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다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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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비행선.jpg


겨울, 눈이 내리고 사람은 오른다. 바람 잘날 없어 현수막이 운다. 아랫자리 지켜 선 사람들은 목 꺾어 바라보다 몰래 운다. 목재 화물운반대 땔감 삼아 피운 불에 언 몸을 녹인다. 아지랑이 타고 재가 오른다. 줄 따라 보조 배터리가 오르고 빈 것이 내려온다. 두 번째 겨울, 기온은 낮고 사람은 저만치 높다. 연기 오르지 않는 굴뚝을 향해 땅바닥을 기어간 사람들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내려 오질 않는 사람의 형체를 살피던 눈이 붉다. 곡기 끊어 호소했다. 기간의 정함이 없었다. 또 어디 굴뚝 높은 일터에서 맞은 첫 번째 겨울, 스물넷 청년이 늦은 밤 홀로 일하다 하늘로 올랐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팻말 든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남은 사람은 더 이상 죽이지만 말아달라면서 울었다. 향 피워 연기 올랐다. 재 떨어져 향로에 쌓여간다. 고개 떨군 사람들이 촛불을 들어 올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어느새 훌쩍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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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jpg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난 폭염의 기억이 어느새 멀다. 부쩍 찬바람 불어 사람들 옷차림이 훌쩍 두껍다. 바싹 마른 잎이 길에 뒹군다. 마음 따뜻한 가을 이야기가 청사며 어느 서점 외벽에 붙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오랜 적대의 기억도 얼마간 흐릿하다. 평양냉면 가게엔 단풍이 들도록 줄이 길다. 대동강 맥주 얘기는 호프집 술안주다. 고무찬양에 거리낌 없다. 막걸리 가게도 왁자지껄, 끌려가는 이 없이 평화롭다. 두 정상이 천지에 올라 손잡은 사진이 시청과 지하철 벽 여기저기에 붙어 분위기를 전했다. 훌쩍 가을, 광장엔 온갖 축제가 많아 잔디가 성치 않다. 보수 나선 조경 노동자가 수레를 민다. 축제 무대 설치 알바 나선 청년이 깔개를 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된 밥벌이가 또 하루 별일 없이 계속된다. 주름진 얼굴도, 생기 도는 이마도 가을볕에 훌쩍 단풍처럼 익어간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그들이 꿈꾸었던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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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jpg


광장 건너편 낮은 자리에서 가수 박준이 노래한다. 작은 모금함을 앞에 뒀다. 뇌출혈로 쓰러진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에 작은 도움 주기를 노래 틈틈이 알렸다. 일어나,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겼다. 노조 깃발 들고 그 길 지나던 사람들이 습기 머금은 지폐를 통에 넣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가수 박준은 마저 노래했다. 그 앞 집회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가 흘렀다. 그 날 선 노랫말 속에 노래 활동가 그들이 꿈꾼 세상이 선명하다. 그 길 지나던 아이들이 낯선 노랫말을 두어 구절 따라 했다. 모자에 온갖 배지 잔뜩 매단 길거리 가수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땀에 젖은 가수 박준이 작은 무대를 정리했다. 뜨겁던 광장에 소나기 한바탕 곧 쏟아졌다. 반가운 비라고 누가 말했는데 해갈엔 부족했다. 되레 습기 잔뜩 몰고 와 숨이 턱턱 막힌다고 사람들은 푸념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파란 나라, 파란 천막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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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7s.jpg

천막에서 살지만, 또 길거리에 떠돈 지 오래라지만 저기 해고자도 한 표 쥔 게 있어 투표했다. 온 나라가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환호성이 터졌다. 약속 읊느라 입이 부르튼 정치인들이 새로운 시작 앞에 포부를 밝혔다. 그게 참 불안하다고, 마음이 편치 않다고 천막 사는 해고자는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 신경이나 쓸까, 걱정했다. 22일째니 파란색 농성 천막은 낡지 않았다. 그 안에 걸린 승무원 유니폼이 꾸깃꾸깃 낡았다. 유행 지난 상의 단추에 철도청 시절의 마크가 달렸다. 싸움은 어느덧 4천일을 훌쩍 넘겼다. 그간 몇 번의 선거를 치렀는지, 또 어떤 농성과 행진과 몸싸움을 벌였는지가 모두 기억에 흐릿했다. 정치인의 묵은 약속이 다만 천막 주변 온 데 걸린 현수막에 선명했다. 포대기에 아이 품은 동료가 큰아이 하원 시키러 떠났고, 남은 해고자들이 또 한 번의 행진을 준비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찾은 승무원 유니폼을 차려입고 나설 예정이다. 여름, 겨울 것 가리지 않고 모아 10벌 정도다. 청와대를 향한다. 좀 더 가까이 갈 수 없는지를 두고 정미정 씨는 전화기 들고 고민이 깊다. 아직은 잘 맞는다고, 천막에 걸린 유니폼을 보며 김승하 씨가 말했다. 파란 천막을 보았다. 꿈과 희망이 여전히 그 안에 가득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오랜 구호가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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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서비스.jpg


나두식 노조 지회장이 합의서를 살펴본다. 진즉에 문구 한 줄, 토씨 하나 수없이 확인했을 테다. 거기 회사는 협력업체 직원들을 직접 고용한다고, 또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고 합법적인 노조 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었다. 오랜 구호였다. 등에 새기고 목청에 새긴 것이었다. 오랜 시간 길에서 뱉은 말이었다. 먼저 간 동료의 유서 내용이었다. 서명 마친 합의서를 다시 살폈고, 스마트 폰 들어 기록했다. 카메라 든 삼성의 홍보팀 직원이 손잡은 노사 대표자의 화기애애한 표정을 주문했다. 굳은 표정의 지회장과 노조 간부들이 잠시 웃었고 찰칵, 기록으로 남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핫팩처럼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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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핫팩.jpg


