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_우수상] 나의 삶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 윤슬 같은 반짝거림이다. -또 하나의 역사, 우리는 이렇게 23년 만에 단체교섭을 체결했다! _김덕희

by 센터 posted Mar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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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 윤슬 같은 반짝거림이다.

-또 하나의 역사, 우리는 이렇게 23년 만에 단체교섭을 체결했다!

 

김덕희 학습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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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습지 회사 대교의 눈높이 27년 차 교사이다. 내가 가난한 노동자와 결혼한 후, 아이가 태어나니 살림과 육아를 병행할 수있는 직업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집이 구로공단 근처라 가까운 전자 공장에 다닐 수 있었지만 세 살 아이를 탁아방에 맡기고 퇴근 후 데리고 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일은 그래도 종일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 손을 이끌고 퇴근해서 함께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었다. 둘째를 가지면서 그마저도 못하고 살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한 학기 잘 적응하는 것을 보고 여름 방학이 되자마자, 기저귀와 우유를 뗀 둘째 아이와 함께 시골 시댁에 맡기고 올라왔다. 학습지 회사인 대교에 8박9일 동안 신입 교사 연수를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연수가 끝나고 배정받은 지점에서 곧바로 눈높이 교사 일을 시작했고, 2학기가 되기 전 작은 아이는 시댁에 계속 맡기고 큰아이만 데리고 왔다.

그 당시는 학교 돌봄도 없던 시절이라 맡길 데가 없어서 아이 홀로 집에 두고 일을 해야 해서 방치 아닌 방치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눈높이 교사 생활은 결코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었고, 내 아이는 챙길 수 없어 혼자 있게 하고, 집집마다 회원 이름을 부르며 밤 9시, 10시가 넘도록 골목을 돌고 돌았다. 그일은 무려 27년 동안이나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렇게 나는 31027524라는 사번을 가진 대교 눈높이 교사로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비록 학교 선생님은 아니어도 가르치는 일에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회원과 학부모를 만났고, 십 년 이십 년이 넘도록 꾸준하다 보니 신뢰가 쌓여 소개도 많고 적성에도 맞아 눈높이 교사로는 최고 수수료까지도 받았다.

 

하지만, 학습지 교사로 일하는 동안 회사가 누누이 말했던 가르치는 일에 의미를 두는 대교 철학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사의 일방적인 목표치에 대한 실적압박과 퇴회를 메꾸지 못하면 교사의 수수료에서 차감되는 손실 때문에 성실히 일하는 노동자로서의 존엄과 가치도 훼손되었다. 회사의 정규직원이 아닌, 매년 1년이 되기도 전에 다시 또 재계약해야 하는,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개인사업자로 잘 포장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현장에서 고참 중 최고참이 되어 있었고, 관리자에게는 ‘부당하면 바른 소리 하는’ 밉보인 교사였었다.

 

학습지는 노동조합 가입과 동시에 간부가 되는 현실

내가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대교지부에 가입했던 시기는 치열하게 싸웠던 역사의 주인공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대부분 노조를 떠나고 남은 몇 간부들이 산별 노동조합을 정비하던 중이었다. 긴 투쟁으로 조합원 수도 많이 줄어들어 정체기에 있던 시기였고, 일할 사람이 없어 신입 조합원이 곧 간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난 간부 교육도 없이 실전에 투입된 셈이었다.

내가 지부장을 만나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었던 것은 각자 일하던 두 지점이 통합되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면서였다. 그 당시 나는 몸에 혹이 크게 생겨서 개복수술을 하게 되었고,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고 현장 일과 노조 간부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가입과 동시에 간부가 되는 일당백이었으나, 정말로 일할 사람이 없었다. 눈높이 교사들이 일하는 곳에서 왕따가 되거나 괴롭힘이 있거나 교사 들이 뭉쳐 노조에 연락하거나 하면 열심히 현장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렇게 하니 결과는 조합원이 점점 늘었고 교사들도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고 ‘조직 활동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뿌듯해했다.

 

질기게 남아 있던 지부장과 현장에서 튀어나온 나는 사무국장으로 주중 5일 동안은 현장의 회원들 관리 수업을 하고, 주말에는 고충을 알려오는 교사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노조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다 급기야는 금요일은 노동조합을 위해 일하기로 해서 회원 관리 수업 일수도 줄였다.

대교지부 역사는 2000년 노동조합 결성 이후 현장의 부정 업무와 노동조합 간부들을 해고하는 회사와 맞서 300일 천막농성까지 하며 치열하게 싸워서 지부 명맥을 지켜냈고, 내가 노조에 들어왔을 땐 지부장 혼자 전열을 가다 듬고 있었다. 조합원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때의 옛 간부는 나에게 왜 이제 왔냐고 말했다.

그 시기 학습지는 종탑과 환구단에서 투쟁하던 아주 힘든 시기를 수습하고학습지 중앙이 들어서고 본부와 지부 체제를 잡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현장을 조직하기 위해 모두 일당백으로 동분서주하던 시기였다.

