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여자라는 사람이 오래 살아오고 있다

by 센터 posted Apr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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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여성이란 말은 남성 혹은 인간이란 말만큼이나 포괄적이면서 복잡한 의미태다. ‘보편 여성’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는다. 73억 명을 조금 웃도는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인 36억 5천만여 명의 여성이 각자의 처지에서 제각각의 모습과 목소리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듯 ‘여성은 누구인가’라며, 세상 모든 여성에 적용할 만한 보편적인 정의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묻고는 한다.


이렇듯 딱히 답도 없을 질문을 변함없이 하는 것은 이 우주, 지구라는 행성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이 더 오랫동안 ‘문제적 존재’가 되어온 까닭일 것이다. 문제적 존재라는 말은 긍정과 낙관, 부정과 비관의 의미를 두루 담고 있지만 조금은 더 후자 쪽으로 기울어진 채 쓰여 왔다. 문제적 존재로 대상화되는 객체는 대체로 비주류, 마이너리티를 포함하는 피지배자의 처지에 있는 이들이다. 주도권을 이미 쥐고 있으면서도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지배력을 욕망하는 이들은 직접적이거나 에두르는 방식의 교묘한 장치들을 뒤섞어가며 주류, 지배질서를 거듭하여 구축하고 확장해나간다. 여성이라는 종(種)으로 태어났으므로 그들 사이에 ‘보편성’을 들이밀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러한 인간사의 지배질서가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정도나 강도의 차이를 달리하며 쳐놓아온 부정과 비관이라는 의미의 그물망에 그들 대부분이 아는 새 모르는 새 걸리거나 갇혀왔다는 점일 것이다.


세계 빈곤층 13억 인구 가운데 70%가 여성이며, 세계 식량의 50%를 생산하지만 수입은 10%에 불과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성들의 50%가 영양결핍 상태다. ……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25∼50% 더 적은 급여를 받을 뿐이며, 기업가들은 여성을 더 순종적이고, 덜 조직적이며, 결혼이나 임신 같은 사유로 해고하기 쉬운 존재로 보고 있다. …… 여성 노동자의 94%가 비정규 · 비조직 부문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들은 사회적 · 법적 보호를 받기 힘들고 또한 노동권 단체들의 지원도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익숙한 통계치며 해석이다. 국가·지역별로, 시기별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기는 하지만 정치·경제·문화·복지 분야 등의 여러 사회지표를 통해 드러나는 온갖 통계자료가 지구상에서 질서 지워진 여성의 오래된 현재를 분명히 보여준다. 감정노동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집 안팎의 잡다한 일거리를 부여잡고 더 적은 임금과 불안한 일자리를 견디며 사는 것이 대다수 일하는 여성들의 여전한 모습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아는 여아라는 이유로 태어나고 배울 기회를 덜 가지거나 박탈당한다. 농촌의 여성들은 가사와 육아와 농사일을 병행해가며 변함없이 더 긴 시간 일을 한다. 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젊은 여성들이 덜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나이 든’ 남성들에게 ‘팔려’ 온다. 아이들은 과거만큼 태어나지 않고, 젊은이들은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살아갈 힘을 잃었으며, 노인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체제에서 노동력을 지닌 여성들에게 더 많이 요구되는 건 돌봄노동과 감정노동이다. 여성들을 열악한 처지로 내몰아온 이러한 갖가지 양상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오랜 주류·지배질서가 부정과 비관, 배제와 희생의 대상으로 여성들을 길들이거나 가두어온 결과를 드러내 보여준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신자유주의와 만나서 인간의 무의식이며 잠재의식까지 착취해간다는 시대다. 광폭한 개발 바람으로 환경이 파괴되거나 말거나, 세계 인구는 변함없이 늘고 있어도 일부 국가의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말거나, 더 이상의 성장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 아래 일자리가 줄어들거나 말거나 이러한 유·무형의 지형을 어지럽게 게워내는 시스템은 세월이 흘러도 별반 달라지지 않고 참 꿋꿋이, 집요하게도 계속된다. 가진 자원이나 지닌 재능도 별반 없는 데다 여성이기까지 하여 평범하게 고통 받아온 우리의 피로한 현재는 어떤 얼굴로 이 현기증 나는 시대를 견디거나 이겨내고 있을까.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을 것 같다는 쪽으로 기우는 생각을 거듭 확인하면서 구태의연함이 나날이 복잡한 양상을 띠며 질주하는 당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는 여성들을 찾아 나서려 한다. 그들은 비정규·정규·이주노동자거나 농민일 수도, 백수일 수도, 어린이거나 청소년이거나 독거노인일 수도, 시인이거나 춤꾼일 수도, 성 소수자거나 장애여성일 수도, 싱글맘이거나 비혼여성일 수도 있고, 다양한 정체성을 두세 가지씩 겹쳐 입고 있는 여성일 수도 있다. 세대도 하는 일도 사는 곳도 추구하는 삶도 제각각인 여성들을 찾아가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차례로 귀 기울일 것이다. 


저 먼 우주에서 어쩌다 이 지구라는 별에 당도한 하나하나의 존재가 펼쳐 보이는 희미하거나 선명하거나 어둡거나 환한 빛들을 두루 엮어서 이 세계의 앞길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어도 좋겠다. 짧게 혹은 길게 살아오는 동안 개별자로 현현하는 한편 공생의 그물을 잣기 위해 일궈온 지혜가 깃든 치열한 잠언들을 그들이 들려주리라 믿는다. 이 지면은 그래서 마련된 것이다.



*길날_정규·비정규 노동자와 백수의 처지를 넘나들다가 지금은 전남 장흥에서 농사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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