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괴담에 놀아난 교육부의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방침

by 센터 posted Sep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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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교육부에서 2018년부터 적용할 새 교육 과정을 마련하면서 인문 사회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한자 교육을 활성화하겠노라고 발표했다. 그 방안으로 초·중·고 학교급별로 적정한 한자 수를 제시하고 교과서에 한자 병기의 확대를 검토한다”고 밝혔다. 1년 전인 2014년 9월의 일이었고, 2015년 9월 말까지 결정한다 했으니,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났을 것이다. 어떻게 결정이 났건 간에 이 문제는 한자 사용의 확대냐 축소냐로 앞으로도 끊임없이 논란을 부를 터라 이김에 문제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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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과서한자병기반대국민운동본부’에서 땡볕에서 거리서명을 벌이고 있다. (@한글문화연대)


한글 전용 때문에 청소년의 국어 능력이 떨어졌다?


얼핏 듣기에는 교육부 방침이 초중고 전체에 해당하는 것 같지만, 교육부에서 노리는 대상은 초등학생이다. 이미 중고교에는 기초한자 1,800자가 지정되어 있고, 한문 과목이 있지만 날로 부실해지며, 25년가량 시행된 교과서 한자 병기도 다 사라졌다. 그렇지만 중고교 한문 수업을 정상화하기 위한 방안은 단 한 글자도 담겨 있지 않다. 교육부 방침은 한자를 몰라 어휘력이 떨어졌다는 주장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어려운 개념은 중고교 과정에 더 많이 나오는데 교육부 논리대로라면 중고교 한문 과목을 정상화하는 게 우선인데 말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한자 사교육은 초등학생에게서 미취학 유아 쪽으로 번질 뿐 중고교에서 이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한자 사교육과 한자 급수시험을 주관하는 업체들의 뜻을 대변하는 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나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 등은 10년 넘게 한결같이 초등학교 한자 교육 도입과 강화를 건의하고 교육부에 정치적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한자 병기 정도에 만족하는 수준이 아니라 몇 십 년 전의 국한문 혼용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일본의 국한문 혼용 문자 생활을 우러르는 자들이다.


교육부에서 한자 사교육 업체들이나 국한문 혼용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정책을 펴는 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한글 전용 정책으로 인해 한자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를 양산하였고, 이는 청소년들의 국어 능력 저하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한자 교육 강화론자들은 이를 ‘한자 문맹’이라고 목청을 높이는데, 이들뿐만 아니라 일부 국어학자마저도 이런 주장을 옮기고 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이 주장을 입증할만한 연구 결과는 단 한 건도 없다. 초등 한자 교육 강화를 연구하는 책임자조차 다른 학자의 말을 인용했을 뿐 자신이 그런 연구 결과를 본 적은 없노라고 2015년 8월 24일에 열린 교육부 공청회 자리에서 털어놓았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문장 이해력은 세계 최고


교육부에서 초등 한자 교육 강화 정책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한자 문맹 주장을 반박할 사례는 많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지표를 확인하는 게 좋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2000년부터 3년마다 한 번씩 회원국과 비회원국 만 15세(우리는 중3)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제학업성취도평가를 실시한다. 이 평가에서는 독해력과 수학 및 과학 소양을 조사하는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독해력 부문에서 늘 세계 1~2위를 차지한다. 만일 한자 교육 강화론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자를 몰라 문맹인 우리 청소년들이 어찌 문장을 이해하여 답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수월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이면서 말이다.


