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날 때마다 비가 오네
당신의 말이 도시 틈새로 스며들어 비구름을 만들었다
붉은 육개장 국물을 삼키는데
왜 하필 고사리가 왜 하필 토란대가
비 오는 날은 억울한 일 천지
우기도 아닌데 비는 계속 내린다 저녁에도 새벽에도
설거지통에 밀린 그릇들이 쌀통의 벌레들이
스멀스멀 빗방울처럼 기어나와
뒤통수가 가렵다
온몸이 물로 꽉 찬 다육식물처럼
시치미 뚝 떼고 살아가는 게 생이란다,
꿈에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다시 쌀을 씻어 안친다
고등어를 구워도 가시를 삼켜도 딸꾹질이
그치지 않는다
김은경 시인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량 젤리》,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냈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나는 날개와 지느러미를 달고
제일 높은 송전탑에 앉아
평화를 외쳤다
용기를 버리고
고요하고 고요하게
아주 작고 작은 일상들을 훔쳐 도망간 평화
내 안에 머물렀던 평화를 고발합니다
강물 같은 평화라 말하지 마라
바다 같은 평화라 말하지 마라
너의 더러운 유혹에
나는 너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거란다
내 안엔 우울한 비둘기 가족이 살고 있어 가족은 내 마음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가며 헤졌고 다니지 나는 간절하게 평화를 원했어 평화가 푸드득 날아왔지 그리고 나에게 용기라는 선물을 주었어 나는 용기를 가지고 사치스럽게 외면을 사들였지 외면이 풍족해지자 죄책감이 생겼어 죄책감이 싫어서 웅크려 자고 있던 죄책감을 업고 초록빛이 감도는 올리브 꽃이 핀 자리에 묻어 버렸지 꽃이 피는 나무에 꽃이 피지 않자 나무를 베어버렸어 헐거워진 향기들은 공중 바닥으로 토해내고 나뭇가지는 두꺼운 플라스틱이 되었지 썩지 않는 나무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어 나는 나무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었지 절룩거리는 나무를 데리고 평화를 모집하는 학교로 갔어 꽃이 피면 아름다운 나무 평화가 열리는 나무라고 아이들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알려주었지 한 아이가 이 나무는 꽃이 피지 않는 가짜라고 외쳤어 아이 입을 틀어막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예수처럼 미소 지었지 또 다른 아이가 외쳤어 착한 사람의 미소는 회색이 아니라고, 나의 평화를 깨버린 아이의 입속에서 파랑새가 빠져나와 내 등에 핀 회색 물고기 비늘을 찾아서 쪼아대고 날카로운 십자가로 쓱쓱 문질렀지 내 몸에서 검은 꽃물이 터졌어 도시로 흘러내린 검은 피, 도시는 온통 까만 비둘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있어
지구는 온통 9시 뉴스입니다
검사는 “사람이라면, 도시를 정상적으로 돌려놓으세요.” “아이들이 용서할 때까지 집 앞에
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비세요” 판사는 “당신은 자유입니까 민주입니까?” “당신은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변호사는 “자유와 민주를 믿고 평화를 원했다고 하세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당신의 평화를 증인으로 세우세요”
송전선에 흐르는 전류가
내 몸에 탑을 쌓을 때
나의 메아리는 죽었던 나와
평화를 모집하는 학교로 흘러갑니다
한경숙 시인
2019년 《딩아돌하》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가 있다.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의 통화 기록을 확인합니다
나의 배는 언제나 차가워서
분명 뜨겁지 않은 말들을 밤새
쏟았을 것입니다
소화되지 않는 언어들을
차마 시어로는 만들지 못하고
온몸이 가시로 가득 차지 않게
온몸이 꽁꽁 얼어
스치는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날이 선 말로 상처를 주진 않았을까요
휘청거리는 건물의 불빛을 등지고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게
배를 쓸며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릅니다
주름진 시간이 가득한 좁은 방에
조금은 따듯해진 배를 끌어안고 누워
오늘도 통화기록을 뒤집니다
안녕,
잘 지내고 있니.