 

2018년 6월 15일 ‘학습지 교사는 노동자다’라는 대법원판결로 힘을 결집해서 대교지부도 회사와 단체교섭을 하기 위해 전면으로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대교는 재능의 일일 뿐 대교도 대법원 판단을 받아야 단체교섭을 하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래서 2018년 8월 지방노동위원회를 거쳐 중앙노동위원회, 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순서로 3년여 동안 법률투쟁을 이어 나갔고, 코로나 시기에 본사 앞 투쟁 중이었음에도 대법원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이어갔 다. 대법 앞 시위가 통했는지 2021년 10월 14일 대법 승소 판결을 받았다. 드디어 회사가 굴복하고 노동조합의 단체교섭 요구를 받아들였다.

 

나는 회사가 ‘학습지 교사가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현장의 지휘·감독을 부정하며 내가 일하는 곳의 지점장이 법원에 사실확인서까지도 제출했었다는 걸 판결문을 받고서야 알았고, 회사가 이렇게까지 악랄하게 교사를 업신여기나 하며 분노했었다. 결국 우리가 이겼다.

 

노동조합의 투쟁은 현장 부정영업과의 한판 싸움이었다.

노동조합의 투쟁은 현장 부정영업과의 한판 싸움이었다. 현장에서 부정영 업으로 견디다 못한 교사들이 연락을 해오면서 시작되었고, 회사는 이후 열린 교섭에서 노동조합이 회사에 계속 알리기 시작해서 본사 차원의 클린징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했다. 관리자의 실적압박에 어떤 지점은 2,000여 정도 되는 허위 회원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인지한 회사가 직접 클린징 작업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부정 영업의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시작은 현장 교사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은 노조가 있어서였다.

 

코로나 시기의 특수고용직 투쟁과 본사 앞 투쟁

2019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두 힘들던 시기에 학습지 업계도 비상이 걸렸고, 현장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버렸다. 방문교사인 나는 회원을 만날 수가 없었고, 그나마 학부모를 설득해서 화상수업 하고, 이마저도 안 되는 회원은 교재를 넣고 수거해서 채점하고 소독하고 다시 넣어주는 일을 반복하며 남은 회원들과 함께 버텨냈다. 그런데 회사는 화상 수업할 태블릿을 강매하며 교사들에게 비용을 전가했고 회원과 살아남기 위해 교사들은 그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어서 이중 삼중으로 힘들었다.

 

코로나로 수입은 반토막이 나고도 회사로부터 마스크 하나도 제대로 지원받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대면으로 만나던 회원에게 코로나가 걸려서 격리되어도 회사는 나몰라라 했다. 우리는 분노했다. 그 시기에 회사 앞으로 달려가서 마스크 지급을 외치고 상생할 수 있게 회사가 나서라며 외치고 외쳤다. 조합원 중에는 코로나 시기에 본사 앞 선전전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유는 모두 조심할 때인데 노조가 욕을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이 나서서 동행기금 10만 원과 대출 200만 원 한도를 받아낸 것이 고작이었다. 현장에서는 매일 교사들에게 손소독제가 지급되지 않아서 사무 실에 비치된 소독제를 휴대용에 덜어서 다녔고, 구하기도 힘든 마스크 한 장도 지급되지 않았다. 회사도 엄청난 영업 적자를 보고 있었으나 상생을 고민 하지 않았다.

 

회사 앞 선전전을 하던 중 20년 5월 15일 스승의 날에 회사는 신제도를 도입 하고 방문교사의 수수료를 50%, 센터교사의 수수료를 40%로 일방적으로 만들고는 교사들에게는 신제도 전환을 강요했다. 순증 수당과 건강검진, 장례물품 지원 등 그나마 있던 복지제도마저 모두 없애버렸다.

회사는 신제도 구제도는 자율 선택이라 했지만, 50%가 넘는 교사들과 내방 채널 40%가 넘는 교사들의 수수료를 빼앗았음에도 업계 최고의 수수료라며 교사들이 모두 눈높이로 몰려올 것이라고 했지만 50% 수수료로도 교사 수급은 잘 되지 않는 실정이다.

회사는 예를 들어 57% 수수료를 받는 교사에게 제 수수료를 지급하지 않고 40% 고정 수수료라는 걸 만들었다. 교사들에게 제 수수료를 지급하지 않아서 40% 고정 수수료 반대 서명도 벌였던 것도 노동조합이었다. 그렇게 번 수익으로 주식 배당금을 챙기던 회사였다. 꼼수의 회사는 늘 이렇게 일방적이었다.

 

대교의 악제도, 재계약심사제도

학습지 회사 중 제일로 정도경영을 부르짖던 대교는 코로나 이전에도, 모두 어려운 터널을 지나온 이후에도 여전히 초지일관 바뀌지 않는 게 하나 있다. 회사 내 위탁계약직인 교사와 센터장에게는 재계약심사기준을 들이대며 고용불 안의 최일선에 있다는 것이다.

