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을 위한 변명

by 센터 posted Feb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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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선 센터 공동대표

 

 

사고는 예견된 것이었다

 

산재가 발생한 지 10여 일만에 찾아간 한국서부발전소 공장은 하얀색, 파란색 페인트로 깨끗하게 갈무리된 거대한 몸체였다. 작업장은 바닥 청소를 했는지 빗자루 자국이 있고, 컨베이어벨트 위로 어렸을 때 보았을 탁구공보다는 조금 큰 전구가 가냘픈 전깃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켜져 있었다. 몇 미터에 하나씩 있는 전구는 고작 컨베이어벨트와 긴 통로를 구별하는 정도였고, 대낮인데도 깜깜하다고 할 만큼 어두웠다. 비상시 당기면 컨베이어벨트가 설 수 있다는 안전띠는 축 늘어져 3~4미터 간격으로 U자를 그리고 있었다. 낙탄을 방지할 목적으로 컨베이어벨트 위에 철제덮개를 설치하였는데, 덮개에 있는 점검구 구멍은 설치할 때보다 몸이 충분히 들어갈 만큼 확대되어 있었다. 컨베이어벨트에는 사고로 미처 싣고가지 못한 석탄이 사고 현장 시각 그대로 멈춰 있었다.

 

4킬로미터가 넘는 작업 길은 길고 길었다. 노란 안전선은 지워지거나 없었고,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였다. 혼자서 이 길을 걸었을 것을, 그것도 한밤중, 새벽 가리지 않고 교대근무를 하면서 혼자서 굉음과 석탄가루 속에서 어둠을 뚫고 다녔을 것이다. 컨베이어벨트 소리에 묻혀 자신의 숨소리조차 느낄 여유도 없이 낙탄을 컨베이어벨트에 들어 올리기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작업속도와 작업량 때문에라도 컨베이어벨트를 정지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2018년 12월 11일 새벽 3시, 홀로 석탄 운반용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던 24세 청년이 벨트에 끼어 사망하였다.

 

원청의 무죄는 예정된 것이었다

 

산재 사고가 발생한 지 3년. 김용균 씨 사망 사고 관련 원청업체인 한국서부발전 전 대표에게 무죄, 하청업체 대표에게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 나머지 관계자들도 대부분 집행유예 및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법원은 업무상 과실치사·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원청업체 전 대표에 대해 “업무상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고, 고의로 방호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원청 대표가 컨베이어벨트의 위험성 등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김용균 씨가 소속돼 있던 하청업체 대표에게는 안전조치 의무를 위반했다면서 유죄를 선고하였다.

 

어찌 보면, 원청의 무죄는 예정된 것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 체계에서 산업 안전의무 해태와 사망과의 인과관계, 고의 과실, 입증 등에 있어서 원청에 책임을 묻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원청업체가 아닌 ‘사용종속관계’에 있는 사용자, 그것도 산업안전보건법상 의무를 위반함으로써 사망에 이르게 된 ‘인과관계’에 있는 사용자인 하청업체 대표가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언론에 보도되는 대형 사건 사고에 대해서 하청업체가 책임지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자의 과실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기자회견.jpg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 주최로 1월  27일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에 따른 입장 발표 기자회견

 

절반의 성공,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중대재해처벌법이 2022년 1월 27일 시행되었다. 중대 재해란 산업현장에서 사망자가 한 명 이상 발생하는 등 일정 요건 이상의 재해가 발생하는 중대 산업재해와 특정 원료, 제조물, 공중이용시설 등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중대 시민재해를 말하며, 위반 시 경영책임자 및 법인 등에게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이 제외되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공포 후 2년 후인 2024년 1월 27일 이후로 적용이 유예되었다. 말하자면,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중대 재해에 대해서는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및 법인, 원청을 제대로 처벌함으로써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와 일반 시민의 생명안전권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업안전보건법과 비교할 때 첫째, 중대 산업재해뿐만 아니라 원료, 제조물의 하자로 인한 중대 시민재해까지 확대하였고, 둘째, 보건 안전의무를 지는 수범자를 경영책임자까지 확대하였고, 셋째, 사업장만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중대 재해가 발생한 경우에도 실질적 지배 운영 관리가 인정된다면 책임지도록 하였으며, 넷째, 경영책임자에 대한 형사 책임과 함께 법인에 대한 벌금형을 병과함으로써 법인 책임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5인 미만 사업장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2020년 산재 사망사고의 35%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는데도 법 적용에서 제외됨으로써 기업 규모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다. 또한, 50인 미만 사업장도 2년 후로 유예되었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다

 

현실적으로 처벌을 강화하더라도 재해는 줄지 않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3일만인 지난 1월 29일, 경기도 양주시 삼표산업 양주사업소 채석장에서 작업자 세 명이 매몰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말하자면 중대재해처벌법 제1호 사건이 된 것이다. 또한, 2월 11일 오전 9시 26분쯤 전남 여수시 화치동 여천NCC 3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테스트 작업을 하던 노동자 네 명이 숨지고 나머지 네 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노동건강연대 발표에 의하면 2022년 1월 한 달 동안 67명이 일터에서 숨졌다고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더라도 현장의 사고는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명확성 원칙, 과잉금지 원칙에 위반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중대 재해와 경영책임자의 범위,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사업,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 또는 이에 필요한 관리상의 조치 등은 시행령으로 보완하고, 사건별로 수사와 재판을 통해 규범적으로 쌓여갈 것이다.

 

산재 사망은 무엇보다도 기업의 살인임을 인식해야 한다. 안전관리시스템의 부재, 위험의 하도급을 포함한 다단계 구조, 비정규직, 노동현장 환경 개선, 잘못된 관행 등을 해결하지 않는 한 산재 사고는 줄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를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에게 산재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안전보건 의무를 다하도록 하는 데 중대재해처벌법의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의무와 처벌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안전보건상의 의무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구보다도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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