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매개로 잇다_송유림 회원, 서울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실

by 센터 posted Feb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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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 송유림 회원, 서울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실

인터뷰어 : 배병길 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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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기념관 5층에 자리 잡은 서울노동권익센터(이하 권익센터)를 방문했다. 권익센터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서울시로부터 수탁해 운영하는 기관이다. 최근 예산 삭감 문제로 풍파를 겪고 있다. 서울시는 노동센터들뿐만 아니라 서울시 민간위탁 사업 전반을 손질하려 한다. 송유림 회원은 인터뷰 내내 이에 대한 걱정과 무력감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사업을 이어나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였다.

 

교내 활동에 진심인 편

 

그는 춘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한민국 어디든 그렇겠지만, 당시 춘천은 학구열이 높은 곳이었다. 고교평준화가 되지 않아 성적순으로 고등학교에 갔다. 대학교처럼 고등학교도 서열화돼 있었다. 그 탓에 중학생 때부터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그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학업에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공부만 한 건 아니었다. 중학생 때는 방송반에서 활동했다. 글 쓰는 걸 좋아해 점심 라디오 방송이나 주말 TV 방송 대본을 썼다. 또 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청소년 영화제에 출품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교지편집부에 들어갔다. 교지에는 선생님·재학생·졸업생 인터뷰, 학교 시설 및 동아리 소개 등의 내용이 담겼다. 그는 청와대 춘추관에서 일하는 선배를 인터뷰한 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낯설게 바라보기

 

그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했다. 방송반에 들어가고 싶어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런데 면접장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게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방송반에 들어간 친구 말을 들어보니 위계질서가 강하다고 했다.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그는 학과 활동을 열심히 했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는데, 학과 인원이 많지 않아 학우, 교수님과 돈독하게 지내게 됐다. 가족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살아가는 외로움을 덜 수 있었다.

문화인류학은 어떤 현상이 궁금하면 그것이 이뤄지는 현장에 가 지내면서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고 연구하는 게 기본적인 뼈대다. 인류학 개론 수업 때 가장 익숙한 집단을 낯설게 보라는 과제를 받았다. 그는 가족을 관찰했다. 한없이 익숙한 가족이지만 낯설게 관찰하려니 또 특이한 지점들이 보였다. 그의 가족은 더 큰 집으로 이사하면서 6개월 정도 기간이 떠버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임대아파트에 잠시 살아야 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차에 일부러 이전 아파트 주차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그의 가족은 모두 키가 작은 편인데, 커다란 SUV를 탔다. 차를 타고내릴 때마다 불편했지만 말이다. 그는 이러한 장면들에서 중년 남성이 갖는 일종의 과시욕을 엿보았다.

그는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면서 눈치를 키웠다. 현장에 참여관찰을 하러 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경계하기 마련이었다. 라포를 형성하기 위한 시간을 가지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상대의 속뜻을 간파하기 위해 눈치를 키워야 했다. 혼자 단정 짓고 편견을 만들어낼 위험도 있었다.

 

세계를 무대로!

 

대학교 1학년생일 때 한 방송국 PD가 특강을 왔다. 질의응답을 하는데 PD는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집에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하고도 남편을 만날 시간이 없어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방송국에서 일하겠단 꿈을 접었다. 일만 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대신 국제 활동에 눈을 떴다. 한참 반기문, 한비야 등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아 다양한 국제 활동 기회가 열리던 때였다. 그는 1년 간 호주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그 후 돈이 없어도 외국에 갈 방법을 고민하다가 해외 자원 활동에 지원했다. 대학생 해외봉사단으로 필리핀에 갔다. 태풍과 화산으로 피해가 심한 지역이었다. 그는 행정 팀원으로 활동했다. 현장에서 직접 몸을 부딪치고 싶었던 그로서는 아쉬웠다.

필리핀에 다녀오면서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 단기 해외 봉사단 인솔자로서 다시 필리핀으로 향했다. 세계 3대 빈민가 중 하나인 마닐라 톤도의 스모키 마운틴(쓰레기 산이라고 불림)에 갔다. 곳곳에 쌓인 쓰레기와 코를 찌르는 악취에 많이 놀랐다. 그리고 파견된 NGO 창고에 쌓여 있는 한국에서 보낸 원조 물품을 보고 또 한 번 좌절했다. 죄다 축구공이나 컴퓨터였다.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곳에 컴퓨터를 그렇게 많이 보낸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필리핀 도시 빈민들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2013년, 그는 코이카 민관협력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미얀마 양곤대학교 인류학과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 인류학적 지식과 국제개발협력 분야 현장 경험을 가진 이가 필요했다. 그에게 딱 맞았다. 미얀마에 다녀온 뒤 국제개발협력 NGO에서 1년 계약직으로 일했다. 그러고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무래도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계속 성장하려면 학위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을 전공했다. 동남아시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대해 배우는 학문인데, 미얀마의 빈곤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렇게 대학원에서 3년을 보내고 권익센터에 입사했다.