지금의 청소년뿐만 아니라 한글세대 전반의 문장 이해력이 낮지 않다는 증거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의 국제성인역량평가 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2013년에 처음 실시한 이 평가에서 우리나라 16~24세 젊은층은 독해력 분야에서 22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3위를 차지했지만 55~65세 노년층은 꼴찌에서 3위인 20위였다. 한글세대 전반의 문장 이해력에는 결코 문제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노년층이 젊은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자에 많이 노출되었던 세대지만 그것이 결코 문장 이해력을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조사를 담당했던 연구자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는가가 독해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癡呆’라고 쓰고 읽을 줄 몰라도 ‘치매’는 다 아는데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한자 교육 강화론자들은 “한자를 모르면 한자어 낱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지 알 수 있다. 어느 나라에나 수의 차이는 있지만 문자를 읽지 못하는 문맹이 있다. 특히 중국에는 아직 문맹이 많은데, 그렇다면 한자를 읽지 못하는 중국의 문맹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가? 어휘력 차이는 있겠지만 미국의 문맹도 말로 하는 영어로는 웬만한 외국인보다 의사소통이 수월하다. 이는 한자는 물론이요 한글조차 모르는 우리 어린아이들이 ‘부모’, ‘유치원’, ‘자동차’와 같은 한자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원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낱말의 뜻은 그 글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의 쓸모와 성질에 담겨 있는 것이고, 우리는 남의 설명이나 사용방법을 보면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 뜻을 익힌다. 이는 언어학의 상식이다. 단적인 예로, ‘치매’를 ‘癡呆’라고 한자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우리 국민 대부분일 테고, 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드물겠지만, 우리는 이 말을 아무 어려움 없이 사용하고 있다. 새로 등장하는 말은 그 말에 한자가 붙어 있건 영어가 붙어 있건 그 낱말의 정확한 뜻을 남의 설명이나 쓰임새를 보지 않는 한 확신할 수 없고, 그 반대로 남의 설명이나 일반적인 쓰임새를 파악하게 되면 그 말이 아랍어에서 왔든 러시아어에서 왔든 그 원어 문자를 읽을 수조차 없더라도 우리는 그 말의 뜻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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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앞 청운효자동사무소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며 ‘한글이 목숨이다’라고 쓰고 있다.(@한글문화연대)


한자 지식의 효능은 너무 부풀려져 있다


‘한자를 모르면 낱말 뜻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거짓이지만 ‘한자를 알면 낱말 뜻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사실이다. 즉, 낱말 뜻의 풍부한 전체 모습을 비록 한자 어원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한자는 우선적으로 우리 고유어를 압축 번역하여 다른 음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런 한자가 결합된 한자어는 그 뒤에 숨어 있는 쉬운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니 한자를 알면 압축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애국’은 사랑 애(愛)와 나라 국(國)을 알면 우리 고유어로는 ‘나라사랑’이라는 풀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효능을 너무 과신해서는 안 된다. ‘전기(電氣)’는 전기 전(電)에 기운 기(氣)라는 뜻도 추상적인 한자어이므로 전기의 속성을 알지 못하면 동어반복을 벗어날 수 없다.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이 서구 문물을 번역하면서 만든 많은 한자어가 이런 식이고,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한자어가 일본에서 온 말이다. ‘회사’와 ‘사회’는 모일 사(社)와 모일 회(會)를 앞뒤 순서만 바꿔놓은 것인데, 그 뜻이 어찌 모임이라고만 이해될 수 있겠는가? 고유어로든 한자어로든 이미 어떤 개념의 느낌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한자는 낱말 이해의 작은 실마리가 될 뿐이다.


한자를 알면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는 이가 많다. 이런 기대가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니지만 실제보다 너무 부풀려져 있다. 중고교에 비해 초등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초등학생에게 ‘법’에 대해 가르친다고 해보자. 이해하기 쉬운 교통 법규를 예로 들어 법이 없을 경우에 어떤 혼란이 생길지, 인류가 처음 사회를 이루면서 어떤 사정으로 법을 만들게 되었는지, 어떤 종류의 법이 있고 어디까지 법으로 정할 수 있는지 따위 여러 사례를 들어 법이 무엇인지 그 느낌과 실체를 머릿속에 쌓도록 할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한자 지식은 얼마나 도움이 될까? ‘법 법(法)’이라는 한자는 뜻도 ‘법’이어서 어떤 특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인간(人間)’이나 ‘자연(自然)’처럼 낱말의 뜻을 일부 유추할 수 있는 한자어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 단서만으로는 큰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아이들이 이미 뜻을 아는 말이라 굳이 한자를 병기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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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3일 한글 교과서 장례 행렬이 한글회관을 떠나 노제를 치렀다.(@한글문화연대)


동음어를 구분하지 못하면 난독증이다


한자 모르면 낱말 뜻을 모른다는 이 한자 괴담은 특히 동음어로 장난을 쳐서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동음어는 처음 접하는 낱말이 아니라면 문장의 맥락 속에서 모두 구분할 수 있다.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소리나는 대로 한글로 적었을 때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난독증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자 교육 강화론자들은 우리말 한자어에 동음어가 많아 한자를 꼭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궤변일 뿐이다. 동음어는 한자어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고유어에도 있다. 예를 들어 ‘흔들리는 배 안에서 목이 말라 배를 먹었더니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문장을 말로 하거나 글로 썼을 때 이 문장에서 타는 배와 먹는 배와 몸의 배를 구분하지 못한단 말인가?


