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幻滅)에서 환멸(還滅)을 넘어

by 센터 posted Aug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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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성희(센터 전 소장/센터 이사)




환멸01(幻滅)[환ː-]  
「명사」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
 


환멸02(還滅)  
「명사」『불교』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세계에 돌아감. 또는 그런 일.
 



환멸(幻滅)
환멸(幻滅)스럽다. 이 나라의 정치, 경제, 노동, 사회를 둘러싼 수많은 말과 실상이 환멸스럽기 그지없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와 서민 살리기의 코스프레로 등장해 표독스럽고도 무능력한 ‘독재자의 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가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무능력, 방관, 무책임과 뻔뻔함은 그저 개탄스러움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다. 관료와 정치인들은 모두 위만 바라보며 보신과 처세에 급급하다. 나라 살림의 밑동이 주저앉고 거리로 나앉을 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야당이라고 다르지 않고, 대체 가능성이 있는 어떤 세력도 썩 나아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제대로 된 놈 한 명이 없는가? 기업들은 대주주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물론 기업들도 처절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살아남고 잘 나가는 기업의 행태는 간접고용을 비롯한 비정규직 양산과 고용 축소형 투자로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사 이후 이어지는 참사
박근혜 정부는 7월 25일 세월호 참사 100일이 지나자마자 보란 듯이 2기 경제 계획을 발표했다. 대통령 책임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불온시하는 보수 여론을 등에 업고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또 한 번 선을 그었고, 유가족과 참사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시민들의 가슴에도 못을 박았다. 참사 이후 새로 변한 건 없다. 우리는 아직도 참사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한 일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은 담화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이 흘린 눈물과 뒤이은 인사 참사뿐이다. 우리 사회는 참사에서 아직 아무 것도 깨우친 것이 없다.
이제 경제로 관심을 돌리자고 한다. 진정성 있는 입장 표명을 기대했던 세월호 참사 34일째인 5월 19일 담화에서도 박 대통령은 정부 부처와 부패 사슬과 사적 자본을 나열하며 진단과 처방을 스스로 매듭짓고, 경제로 국면 전환할 때임을 예고한 바 있다. 더 깊어진 경기 불황은 세월호 참사의 영향 때문이라는 인식이다. 미안하고 면목 없어서 소비를 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이 사회에서 나와 가족과 이웃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자각이 스며있다.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선 수준의 가계 부채의 당사자라는 점을 서민들은 참사를 계기로 깨닫고 있다. 실질소득 감소가 몇 해째 이어지고 있고 이제 빚으로 메우기도 불가능할 지경이다.
한참을 방치하다 뒤늦게 안 것처럼 호들갑 부리는 모양새도 꼴사납지만, 내놓은 처방은 더 한심스럽다. 기업 살리기 일변도인 과거와 달리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올려 경기 침체를 극복하는 정책 선택을 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내용을 뜯어보면 표 필요할 때 시장 방문하고 서민 행보하는 태도에서 오십보백보다. 가처분소득 중 임금, 배당소득 모두를 올리는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데 둘을 등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또 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기업 인센티브로 제공되는 우회적인 기업 지원책의 성격이 짙은 반면, 배당소득 수혜자는 직접 혜택을 받는다. 부의 형평성을 더욱 왜곡하는 정책 선택을 균형 있는 처방처럼 엎어놓은 것이다. 예전만큼 실효성은 없을 듯하지만 무게 중심은 여전히 부동산 경기 활성화에 있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건 계속되는 서비스 산업 규제 완화 등 기업 살리기 정책이다. 비정규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파견 확대책이고, 간접고용 노동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건 턱없이 부족하고 힘든 관문인 기업 지원을 통한 간접 지원책뿐이다. 공공부문에서 직접고용 기간제의 정규직화를 촉진한다면서 다른 한편 간접고용의 파견 확대를 언급한다. 앞문 열고 뒷문도 열고. 



환멸(幻滅)을 극복하기 위한 환멸(還滅)
실업과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을 맴도는 사회 구성원 4/5의 삶은 사회적 생명을 위협받고 있을 뿐 아니라, 신체적 생명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사태가 이런데도 기득권자들의 후안무치는 도를 넘었다. 자신만 챙기며 절망의 구덩이를 넓혀가는 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또 고통과 억압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에 재갈을 물리고 주저앉히는 데 급급하다. 그 저항과 투쟁은 고립되기 일쑤이고, 피압박자의 연대는 언제나 함량 부족이다. 이전 연대의 중심체는 기능을 잃어가고 있고 새로운 연대의 전형을 만들어가는 시도는 분산적이고 자생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환멸(幻滅)스런 삶을 극복하기 위해선 현실의 참상에서 깨달음을 얻고 반성하는 또 다른 환멸(還滅)을 필요로 한다. 자기 부정 없이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 삶은 지속되어야 하되, 자기중심적 삶은 버려야 한다. 남 탓할 시간이 많지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잘 난 것도 없다. 우리 사회는 최근 연대적인 삶의 방식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공동체,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그리고 연대적 새로운 노동조합까지. 저항의 주체가 저항의 대상과 다른 삶의 지향과 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재 정부와 재벌 체제에 저항하다 닮아버린 우리 안의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 이젠 작은 이익 앞에서도 한없이 초라해진 우리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환멸(還滅)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적 연대운동으로
대안적 삶과 조직 방식이 필요하나, 우리는 쉬 초월할 수는 없다. 속세에 환멸을 느낀다고 속세를 다 저버릴 수 없고 이상향을 따로 건설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바다 안에 공동체성과 연대의 섬을 따로 꾸리는 것도 아니다. 환멸(還滅)을 넘어서야 한다.    
한 가지만 언급한다. 비정규직을 주축으로 한 운동은 연대운동이어야 한다. 비정규운동은 노동자 연대, 사회적 연대의 ‘수혜자’였다. 연대의 의미를 스스로 상징하는 사회연대적 노동운동의 당당한 ‘담지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모습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연대의 구현체’로서 역할이 미흡했던 점이다.
구별짓기와 몰아세우기에 능한 분파적 노동운동의 폐해를 극복하는 열려 있는 민주주의와 확장된 참여의 통로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규직을 상대화하는 정규직에 대한 비판과 의존의 공존에서 벗어나 자립성에 기반한 자율성을 키워야 한다. 대공장과 대사업장의 울타리가 가장 큰 물적 기반이 되는 왜곡된 기업형 체제 복제형 노동조합 구조를 극복하는 새로운 노동조합 구조를 만들어가고 실험해야 한다. 정치운동의 분열을 그대로 반영하거나 오히려 촉진하지 않고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꺼이 받고 아낌없이 나누어야 한다. 
이 모습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 이름은 일상이 연대인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연대운동이다. 새로운 연대적 삶의 희망의 단초를 담고 있지만 아직 전형도 없다. 과거의 덫에서 머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도 우리 희망의 전형을 아끼고 보듬고 살뜰히 키워갈 일이다. 자기 이익에 매몰되는 현재가 환멸스럽다고 이를 그저 벗어던질 수는 없는 일.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살려갈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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