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노조, 사소한 실천부터 함께_심명숙 회원

by 센터 posted Jun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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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이 심명숙 회원, 희망연대노동조합 다산콜센터지부 부지부장
  • 인터뷰어 배병길 센터 상임활동가 
     

격월간 비정규노동161호 회원 인터뷰 주인공은 심명숙 회원이다. 그는 다산콜센터지부 지부장을 세 차례 연임하고 현재 부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간 지부장이라는 자리가 무거웠던 모양인지, 그는 홀가분하다고 했다. 지난 10여 년간의 노조 활동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역사의 흐름을 따라

어릴 적 그는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몇몇 선생님이었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이 불 때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선생님이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몇 달씩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중학생 때 전교조 활동을 하던 선생님이 징계를 받아 담임을 못 하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자연스레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고등학생 때 역사 서적을 즐겨 읽었다. 대학에 가서는 역사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학생회 활동도 했다. 대자보나 플래카드 글을 쓰는 등 선전 업무를 주로 맡았다. 평소 책을 즐겨 읽다 보니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신문기자를 꿈꾸고 있었다.1996, 그가 한참 학생회 활동을 하던 당시 분신이 끊이질 않았다. 그의 대학 동기 중에도 분신하는 이가 나왔다. 격한 투쟁과 함께 공안 정국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투쟁에 힘이 부쳤다. 학생회 활동을 쉬기도 했다. 그러다 4학년 때 지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면서 단과대 학생회 권한대행으로 활동했다.

 

콜센터에 들어가기까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외환위기가 터졌다.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할 그로서는 걱정이 많았다. 학생회 활동을 한다고 성적도 좋지 못했다.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꿈은 사라진 상태였다. 사실과 거리가 먼 기사,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 쓴 기사를 자주 접한 탓이었다. 어찌어찌 일반 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방법으로 돈 버는 걸 보고는 계속 다닐 마음이 사라졌다. 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통일부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5년간 수험 생활을 이어갔으나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친구의 소개로 다산콜센터에 들어가게 됐다. 공공 행정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공무원과 접점이 많아 보였다.그는 콜센터 업무에 빠르게 적응했다. 사회생활 경험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쌓은 지식이 도움이 됐다. 1~2년 정도 콜센터에 다니다가 여행사로 이직할 계획을 세웠다. 한참 여행업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콜센터 임금이 너무 낮았다.

 

어쩌다 시작한 노조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콜센터 노조 설명회에 가게 되었다. 노조 관계자는 이미 자사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가입했다고 했다. 사실은 노조를 만드는 중이었는데, 노동자들을 안심시켜 가입하게 하려고 거짓말한 것이었다. 그는 큰 뜻 없이 가입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노조 활동을 하면서 보니, 지부장을 제외하고는 노동운동이든 학생운동이든 제대로 활동해본 조합원이 없었다.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조를 본격적으로 띄우기에 앞서 조직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콜센터 내 세 업체 중 한 곳은 노조를 만들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회사에 불만이 많았던 거였다. 조직하기 용이했다. 그리고 또 다른 업체는 회사 네트워크에 직원들의 연락처가 있었다. 그는 퇴근 후에 한 명씩 연락을 돌리며 조직했다. 당시 그는 실적이 좋아 콜센터 내에서 꽤 이름을 날렸다. 유명세 덕을 쏠쏠히 봤다. 노조가 출범하고, 그는 부지부장으로 활동했다.

 

