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빛

by 센터 posted Jun 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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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잭은 막 세단에서 내린 사내를 향해 달려가 인사했다. 검은색 양복에 둥근 금색 안경테, 꽉 조여진 회색빛 넥타이를 맨 제임스 브라운 핼리캡터는 주춤하며 손을 건넸다.

“사장님 햇살 참 좋죠.”

경호원들은 핼리캡터의 손짓에 잭을 제지하지 않았다. 핼리캡터는 미소를 지었지만, 도대체 이 자가 누구인가라는 눈빛이다. 잭은 홈인테리어 쇼핑몰을 운영하는 핼리캡터에게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 한 달 전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라이트 엑스포를 말했다.

 “그 날도 이렇게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따사로운 노란 빛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죠. 제 부스에서 제품이 좋다고 했죠.”

핼리캡터는 모른 척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땀으로 반짝거리는 이마를 닦으며 잭은 말을 이어 나갔다.

 “제임스 브라운 핼리캡터 사장님. 사장님이 마치 오후의 빛과 같다며 좋아하셨어요. 기억이 나시죠.”

핼리캡터는 이제야 알겠다며 고갯짓했다.

“아 그렇군. 자네가 그 상품의 사내였군. 그래 어디서 본적이 있다 했지. 미안하네. 지금 바쁘니 3일 후 비서를 통해 약속을 잡아보게.”

핼리캡터는 손가락을 까딱했다. 제임스 브라운 핼리캡터 사장 주위로 검은색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모였다. 핼리캡터는 잭으로부터 멀어져 24층 유리 건물로 사라졌다. 햇살에 반사된 빛에 핼리캡터의 눈이 번쩍였다. 잭의 이마에 흘러내린 땀이 햇살에 반짝했다.


창고에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수천여 개의 전구들이 적재되어 있다. 수많은 시험을 거쳐 나온 제품이지만 아직까지 판매망을 찾을 수 없다. 한때 자연색을 건강한 빛을 낸다는 의미로 ‘그린 라이트’라는 브랜드로 홈페이지도 만들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지만 시장 반응은 냉혹했다. 아니 소비자들은 밝은 인공의 형광 빛을 선호했다. 필리핀의 생산 설비를 철수했다. 남은 것은 저 컨테이너 임시 창고 속 세상 빛을 보지 못한 빛들과 감당하기 어려운 빚뿐이다.


잭은 창고 문을 따고 전구를 가지고 나왔다. 업무형 스탠드를 켠 뒤 탁자 위에 달걀형 전구알들을 올려놓고 카탈로그를 수정했다.

‘노르웨이산 원목과 자연의 빛을 담아냈습니다. 빛 하나가 당신의 공간과 삶을 업그레이드 할 것입니다. 지금 바로 켜 보세요! 노르딕의 빛을 당신의 거실과 안방에 모셔 주세요.’

여러 가지 광고 카피가 맴돌았다. 잭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들이켰다가 내뱉은 연기가 형광 빛을 타고 벽에 걸린 잭 킨필드의 사진 위로 올라갔다.

조만간 창고에 있는 저 아이들이 전국 가정집의 서재와 부엌을 빛내리라. 그러면 빚도 다 갚고, 메리 홀린에게 청혼도 할 수 있겠지. 잭은 조명을 차례대로 켜지게 하거나 빛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다. 이것은 좋은 청혼 방식이리라. 머릿속에서 세워진 계획이 잭을 흐뭇하게 했다. 곧 주머니에 대출금 이자도 갚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다가왔다.


잭의 할아버지 킨필드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사고가 났을 때 폭우가 내렸다고 전해 들었다. 창 밖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본 잭의 할아버지 킨필드는 아들을 혼자 두고 나갔다고 했다. 잔주름 가득한 할아버지는 신이 난 아들에게 “지난번처럼 감기 걸리면 안 된다. 오늘은 집에서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멋진 광경을 구경해.” 하고 타일렀다. 킨필드는 서둘러 우비를 입었다. 대형 연과 유리병, 금속 막대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아버지는 주전자에 우유를 넣고 데웠다. 그때 하늘에서 반짝 빛이 보였고, 이어 우르륵 우르륵 소리가 났다. 영특한 아버지는 당시 빛과 소리의 관계를 알았기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빛이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우웅 크르륵, 우웅 크르륵 빛과 번개가 동시에 쳤다. 아버지는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잭 킨필드가 빛을 더 담으려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말처럼 잭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노르웨이의 빛이 되셨지.”

아버지가 성인이 됐을 때 어둠을 밝히는 전구는 시판됐다. 아버지는 에디슨이 설립한 전기 회사에 들어갔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 새로운 빛을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는 이후 혼자 연구 개발을 했고, 그것은 잭에게 넘어왔다.


오랜만에 양복을 입은 잭이 유리로 번쩍이는 사무실을 찾았을 때 핼리캡터는 어떻게 하면 잭의 전구를 빼앗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전기 소켓에 작은 선을 넣었다. 핼리캡터는 시거를 입에 가져대면서 ‘멍청이 녀석’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잭은 카탈로그를 보였다.

“노르웨이의 빛입니다. 이거 보세요. 기존 형광등 또는 백열등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작은 스위치는 주변의 빛을 감지해 자동으로 강약이 조정됩니다. 색채 보정도 가능해서 사장님이 좋아하는 오후 5시의 빛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부드럽거나 거친 입자도 표현됩니다.”

핼리캡터는 말로만 하지 말고 제품 시연을 하라고 했다. 잭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동안 숱한 일이 있었다. 충전이 부족해 조도 테스트에서 떨어진 적도 있고, 필라멘트가 끊어지거나 합선으로 전구를 태워먹기도 했다. 심지어 전구를 꺼내다 깨먹기도 했다.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으리라. 잭은 조심스럽게 낡은 여행 가방에서 빛의 아이들을 세상에 꺼냈다. 잭은 달걀형 전구의 전기선을 콘센트에 꼽았다.

“자 이제 노르웨이의 빛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기대하세요.”

전원 스위치를 켜자마자 ‘찌찌직’ 전기가 올라왔고, 잭의 손과 팔이 경직됐다. 이어 ‘펑’ 하며 전구가 터지고 하얀 연기가 사무실에 찼고, 탄 냄새가 퍼졌다.

 “당장 저 자식을 밖으로 내쫓아!”

핼리캡터가 소리를 질렀다. 경호원들이 잭에게 달려들었다. 잭은 가방조차 챙기지 못한 채 사지가 들려 유리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는 오지 말게. 다음에는 경찰을 부르겠네.”

경호원들은 잭을 바닥에 팽개치며 말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감전 탓에 잭은 눈만 껌벅거렸다. 햇살이 잭의 이마에 살며시 올라와 앉았다. 굳어진 잭의 어깨를 툭툭 움직였다. 어디선가 “괜찮다. 괜찮다”라는 말이 들렸다. 잭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5시 햇살에 눈이 부셨다.



글 | 이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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