 전까지는 이전부터 알고 있던 누구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당면한 월세며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생활정보지와 인터넷 웹 사이트를 훑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 우연히 가입해 갑갑함에 한두 번 얼굴을 내밀게 된 한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서였다. 세 살 연하인 남편은 가난했으나 자상했다. 상처로 얼룩진 지난날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독하게 이어지고 있는 불안정한 삶이 주는 피로감 때문에 그녀가 무시로 고통을 호소하며 대책 없이 굴어도 가만히 응대해주었다. 결혼은 저 먼 우주의 일, 그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일찌감치 밀쳐둔 ‘사건’ 가운데 하나였으나 운명이란 게 정말이지 있는 모양인지 그렇게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나이, 마흔세 살 때 일이었다.


그렇게 가난하지만 이전보다는 조금쯤 안정된 결혼생활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그녀의 성격상 이웃들과 내내 마찰을 겪어야 했으며 시집 식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채 갈등해야 했다. 그러면서 그녀 또한 깨지고 배웠다. 지난 몇 년 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제 속의 화며 울분을 조금씩이라도 다스려 보려고 무던히 노력해왔다. 그렇게 지난했던 고통의 시절과 어렵게 대화를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그녀에게는 어렸을 적부터 겪은, 아무한테도 다 털어놓지 못한 뼈저린 기억들이 있다고 한다. 여전히 그 기억들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는 못해서 누구에게도 속속들이 들려준 적이 없다. 하지만 죽음밖에는 무엇도 떠오르지 않던, 먹먹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그 오랜 기억들로부터 예전에 비해 조금쯤 놓여난 느낌이라고는 했다. 지천명의 나이. 슬프고 끔찍했던 성장기와 암울하기만 했던 청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이제 그만 떠나보내기 위해 애도의 시간, 삭힘의 과정을 서서히 지나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꿈이며 삶의 목표를 물었을 때 “지금은 말할 수 없다”며 알려 주진 않았으나 “분명히 있다”며, 힘주어 말하던 그 의지 어린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지난 시절을 계속해서 다독여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무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꿈이며 목표를 마침내 이뤄내기를.


길날_전라남도 장흥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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