발신이 금지된 휴대전화의 통화기록은
오래전 날짜에 멈춰있습니다
김진 시인
2007년 《경남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시집 《바다 고시원》
멀쩡하고 매끈한 밤 속에 웅크리고 앉아
속살을 파먹고 있는 애벌레
가부좌를 틀고 앉은 폼새가
부처님 못지않은데
겉은 멀쩡하니 건강미 넘쳐흘러서
한눈에 보기도 탓할 것 없다
머리도 없고 가슴도 없고
겉옷 매무새만 단정하니 차려입은 알밤들이
지하도 에스컬레이터 계단에서
우르르 쏟아진다
필살기로 뜨거운 냄비에 투항한다
벌레에 속살이 파먹히는지도 모른 채
남의 속살이나 탐내며 분주히 걸어가는
가공할 껍데기들이
앞다투며 삿대질하며
도심 속 빌딩 꼭대기를 향해 질주한다
글|시인 조혜영
연필심처럼 뭉툭한 철근을 한쪽 어깨에 인 사람
좀만 더 잘 휘어졌더라면
보다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아시바에서 작업을 하다 건물 4층 높이에서 떨어진 인부
배는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서
엎어진 헬멧처럼
언덕 하나를 만들어내고
금세 빌딩만큼 높아진다
터지지는 않고 숨은 이내 꺼졌다
손에 쥔 만년필을 철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언젠가 내가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말
미끌미끌한 종이에 기댄 만년필촉처럼
궂은일이라면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기질은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생긴 것이다
나는 통유리에 비친 이와 나란히 걷는다
고층 빌딩에 매달린
낡은 옷가지가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농성 현장은 작은 숨김에도 흩어져버리는
종잇조각처럼 보인다,
라고 메모장에 쓴다
누가 죽어야만 잠깐 모이는 광장에서
곧 끝난다는 사람들의 절망 예행연습은
어느덧 진부한 생활로 자리를 잡고
나의 눈망울은 그들이
내려다본 점조직의 밤거리를 닮아간다
그 눈으로 본 세상엔
건물의 밑바닥과 꼭대기를 잇댄
투명한 철근이 있다
온몸이 짓뭉개져
숨을 헐떡이는 내가 있다
문경수 시인
2019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했다.
왼쪽 눈 가짜인 아빠는
한 번도 진짜인 적 없었다고
어디에도 오래 있을 수 없었지
하나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오래할 수 없었대
그땐 그랬대
아빠가 하는 일은
입구와 출구를 지키는 것
입구와 출구에서 어디로도 가지 않는 것
입구와 출구가 겹쳐진 공간을 오래 보는 것
낙엽을 조금 늦게 쓸었다고
쫓겨났다 아빠는
술주정 받아주지 않았다고 부녀회장한테 인사하지 않았다고 점심을 너무 오래 먹었다고 세차를 대신 해주지 않았다고 택배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휴가를 썼다고 함부로 몸이 아팠다고
쫓겨났다 아빠는
내겐 진짜였던 아빠는 어디선가 늘 가짜로 늙었다
다른 걸 지키다가 자신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그러니까 당신들이 말해봐
천국의 입구와 출구를 지키는 사람은
천국이 허락한 사람인지 천국을 허락하는 사람인지
아빠의 왼쪽으로, 자꾸만 왼쪽으로 숨는
세계의 절반을 멀쩡한 당신들이 왜 볼 수가 없는 건지
최현우 시인
1989년 서울 출생.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밤새 달려온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는 순간 어제가 오늘이 되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봄소식과 함께 전해왔다
무료급식소가 있었던 자리
한 아버지가 말줄임표로 서 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림자도 함께 서 있다
무쇠 바퀴 굴러가는
쇠 울음소리가 들리는 서울역
사금파리를 입에 문 그믐달이 오늘도
염천교 다리 위에서 자가격리 중이다
*제목은 이탈리아 루도비코 뒤 마르티노 감독의 영화 〈짐승의 시간〉에서 차용했다.
이권 시인
전직 철도 노동자였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민예총 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아버지의 마술》과 《꽃꿈을 꾸다》가 있다.
수만 장의 웃음이 찍힌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몇 가지 작물이 자라고
가을걷이로 햇빛에 그을려도
접었다 펴면
한번쯤 하얗게 화장발을 곧추 세울 것 같은 너른 밭
어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
주름에서 떨어지는 땀
마을을 떠난 나는 주름에서 튀어 나간 것
자식들 다 빠져나가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의 부피
갈수록 비어지는 내부가 쭈굴쭈굴 해 진다
접혀져 있는 시간들이 펴질 것 같지 않은
갈아 놓은 밭이랑 사이
주름의 긴 고랑이 여름을 지난다
연금술처럼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어머니의 주름
주름위에서 자라는 것들
뛰어 놀던 발자국 문양 튕겨 나간 부분이 진하게 남아 있다
한번쯤 뽀얗게 화장시키면
수분을 받은 흙들이 쫙쫙 펴질 것 같은
어머니 주름진 얼굴에 화장 하고
도시의 딸집 간다
겨울에 펄럭펄럭 날리는 하얀 비닐처럼
쩍쩍 일어나는 화장기
주름진 부분만 고요하다
여름과 가을을 지난
밭이 주름에 잠겨있다
이지호 시인
2011년 제11회 창비신인 시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말끝에 매달린 심장》,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가 있다.