본사 앞 선전전에서도, 단체교섭이 열리던 중의 세 차례 결의대회에서도 그렇게 외쳤던 것은 재계약심사제도 폐지였다. 교사의 기준 완화와 센터장 기준 개선으로만 그쳤다. 단체교섭에서조차도 끝내 폐지하지 못한 부끄러운 제도 재계약심사제도이다. 대교의 악제도, 계약심사제도이다. 정녕 회원 수 감소가 교사와 센터장의 책임이란 말인가? 대교는 즉시 재계약 심사제도를 폐지하고 서로 상생하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또 하나의 역사, 우리는 이렇게 23년 만에 단체교섭을 체결했다!

2023년 9월 22일 첫 단체교섭을 체결했다. 나는 2년여 동안 교섭간사로 교섭에 참여하고 회의록 정리와 녹취록을 풀고 정리하는 일을 했으며, 본사 앞선전전과 결의대회로 회사를 압박할 때는 사무국장으로 집회 물품을 실어 나르고 정보과 담당 형사와 소음데시벨로 날 선 실랑이를 벌였으며, 아들뻘 되는 형사는 “언니”라는 성희롱발언을 하며 선전전을 방해했고 나는 문제 삼겠다고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갑상선암 수술을 받게 되었고, 면역력이 떨어져서 회원에게 코로나가 옮기도 했었다. 하지만, 교섭 중이라 쉴 수도 없이 회원관리와 교섭간사 일을 계속했다.

 

나와 교섭위원들은 회원들 수업을 하면서도 귀가해서는 교섭단 회의와 상황실 회의, 집행부 회의 등을 화상으로 밤늦게까지 했다. 이 교섭은 난생 처음 이었고 누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교섭단 9명이 헤쳐 나갔다고 하면 믿을까? 물론 연맹 법률원 주최 특수고용직 교섭학교도 참가했고 특고직 중에서 먼저 체결한 노동조합의 경험과 사례를 공부하며 귀 기울였고, 학습지 내에서도 먼저 체결한 재능교육지부의 생생한 도움도 받았지만, 실전에서는 대교지부의 사안이었다. 실전에서는 여러 실수와 돌파하지 못하고 정체기의 고비를 넘기기도 하면서 36차 교섭까지 이어와서야 잠정 합의안을 도출하게 되어서 조합원 총투표를 거쳐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대교지부가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받고 노동조합 사무실을 쟁취했으며 근로 시간면제제도를 적용하고 조합원교육과 홍보활동을 보장받으며 노사 소통 창구, 정규직 전환과 공개채용, 조합원이 신수수료제도 선택하고 회사는 신제도 전환 강요하지 않기, 입회 취소 기능개선, 교재 및 학습시스템 개선, 소득세 원천 징수 환급처리, 제품 및 마케팅자료 지원, 사업장 내 성폭력·성희롱·직장내 괴롭힘 금지에 따른 예방조치사건 조사, 피해자 보호조치 등, 구제도교사 건강 검진 부활, 신제도교사 장의물품 지급, 선생님 재계약심사제도 기준 완화, 센터장 재계약기준 완화, 조합원 휴식을 위한 투명한 하계휴양소 운영 등으로 단체협약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복지후생과 조합원의 일하는 조건인 건강검진 상해보험 가입, 감염병 지원, 경조금 지원, 동절기 휴가와 휴가비, 장기근속 포상, 자녀회비 지원 등은 회사가 4년 동안 연속 경영적자를 이유로 모두 수용불가 입장을 고수하여 노동조합 단체협약서엔 넣지 못했다.

단체교섭의 교착상태였던 재계약심사제도 폐지와 임금협약을 근기법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는 교섭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수수료협약이란 양보안으로 바꾸어 요구하였지만, 끝내 쟁취하지 못한 특수고용노동자의 설움이 여기에 남아 있다.

나는 체결식 직전 지부장과 입장문을 지금의 첫발이 역사에 남을 한 걸음임을 강조하며 마음에 새기듯 꾹꾹 눌러 썼다. 노조법 2·3조의 염원이 한 나라의 민심을 거역하는 대통령으로 인하여 고스러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 이후 번아웃된 나와의 투쟁

매 회차 교섭했던 녹취록을 노조 사무실에서 돌려 듣기를 반복하며 정리를 하여 교섭단 회의 전에 올리는 일이 정말 지치고 힘들었고, 대표 교섭위원과 교섭위원들이 늘 함께 있었지만, 교섭 간사로 누가 시키지 않은 누구도 하지 않는 이 일을 하기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체결 이후 난 공허함이 몰려왔고 몸 전체에 염증이 엄습해서 죽을 것 같았고 노동조합에서 안식년을 가지고 싶었다. 힘들기로야 앞서가는 지부장이 더 힘들었을 것이고, 교섭이 끝나자마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회원관리를 하러 가는 교섭위원이 더 힘들었을 것이고, 지방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올라와야 했던 교섭위원이 더 힘들었을 것인데, 나는 내가 더 힘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제 와 많이 미안하다. 나는 병원과 한의원과 황톳길에서 한 달 동안의 안식월을 보냈고, 다시 복귀해서 회사와 노사 소통의 자리에서 역시 간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삶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고 눈물 나는 윤슬 같은 반짝거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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