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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1998년 12월)와 아르헨티나(1999년 10월)에서 좌파가 집권에 성공하고 칠레(2000년 1월)에서 아옌데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사회주의자 리카르도 라고스가 선거에 승리한 데 이어 지난달 27일에는 브라질 대선에서 노동자당의 룰라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남아메리카의 정치지형은 유례없이 거대한 변화의 기류에 휩싸인 듯하다. 물론 이 정부들의 앞날이 평탄할 리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다. 어마어마한 외채에다 끔찍한 빈부격차, 높은 실업률과 화폐가치의 불안정 등 경제문제가 산적해 있을 뿐더러 외세의 간섭과 기득권자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연일 충돌하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차베스 정부를 지지하는 한 시민이 안타까운 눈길로 반대시위자를 향해 고무줄 새총을 겨누고 있는 사진(<한겨레> 6일치)은 남아메리카 좌파정권들의 험난한 행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난관이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이 나라들의 민중은 지금 미래를 낙관할 권리가 있다. 내 생각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야말로 가장 확실한 낙관의 근거이다. 짐작컨대 남아메리카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저해하는 허다한 악조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사회적 통합을 위한 민족적 매개가 처음부터 불투명한 데다가 식민지 시대의 오랜 압제와 착취로 말미암아 계급적 분열이 심각하고, 19세기 초 독립한 이후에도 거듭된 군부독재는 민중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미국 자본가들의 농간은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토양에서 특출한 혁명가의 무장투쟁이나 대중봉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법적인 정당조직과 선거운동, 즉 정상적인 정치적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정부가 구성될 수 있었다는 것은 지난날의 역사적 유산과 사회적 모순을 현실 속에서 극복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제 눈을 돌려 대선을 채 40일도 남겨놓지 않은 우리 자신의 형편을 살펴보면 나에게는 희망의 조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시점에서 그런 기대를 가진다면 그것은 아마 터무니없는 과욕이고 망상일 것이다. 그러나 흔히들 1천만 노동자, 400만 농민이라고 공언하면서, 이 대규모의 인간집단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온전한 정치조직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정치적 이성은 마비되고 사회적 의식은 왜곡되었다. 다수의 국민은 자신의 생존권을 위한 요구를 펼치는 것조차 위험시하는 지배세력의 반공주의에 길들여져 왔다. 반면에 국민의 5% 정도 된다는 부유층은 하늘 무서운 것 모른다는 듯이 공격적인 사치에 몰두하고 있다. 문제는 오늘의 시민계층이 부유층의 행태와 의식을 추종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투시하지 못하는 데 있다. 오늘날 정당정치의 파행과 낙후성은 그런한 국민적 정치수준의 반영이다.
물론 기성정당과 다른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는 민주노총의 초대위원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지 못하고 있다. 1989년 처음 대선에 출마한 룰라 후보에게 그가 당선되면 “80만 브라질 기업가들이 모두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누군가가 경고했다는데, 우리의 권 후보는 자본가들에게 조금도 그런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이것은 권 후보의 인간적 포용성과 정치적 유연성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노동계급의 관점에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매년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 국민의 절반을 고향으로 가게 만드는 동력의 10분의 1만 자기의 힘으로 정치화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집권은 망상 아닌 현실적 위협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민중들이 해야 할 일은 집권 아닌 집권의 조건을 쟁취하는 것, 즉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찾는 것이다.이 게시물을
그러나 아무리 힘든 난관이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이 나라들의 민중은 지금 미래를 낙관할 권리가 있다. 내 생각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야말로 가장 확실한 낙관의 근거이다. 짐작컨대 남아메리카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저해하는 허다한 악조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사회적 통합을 위한 민족적 매개가 처음부터 불투명한 데다가 식민지 시대의 오랜 압제와 착취로 말미암아 계급적 분열이 심각하고, 19세기 초 독립한 이후에도 거듭된 군부독재는 민중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미국 자본가들의 농간은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토양에서 특출한 혁명가의 무장투쟁이나 대중봉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법적인 정당조직과 선거운동, 즉 정상적인 정치적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정부가 구성될 수 있었다는 것은 지난날의 역사적 유산과 사회적 모순을 현실 속에서 극복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제 눈을 돌려 대선을 채 40일도 남겨놓지 않은 우리 자신의 형편을 살펴보면 나에게는 희망의 조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시점에서 그런 기대를 가진다면 그것은 아마 터무니없는 과욕이고 망상일 것이다. 그러나 흔히들 1천만 노동자, 400만 농민이라고 공언하면서, 이 대규모의 인간집단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온전한 정치조직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정치적 이성은 마비되고 사회적 의식은 왜곡되었다. 다수의 국민은 자신의 생존권을 위한 요구를 펼치는 것조차 위험시하는 지배세력의 반공주의에 길들여져 왔다. 반면에 국민의 5% 정도 된다는 부유층은 하늘 무서운 것 모른다는 듯이 공격적인 사치에 몰두하고 있다. 문제는 오늘의 시민계층이 부유층의 행태와 의식을 추종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투시하지 못하는 데 있다. 오늘날 정당정치의 파행과 낙후성은 그런한 국민적 정치수준의 반영이다.
물론 기성정당과 다른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는 민주노총의 초대위원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지 못하고 있다. 1989년 처음 대선에 출마한 룰라 후보에게 그가 당선되면 “80만 브라질 기업가들이 모두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누군가가 경고했다는데, 우리의 권 후보는 자본가들에게 조금도 그런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이것은 권 후보의 인간적 포용성과 정치적 유연성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노동계급의 관점에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매년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 국민의 절반을 고향으로 가게 만드는 동력의 10분의 1만 자기의 힘으로 정치화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집권은 망상 아닌 현실적 위협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민중들이 해야 할 일은 집권 아닌 집권의 조건을 쟁취하는 것, 즉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