나는 이 바닥에 온 지 7년쯤 됐을까
본점으로 지점으로 많은 동료들이 들어왔다
또 나가는 동안 지문이 사라져버렸다
손에 물 닿고 불 닿고 하는 게 일이니
손이 미끌거려 비닐을 펼칠 땐 검지에 물을 묻힌다
뭐든 묶어 냉동실에 쟁이는 게 일이다
코로나팬데믹이 절정일 땐 종일 서서 10시간을 비볐다
화구의 매연과 전표와의 싸움은 묵은 때 청소로 대체된다
환갑을 앞두거나 지나거나 종이박스 위에 쭈그려 엎드려
냉장고 안 성에를 깨는 여사님들 신세한탄을 듣자하면
십수 년 경력 다 소용없는 모두 최저시급 종사자로
나 같이 젊은 놈을 타박한다 자격증 따서 진급해라
진급이란 평생 윗사람 뒤치다꺼리나 하는 일이니
턱 괴고 앉은 어린 점장 넋두리 또 듣노라면
쓸쓸한 뉴스를 보는 것 같아서 일이란 게 어차피
지문쯤은 없어도 될 서로 검지에 물이나 묻혀 하루를
때운다는 것이다 이 바닥이 그렇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면 그렇게 형편없다는 말씀
조회 때 종대로 모여 듣고 점심 때 횡대로 줄서 듣고
형편없는 반찬들 형편없는 살림들
누가 또 과일 좀 싸왔다고 둥글게 모여
시시콜콜한 뒷담화로 밥시간을 때운다
최명진 시인
2006년 리토피아 신인상 당선.
시집으로 《슬픔의 불을 꺼야하네》가 있다.
제주 청년 고남도 씨는 1948년
바람 세찬 어느 날
배에 숨어 일본으로 밀항했다
폭도로 몰려 토벌대에 학살당한 이웃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제주에서
비탈밭을 일구기가 괴로웠던 그는
일본인 밑에서 허드렛일하며 겨우 먹고 살아남아
일본말을 터득하고
일본에 세금 내는 거주민이 되었으나
제주에 불던 바람이 잊히지 않아
나무들이 흔들리는 날이면 날마다
비탈밭을 떠올리다가 늙어 죽었다
예멘 청년 모하메드 씨는 2018년
바람 세찬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입국했다
반군과 정부군이 이웃들을 사이에 두고 총질하고
동네에 폭탄 터뜨리는 예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에 대해서도 가르치던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농사일을 해본 적 없고
고기잡이배를 타본 적 없어
말이 통하지 않는 제주에서
난민 신청자에게 주는 생계비로 버티며
우선 먹고 살아남을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다가
바람 부는 날이면 날마다
초등학교 교실을 떠올리며 살날을 헤아렸다
하종오 시인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사월에서 오월로》《넋이야 넋이로다》《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정》《깨끗한 그리움》《님 시편》《쥐똥나무 울타리》《사물의 운명》《님》《무언가 찾아올 적엔》《반대쪽 천국》《님 시집》《지옥처럼 낯선》《국경 없는 공장》《아시아계 한국인들》《베드타운》《입국자들》《제국(諸國 또는 帝國)》《남북상징어사전》《님 시학》《남북주민보고서》《세계의 시간》《신강화학파》《초저녁》《국경 없는 농장》《신강화학파 12분파》《웃음과 울음의 순서》《겨울 촛불집회 준비물에 관한 상상》《죽음에 다가가는 절차》《신강화학파 33인》 등이 있다.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까치조차 짓지 않는
30m, 40m 높이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땅 위에서 외치는 소리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 들리지 않아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는 일이야 늘 이어지고 있지만
더 높이 오르면 소리 전할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날개도 없는 사람들
까치집 보다 높은 곳에
이상한 집을 짓는다
* 인권. 통권 78호 한금선 님의 시선에서 인용함.
* 2013년 1월 4일 전주종합운동장, 천일교통 해고노동자 김재주 분회장이 철탑 농성을 함.
이상호 | 창원 출생. 1999년 제11회 ‘들불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개미집》이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5년 《깐다》 등을 펴냈다.
‘객토문학동인’,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사 理事
이송우 시인
이사했다
스무 해 직장 생활은
서명하고 나니
종이 몇 장 무게만큼 가벼웠다
아내의 말처럼
한창 일할 때
은퇴는 없어야 해서
프리랜서로
이사했다
새로 나온 명함에 담긴
오래 기다렸던 이름
어디에도
몸 숨길 곳 없는 벌판에
낮이면 햇살에
밤이면 달빛에 벌거숭이로 나서기 위해
이사했다
2018년 《시작》 등단.
