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월

by 센터 posted Oct 05,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Files

부서진 사월


시계침에 매달린 인간들이 땅을 보며 걷는다
어젯밤에 썼던 콘돔은 튼튼한 것이었을까
일본 원전을 덮어씌운 콘크리트는 안전한 것일까


어제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이 오늘은 당신을 모른 체하고 지나간다
바닥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포개졌다가 흩어진다
잠시, 괴물의 형상이 되었다가 딱딱한 혼자가 된다


빈혈에 시달리는 가로수들
나뭇잎의 뒷면에서 어둠이 뚝뚝 떨어져
나무 밑동에 고인다


저 멀리서 온통 눈물로 젖은 얼굴이 걸어온다
그의 자식이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의사에게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은 것일까
그는 자신의 눈앞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불행들을 손으로 걷어내려는 듯
양팔을 휘저으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눈을 감았다
그를 붙잡고
내가 같이 울어줄까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를 껴안으면 그는 물이 되어 쏟아질 것 같았다


눈을 뜨니 구명정 같은 구름이 떼를 지어 흘러가고 있다
나는 햇살의 뼈를 만져본다
뼛가루 같은 햇살이 내 손바닥을 데웠다
죽어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나뭇잎이 떨고 있다


이 지상에 파견된 봄은 갈 곳을 몰라 서성거린다
가운데부터 검게 시드는 목련 잎에는 자신의 몸에 권총을 쏜 것 같은
탄흔이 남아 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붕대를 감고 또 하루를 건너가겠지


눈을 감으면 수면을 뚫고 수많은 소금 인형이 걸어나온다
데운 조약돌로 눈두덩을 지져도 사라지지 않는



축소신철규.JPG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부서진 사월〉은  계간《시로 여는 세상》
2014년 가을호에 발표됨.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낮게 허밍으로 file 센터 2023.12.01 19
58 이사 理事 file 센터 2024.03.14 21
57 빙점 아래 file 센터 2022.12.23 30
56 평화야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file 센터 2023.04.27 31
55 어느 쓸쓸한 주점에서 file 센터 2024.01.17 32
54 사카라 file 센터 2023.07.03 34
53 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file 센터 2022.08.29 37
52 통화기록 file 센터 2022.10.31 40
51 레이어 file 센터 2023.09.11 43
50 짐승의 시간 file 센터 2022.04.25 48
49 조리사는 계속 모집되고 file 센터 2023.02.27 51
48 초심 file 센터 2022.06.27 53
47 뒷맛 file 센터 2022.02.24 59
46 주름의 노래 file 센터 2021.10.27 89
45 리어카를 구원하라 file 센터 2021.12.23 92
44 공범 file 센터 2021.08.25 93
43 봄날, 그럼에도 file 센터 2021.06.23 165
42 건너지 못하는 인사 file 센터 2021.04.26 166
41 흘역吃逆 file 센터 2021.02.26 188
40 우기의 나라 file 센터 2020.10.22 361
목록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Next ›
/ 3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