앞뒤 문맥을 보면서 동음어의 뜻을 구분하는 원리는 고유어만이 아니라 한자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자 교육 강화론자들은 아이들이 한자를 몰라 산부인과 의사와 안중근 의사의 ‘의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산부인과 의사’는 아기나 출산, 임신, 병 등의 말과 함께 나오고, ‘안중근 의사’는 이토오 히로부미, 독립운동 등과 함께 나오기 마련이다. 이 두 ‘의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직 역사 지식이 없거나 보건 지식이 적어서다.


동음어는 문장의 맥락으로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수학의 ‘분자’와 과학의 ‘분자’는 뜻이 다르다는 걸 한자 없이도 맥락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둘은 한자마저 같은 ‘分子’이기 때문에 맥락이 아니고서는 절대 글자로 구분할 수 없다. ‘分子’라고 한자만 달랑 써놓았을 때 그걸 써놓은 사람이 마음속에서 수학의 분자를 의도했는지 과학의 분자를 의도했는지 알아내는 능력은 일종의 신통력인데, 한자 교육 강화론자들은 이런 신통력을 요구한다. 세상에 그렇게 달랑 낱말 하나로 소통하는 사람도 있는가? 한자를 병기해봤자 같은 글자인 수학의 분자와 과학의 분자는 그 맥락 아닌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교과서를 한자 교재로 삼으려는 불순한 동기


한자 어원으로 개념을 파악하겠다는 소박한 기대는 현실을 알면 더욱 허망해진다. 초등 3~6학년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지질용어를 분석해보면 그 가운데 ‘역암(礫巖)’의 ‘조약돌 역’처럼 중고교 기초한자 1,800자에도 들어 있지 않은 어려운 한자를 포함한 용어가 전체의 35퍼센트고, ‘이암(泥巖)’의 ‘진흙 니’처럼 고교용 900자에 속하는 한자를 포함한 용어가 30퍼센트다. 그럼 이 65퍼센트의 어려운 한자가 포함된 한자어 용어는 한자를 병기하지 않고, 나머지 ‘공룡’처럼 한자를 병기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뜻을 알고 있는 용어에만 한자를 병기할 것인가?


결국, 한자 지식을 동원하여 개념 이해에 도움을 주겠다는 애초의 기대는 무색해지고 쉬운 용어에 병기된 한자만을 가지고 가르치겠다는 꼴이 되고 만다. 이 정책의 목표는 초등 교과서를 한자 교재로 둔갑시켜 한자 공부를 모든 학생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초등학생의 학습 부담을 늘리고 책 읽기를 방해하며, 한자 사교육과 유아의 선행학습을 부추길 위험이 높다. 이런 정책을 교육부에서는 아무런 기초 연구 없이 한자 괴담에 놀아나 밀어붙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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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한글 교과서 장례 행렬(@한글문화연대)


소수자를 차별하고 국민 소통에 혼란 부를 정책이다


초등 교과서에 한자가 병기되면 한글은 우리말을 적기엔 무언가 흠이 있는 문자라는 편견과 오해를 부르고 부추긴다. 이는 동화책, 공문서, 신문, 텔레비전 자막에도 한자 병기나 국한문 혼용을 퍼뜨리고 국민의 의사소통에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한글의 지위가 흔들리는 순간부터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따위 외국어가 우리 글과 말에서 마음껏 활개 치기 시작하여 언어 환경을 엉망으로 만들 위험마저 크다. 이런 부작용은 시각 장애인, 이주민, 저학력 성인과 같은 소수 약자에게 가장 먼저 치명적인 장애물로 다가갈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누구나 자기 뜻을 펴게 하겠다는 애민정신으로 한글을 창제하셨다. 한글 창제 570년이 되는 이 시기에 이제야 정착한 한글 전용을 교과서 한자 병기로 망가뜨린다면, 이는 세종의 애민정신을 업신여기고 욕보이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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