시집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
『신세기 타이밍』,
미얀마 혁명시 모음인 공편 시집 『나의 투쟁 보고서』가 있음.
한때의 무리가 폭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저 무리 속에 깃발을 흔드는 꿈
저 무리 속에서 팔뚝을 치켜드는 꿈
시새움의 눈빛이 아니라,
부러움의 눈빛이 아니라,
저들의 구호가 언젠가 우리들의 구호가 되고
저들의 파업 선언이
실업자들에게도 희망의 선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6030의 꿈,
그 꿈의 현실마저도 여섯 시간으로 꺾이고,
다섯 시간으로 꺾이고,
10원짜리 동전 만 개로 내동댕이쳐지는 청춘의 꿈
꺾여진 청춘의 꿈이다.
한때의 무리가 폭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거리를 지나면서 가게 안으로 던져 넣어주는 전단지
가슴 뭉클하게 와 닿지 않는 낡은 구호들
감동으로 와 닿지 않는 저 낡은 구호들.
울타리 밖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이편과 저편,
새벽 3시까지 마감을 치고,
손님들이 토해낸 화장실 청소까지 끝내놓고
편의점 앞에서 5천 원짜리 말라버린 족발 씹으며
소주 몇 잔에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청춘들도 있으니,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져 버린
울타리를 하나 사이에 두고, 갈라져 버린
새벽과 밤을 가르는 사이
무능과 자괴감으로 무너져 내리는 청춘도 있으니,
그 차가운 손을 잡아야 한다.
그 꺾인 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4월의 꽃피는 봄,
7월의 불타는 거리에서
그 여윈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손에서 공구를 내려놓는 순간,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늙은 노동자 앞에
불쑥 전도지를 내밀며,
“불신지옥, 예수천당!”
그 미친 예수쟁이의 목쉰 소리가 들린다.
대열의 후미에서 생수병에 소주를 넣어 마시고
힘겹게 따라가는 늙은 노동자를 보라.
그 움푹 패인 불안한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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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남 시인
해방글터 동인, 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 전태일문학상, 노동해방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희망수첩》, 《때로는 눈물도 희망》을 냈음.
푸른사상 건설노조 활동 이후 마을목수로 현장에서 살아감.
어머니는 초상이 날 때마다 내 손을 잡고 갔다 놀다가도 재 너머까지 가곤 했는데 초상집
이 누구네냐 물어도 그냥 따라오기나 하라며 발길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대문에 들어서자마
자 아이고 아이고 하며 구성지게 곡을 하셨다 옆 사람도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어머니의 곡
소리였다 친척집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왜 그리 슬피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죽
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 슬프게 곡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빨리 먹으라고 나만 듣게 눈짓
을 하셨다 한참 곡을 하며 울다가 고개를 돌려 살짝 웃으며 많이 먹었냐며 소근댄다
그때 바뀌던 어머니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그 슬픈 끼를 이어받았다는
어느 중년배우의 고백을 듣다가
우리는 늘 제 기쁨을 위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모두가 배우라는 생각을 한다, 역만 달랐을 뿐
글|시인 조문경
꿀처럼 비가 흐를 때
사람들이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핥고 서로에게 키스하던
때, 덩굴풀이 무성하게
담장을 허물던 날들에
빗방울을 모아 접시에 두고
여름의 짧은 밤을
춤추며 보내던 시절에
비를 말려 얻은 색으로
연인의 이마에
혈관의 무늬를 탁본하던 꿈결에
잡아먹힌 빛들이 흐르고
어둡다 여전히 비는 가볍게
빛나며 나는데
목덜미의 흰빛을 물고 비가 툭,
사라지는 비
깔깔 웃으며 가버리는 비
사람 잡아먹는 비에 홀렸대
소중한 걸 묻어둔 곳을 찾지 못해서
맹렬하게 건조한 우기를
그저 견디고만 있는 거래
범람하지 않는 비를 골몰한다
눈이 타버릴 때까지
좋았던 날의 돌을 움켜쥐고
때가 오면 내리칠 것이다
또 한 명이 쓰러진다 어스름이 짙어진다
기도를 잊고 텅 빌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주마등 속에 산다
비가 속살거리는 옛 기억에 들려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또 한 명이 쓰러진다 비가 툭,
주검의 관절마다 비가 툭,
빗방울만 환한 나라에서
비에 갇힌 꿈의 군락에서
오로지 비만,
사랑스럽다
이용임 시인
2007년 한국일보 시 부문 당선. 시집 《안개주의보》 《시는 휴일도 없이》, 산문집 《당신을 기억하는 슬픈 버릇이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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