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부당한 비정규직 집단해고를 용인한 법원 판결을 규탄하며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선도하는 사법부의 역할을 촉구한다
지난 7월과 8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을 불법파견으로 결론내린 대법원의 판결과 8월 공기업 외주화 문제점을 적시하면서 KTX 여승무원을 직접고용할 것을 판결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41부의 잇따른 판결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우리 사회에 날로 만연되고 있는 불법파견을 위시한 간접고용의 폐해를 환기시키면서 이제 고용의 질이 더 이상 악화돼선 노동자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것 뿐만 아니라 기업의 정상적인 발전도 불가능함을 일깨운 의미있는 판결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정규직 관련 판례를 돌아보면 만시지탄이지만, 실로 간만에 사법부가 정의의 심판자 역할을 한 부분에 대해 비정규직 당사자들과 노동단체들이 한목소리로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9월 7일, 유감스럽게도 사법부의 오락가락 행보가 다시 의심받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42부 재판부가 KBS연봉계약직 노동자들의 해고 무효 소송에 대해 기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정규직이나 다름없이 길게는 무려 10년을 근속한 노동자들을 비정규보호법의 미명 아래 기획해고한 공기업 KBS의 악의적 행태에 면죄부를 준 것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우선 비정규직 고용안정과 차별시정을 핵심 입법 취지로 하는 비정규보호법을 정면으로 거스른 대한민국 굴지의 공기업에 대한 법원의 면죄부 판결에 대해 시대의 과제를 외면한 비양심적인 판결로 판단하고 강력하게 규탄한다.
대부분의 KBS 계약직 노동자들은 2년 이상 KBS 사원으로 상시 업무를 하며 근속해왔다. 이번 1차 소송 당사자들이 비록 근속 기간이 2년 미만이었다 해도 지난 2009년 420여명의 계약직 노동자를 해고한 KBS의 행태가 정당한 근로계약해지가 아니라 기간제법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어처구니없고 부정의한 판결이다. 결국 법원이 법을 악용한 공룡조직의 손을 들어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정규직과 거의 동일한 지위에서 업무를 수행해온 계약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은 것은, KBS의 인력증원 억제 방침 때문이었다. 특히 KBS는 국민의 방송을 자처하는 공기업으로서 상시 업무를 할 사람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인건비 착취에 눈이 멀어 연봉계약직을 무리하게 활용해왔다. 이런 점에서 1차 소송자들의 근속연수가 2년 미만이라 할지라도, 이미 이들이 속한 부서 뿐 아니라 KBS 전체에 걸쳐 이 노동자들처럼 수차례 계약을 형식적으로 연장해왔던 계약직노동자들이 있었던 데서 확인되듯이, 근속 기간 자체는 별 의미없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 KBS가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되는 상시 업무였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공중파 방송사 중 맏형격인 KBS는 부끄럽게도 비정규직 남용의 나쁜 사례가 되고 있다. KBS 내에서까지 장기근속 중인 연봉계약직의 무기계약전환 및 처우개선 필요성이 공공연하게 제기되어왔고, 대다수 다른 방송사에서는 비정규법 시행에 따라 정규직 전환 계획을 수립하고 완료했음에도 가장 본을 보여야 할 KBS는 연봉계약직 노동자들을 일회용품처럼 취급하면서 적반하장격으로 대량해고하고, KBS를 위해 열심히 땀흘려 일해온 연봉계약직 노동자들에게 씻지 못할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고 말았다. 최근에 공기업의 급조된 방식의 탈법적 외주화 행태에 일침을 가하면서 직접고용이 마땅하다는 법원의 정상적인 판결 취지가 적용되어야 할 사안을 두고 사법부가 또 다시 역주행하면서 KBS계약직노동자들을 더 큰 좌절과 절망에 시달리게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KBS계약직노동자들의 해고 무효 소송이 네 차례 더 남아있다. KBS의 부당해고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성과로 이미 60여명의 조합원이 KBS에서 일하고 있지만, 종전과 다를 바 없는 노동조건으로 재입사하였고, 아직 40여명의 조합원들은 일년 넘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연명하며 부당해고 소송을 진행 중이다.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이렇게 힘겹게 한숨과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내서는 안 된다. 한시라도 문제 해결을 앞당겨야 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KBS에 맞서 정당한 투쟁을 이어온 연봉계약직노동자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면서, 먼저 KBS가 법원 판결에 기대지 말고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떳떳하게 책임을 질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리고 사법부에게도 촉구한다. 지금 가장 심각한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문제는 간접고용과 특수고용의 무분별한 확산이다. 특히 공공 부문에서 나쁜 일자리들이 양산되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자동차와 철도공사에 대해 책임을 지웠던 것처럼 비정규직 대량해고를 자행한 우리나라 대표공기업 KBS에 대해서도 사법부가 책임을 묻는 것이 온당하다. 골리앗 같은 거대조직에게 짓눌려 고통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눈물을 사법부가 좌시해선 안 된다. 사법부가 다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바람직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청신호를 적신호로 다시 바꾼 이번 판결이 반드시 상급심에선 온당하게 바로잡혀야 한다.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법정에서마저 눈물흘리게 하는 판결은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사법부가 KBS계약직노동자들의 대량해고와 관련하여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로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되찾게 되기를 바란다.
2010년 9월 14일
'KBS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대책위'에 함께 하는 한 국 비 정 규 노 동 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