 

갑자기 분위기 노동

 

궁금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 경력을 쌓고 관련 대학원까지 졸업했는데 갑자기 노동 분야라니! 그는 자신도 권익센터에서 일하게 된 게 신기하다며 그건 일종의 ‘사고’였다고 장난처럼 말했다. 그 전말은 이러했다.

그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힘들게 공부했다. 전기세를 내기 힘들 때도 있었다. 남의 나라 빈곤 문제를 공부하다가 자신이 빈곤층이 될 판이었다. 석사 과정을 끝내고 당장 경제활동을 하고 싶었다. 저임금 계약직으로 직원을 채용하는 국제개발협력 NGO 쪽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다고 관 성격이 강한 곳은 끌리지 않았다. 시민사회 활동가 마인드가 있었다. 그는 국외 이슈뿐만 아니라 국내 이슈를 다루는 기관에도 지원했다. 한쪽에서 선택지를 줄인 대신 다른 쪽에서 늘린 것이었다.

그는 졸업 논문에서 노동과 고용 쪽도 다뤘다. 미얀마에 경제특구가 생기면서 나타나는 강제 이주나 노동 양식 변화를 살펴본 것이었다. 마침 권익센터에서 민관협력 사업 담당자를 채용하고 있었다. 수십억 단위의 지원 사업을 다뤄본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노동 분야 경력이 없었지만 말이다. 또 그간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종사하면서 자원 활동이나 단기 활동을 주로 했다. 그의 부모님은 이를 제대로 된 경력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권익센터라면 부모님도 어느 정도 인정할 것 같았다. 이렇게 그는 어찌하다 보니 권익센터에 지원했고 ‘사고’처럼 붙었다.

 

노동 커뮤니티 지원 사업은 죄가 없다

 

그는 노동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민관협력 사업을 기획·운영하는 기술에는 능숙했다. 자신이 일종의 기술자라고 생각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담당하는 노동 커뮤니티 지원 사업은 열악한 노동단체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아무래도 노동단체는 국제개발협력 단체와 비교했을 때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리고 일종의 노동조합으로 생각해 반감이 있는 시민들도 제법 있다. 그는 시민을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가 아닌 시민 그 자체로 보면서 그들에게 뭘 더 알리고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노동단체가 아니어도 노동 이슈로 활동하는 단체가 있다면 파트너십을 맺으려고 노력했다. 여성·성소수자·장애인 단체 등과도 노동을 매개로 협력할 수 있는 점이 많았다.

그는 지원 사업이 평가 절하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서울시 노동 사무를 위탁받은 권익센터가 타 기관에 지원하는 건 제3자 위탁이 아닌가, 눈앞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 ‘돈 퍼주기’다. 그는 이와 같은 지적이 가슴 아팠다. 지원 단체를 선정할 때 엄격하고 공정한 심사 과정을 거쳤다. 꼼꼼하게 챙겨야 할 실무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지원받은 단체가 벌이는 사업을 중심으로 지원 사업의 가치와 필요성을 판단해줬으면 했다.

 

관계는 지속해야 한다

 

올해 권익센터 예산이 대폭 줄었다. 설상가상으로 노동 커뮤니티 지원 사업은 사업비가 전액 삭감됐다. 그는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작년 연말에 한 해 지원 사업을 정리하는 성과 공유 행사가 있었다. 원래라면 내년 언제쯤 지원 사업을 할 거니 관심을 가져달라, 라는 식의 이야기를 행사 도중 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원 사업이 제법 궤도에 올랐는데, 그간 지원해온 40~50개 단체와 돈독해졌는데 말이었다. 지난 5년간 해오던 일이 어떤 절차나 숙고도 없이 한순간에 사라지니, 그는 마치 해고를 당한 것 같았다.

그래도 좌절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대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권익센터는 주로 시민 대상 교육 사업을 벌인다. 일부는 노동 커뮤니티 지원 사업의 하나로 노동단체나 노동센터 역량 강화 교육을 한다. 그는 이것을 확대 편성할 생각이다. 작년에 커뮤니티 포럼을 했다. 지원받은 단체들과 권익센터가 공동으로 포럼을 하는 방식이었다. 반응이 괜찮았다. 단체가 가진 이슈를 권익센터가 가진 재원과 채널을 활용하여 확산시킬 수 있었다. 그는 노동권익포럼(권익센터에서 분기별로 개최하는 노동 관련 포럼)에 커뮤니티 포럼을 연계하는 방식을 고민 중이다. 그는 교육이나 포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간 쌓은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단체들과 관계를 지속해 이어나갈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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