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이라도 ‘느리게 걷자’

by 센터 posted Sep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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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자마자 바로 활동을 시작한 저도 그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때로 눈 앞에 있는 일들을 해치우기 위해 달려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저의 경우, 매일 같이 집과 사무실을 오가며 조직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온 힘과 마음을 쏟아부었던 그 시간은 돌아보면 귀중한 경험이지만,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 몸과 마음이 지쳐갔습니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숨가뿐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준비가 부족할수록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보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러했고 다른 활동가 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아직 몸과 머리에 익지 않은 일들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시기, 저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떤 업무와 무엇이 필요한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에 파고들며 모든 것이 모르는 것이니 매번 물어보거나 자료를 찾아보고, 부족한 준비와 능력은 그때마다 대처하며 긴 시간을 들이는 것으로 해결하고, 힘들어 지칠 때면 조바심으로 스스로 마음을 채찍질하며 달렸습니다그렇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니 어느새 일이 눈에 익어가기 시작하고, 일을 하기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익숙해지고 확실히 이전보다 빠르게 일을 해내며 스스로 실무에 익숙해졌다 생각하며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어느새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일을 하다 종종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 자신에게 화가 났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다 나의 마음을 깎아내며 일을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와 비슷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주변에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몸담았었던 곳은 조직의 구성원 수나 그 역량에 비해 정말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그만큼의 커다란 책임을 진 조직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생겨나는 새로운 이슈와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을 만들어 실행하고, 그러면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필수적인 업무들이 정말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선 구성원 모두가 끝나지 않는 경주를 하듯 매번 새로운 이슈의 해결을 위해, 조직을 보다 키우기 위해 달려나갔고 그런 시간이 지나며 저보다 먼저 활동을 시작한 선배와 동료들이 하나둘 지쳐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시기에 장기하와 얼굴들느리게 걷자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죽을 만큼 뛰다가는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라는 가사는 지금 내가 이 조직에 있으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무엇인지, 주변 사람들과 나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고민할 것인지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그 이후 내린 답은 일단 여유를 가지기 위해 노래 가사처럼 직접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퇴근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종종 느리게 걸어보았습니 다. 치열한 일과 중 마음에 여유를 가지기 위해 조금의 시간을 투자하여 사소하지만,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에 관심을 두곤 했습니다. 출퇴근길에 화단을 둘러 보며 고양이를 찾아보기도 하고, 봄이면 여러 꽃을 보며 이름을 외우고, 가을 이면 바깥에 나가 단풍에 물든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종종 느리게 걷자를 들으며 바쁜 일상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하루를 정리하게 되며 어느새 마음속에 여유가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힘도 얻었습니다. 또 자연스레 일과 삶의 중심을 찾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스스로가 소진되지 않게 회복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었고요. 덕분에 어려운 시기에 달리지는 못해도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 목표한 바를 이룰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정말 수많은 현안이 터지고 다가온 문제들에 대응해야 하는 바쁜 시기입니다. 정치는 노동자 권리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빼앗고자 하고 있으며, 수많은 평범한 노동자들은 연대의 힘을 잊어버리고, 지난 정권 동안 노동계가 쟁취한 것들은 하나둘 사라지거나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같이 어렵고 바쁜 시기에도 약간의 시간을 들여 한 번 느리게 걸어보며 여유를 잠깐이라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많은 활동가 분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고, 일과 삶에 중심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외압과 탄압만이 예상되는 지금, 다음을 도모하기 위해 지금의 활동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힘들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활동가 개인들이 건강하고 오랫동안 남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빠르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느리고 천천히 걸어도 멀리 갈 수 있는 힘이니까요.

 

송하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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