힘겨운 활동  

그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인간관계가 가장 어려웠다. 간부들끼리 갈등이 심했다. 바라는 노조의 모습, 노조를 통해 바꾸고자 하는 것이 각자 달랐다. 토론을 통해 이견을 맞춰가야 했는데 잘 안 됐다. 앞서 말했듯 지부장과 그를 제외하고는 운동을 해본 이가 없었다. 미숙했다. 그리고 서로 관계가 깊지 않았다. 생산적인 토론이 아니라 감정싸움으로 흐를 때가 많았다. 내부 갈등과 무관하게 조합원 수는 꾸준히 늘었다. 활동 성과도 쌓였다. 조회가 사라졌고 연차도 자유롭게 쓰게 되었다. 단체협약을 맺고, 서울시에서 직접고용 로드맵도 발표했다. 그러자 그간 노조에 무관심했던 이들이 미안하다며 가입해왔다. 그는 노조의 대중적인 성공과 간부들의 성장은 다른 문제라고 했다. 조합원들은 간부들이 어떤 갈등을 겪는지 잘 모르고, 조합원들에게 모든 걸 얘기할 수도 없다. 조합원들에게 뭔가를 제안하려면 간부들끼리 뜻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몇몇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좋으니 일단 부딪쳤다. 그 과정에서 성과도 나왔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투쟁의 성과가 빛이 나려면 함께 싸워서 얻어야 한다. 내가 투쟁해서 얻은 게 아니라면 관심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믿을 건 조합원뿐  

노조 활동을 하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숱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어 준 조합원들 덕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서울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3년가량 하는 동안, 일주일에 다섯 번은 꼭 채우자고 약속한 동지가 네 명 있었다. 모두 일반 조합원이었다. 그들 덕분에 1인 시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위기가 생길 때면, 누군가는 함께 투쟁하겠다며 그의 옆에 서 주었다. 다산콜센터지부가 출범한 지 10년이 넘었다. 15~16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파트별로 지회장을 두는데, 그중에는 10년가량 활동한 이들도 있다. 처음에는 직책을 맡기 꺼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식을 전하거나 파업 대오를 챙기는 등 역할을 하나씩 맡으면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오랜 기간함께한 중간층 간부들이 있기에 그도 버티고 노조도 성장할 수 있었다.

 

정규직 전환 이후  

2017, 다산콜센터재단이 세워지고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이 되었다. 그러나 처우 개선은 미비했다. 당시 서울시 내부에서 저항이 컸다. 그 탓에 예산 확보가 제대로 안 됐다. 재단 설립 이후 처우 개선 요구가 번졌다. 그리고 재단 운영을 담당할 사무직을 새롭게 공채했는데, 이들이 콜센터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고, 이들과 노조 사이에 계속해 잡음이 생겼다. 재단 전환 이후 파업이 없던 적이 한 해밖에 안 될 정도였다. 코로나19 시기, 콜센터 노동자 건강권이 큰 이슈였다. 서울시는 업무 공간을 넓히기 위해 새로운 청사를 만들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당장 성과를 낼 수 없는 사업이다 보니 결국 리모델링을 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상시 재택근무 체계를 만들고, 남는 공간을 리모델링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재택근무자들에 대한 장비(모니터, 책상, 의자 등) 지원이 전무했다. 개인이 비용을 대는 식이었다. 그리고 재택근무자들은 고립감을 호소했다. 감정노동이 심함에도 고충을 나눌 동료가 없었다. 홀로 감내해야 했다.현 정부 출범 이후, 공공기관 개혁의 파고가 재단에 미쳤다. 공무원 수준보다 높은 단협을 개선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현재 감정노동에 따른 안식 휴가 및 위탁기관 창립 기념일을 없애라는 요구를 놓고 싸우는 중이다.

 

함께 지키자  

그는 새롭게 만들어진 콜센터 노조들을 만날 기회가 꽤 있었다. 그 노조들은 다산콜센터지부가 겪었던 문제를 그대로 겪는 중이었다. 그는 그동안 활동하며 쌓아온 경험을 나누었다.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하면서 동지 관계를 쌓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조합원들이 작은 투쟁이라도 좋으니 직접 실천해야 함을 강조했다. 성명서나 항의서를 쓴다든지, 대자보를 붙인다든지, 스티커 설문을 한다든지 말이다. 그래야 투쟁 후 성과가 나와도 자신의 성과로 인식하고, 다음에 또 참여할 동기가 생긴다는 거였다. 그는 노조를 만들기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고 했다. 노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자로서 의식을 계속해 가꿔나가야 한다. 원칙과 절차를 지키고, 회사 측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오래된 노조일수록 조합원이 보수화되기 쉽다.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할 요즘 같은 시기에 특히 그렇다. 과거 힘겨웠던 경험이 떠오르면서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조합원을 설득하며 실천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는 민주노조를 계속해 지켜나가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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