그 따뜻하다는 솜 넣은 부츠가 하나 생겨 시골집에 보냈다. 아버지 신으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욕심을 냈다. 원래 이런 건 크게 신어야 한다나. 아이고 어머니, 내 하나 더 사 보낼게요. 겨울 다 지나 늦었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추위가 늦도록 기승이다. 발 따시니 참 좋더라는 전화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짜 추운 날엔 발끝이 아프다. 여느 집회 사회자 말마따나 투쟁의 열기가 곳곳에 높았으나 손끝, 발끝 아린 걸 어쩔 순 없었다. 핫팩 몸에 붙이고, 손에 쥐고, 발 등에 올려놓고서야 아픔을 덜었다. 이 겨울 누구나가 추웠지만, 칼바람 맞아 시린 사람들이 길에 유독 많았다. 체감온도는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흰옷 입고 앞장선 사람들이 자꾸만 아래로 엎어져 아스팔트에 핫팩처럼 붙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슈퍼맨은 아직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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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jpg


해거름, 어린이집 향해 뛰다 걷다 경보하느라 아빠는 숨 가쁘다. 발이 꼬인다. 언 땅을 밟고 허둥댄다. 돌아온 슈퍼맨은 하원 시간 맞추느라 쩔쩔맨다. 슈퍼 가자고 징징대는 아이와 씨름하느라 길에서 떤다. 눈에서 레이저를 쏜다. 아빠 왔다 소리가 제일 반가웠을 아이한테 못할 말을 하고 만다. 코로 먹는지 눈으로 먹는지 저녁밥을 때우니 잘 시간이다. 놀겠다고 버티는 아이와 싸우던 끝에 산타할아버지를 소환했다. 잠자리에 평화가 찾아왔다. 산타 선물은 택배로 오는 거냐고 아이가 물었다. 아마도, 산타는 요즘 너무 바쁘거든. 해질녘, 로켓배송하느라 잰걸음 종일 놀렸을 쿠팡맨이 짐칸에서 바쁘다. 당일 배송 굳은 약속 지키느라 저녁이 없다. 일 150건 이상 배송, 고객 설문 만점, 무결점 근태를 지키지 못하면 정규직 전환 기회는 없단다. ‘하늘의 별 따기’란다. 계약 해지 걱정에 쿠팡맨은 전전긍긍한다. 별 보며 일한다. 얼마 전 각양각색 옷차림의 택배 노동자들이 노조 깃발 아래 모였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싸움에 나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우산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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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우산.jpg


맑은 날 우산 든 사람들이 노조할 권리를 외쳤다. 이미 헌법에 새긴 권리였으니 새삼스러운 얘기였다. 노조 만들었다고 쫓겨난 사람들이 많았으니 매번 새로운 얘기였다. 법이 멀었다. 구호 따라 주먹이 하늘에 가까웠다. 언젠가 비 오는 날 촛불 켠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를 외쳤다. 온갖 공약에 선명했으니 지근거리 저 앞이었다. 삐죽 솟은 돌부리가 많아 걸음이 자꾸만 꼬였다. 돌덩이 하나같이 굳은 땅 아래로 깊어 삽자루가 자꾸 튕겼다. 코앞이 멀었다. 기어코 노조 우산 아래 든 사람들도 여전히 길에서 비를 맞는다. 땡볕 아래 붉게 익어간다. 안전장치 없는 현장에서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애쓴다. 쨍하고 해 뜬 날 큰 우산 펼쳐 작은 그늘을 지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데칼코마니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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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사람들은 부둥켜안고 반쯤 울었고 반쯤 웃었다. 엎드려 절하기를 108번, 때마다 바닥에 소복소복 흰 눈처럼 쌓였다. 입술 앙다물고 참았는데 꺼억 꺽 울음이 비집고 나와 터졌다. 땀인지 눈물인지가 얼굴 타고 흘러 벌건 코끝에 자주 맺혔다. 화장이 제멋대로 번졌다. 끝내 웃음 번졌다. 서로 안고 마주 보는데 울음 또 거기 섞였다. 돌덩이 하나씩 속에 들어 체증이 오래도록 깊었는데, 한결 가벼웠다. 서로를 돌봤다. 더불어 단단해졌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골든타임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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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무직파업선언.jpg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간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고, 비정규 노동자들이 유령 가면 쓰고 광장에 섰다. 미룰 일이 아니라고, 지금 당장 나설 일이라고 팻말 들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얘기 풀어내다 보면 땡볕 아래 회견이 길었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였다. 누구나의 상식을 구호 삼아 외쳤다. 퇴행이 오래도록 빠르고 깊었던 탓이다. 꽃도 한 철이다. 오랜 가뭄에 바짝 타들어 가는 게 논밭의 작물과 거리의 나무만이 아니다.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철망 앞에서

by 센터 posted Apr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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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망앞에서.jpg


노란 꽃 피던 봄날, 아빠는 차를 몰아 항구에 갔다. 천방지축 갈 길 가늠할 수 없는 아이 뒤를 쫓아 어르고 달래 철망 앞에 섰다. 눈높이 맞춰 앉은 자리 저 멀리에 낡고 삭은 커다란 배가 배를 보이고 누웠다. 상처가 곳곳에 깊었다. 언젠가 아빠는 고개만 겨우 남긴 배를 보면서 아이를 꼭 안았다. 많이 울었다. 잊을 만하면 떠올랐다. 배가 올라왔다. 전 대통령이 철창에 든 날이었다. 침전한 뻘이 갑판에 두터웠다. 돌아와 언젠가의 절망 앞에 선 아빠가 아이를 품고 말했다. 저것이 세월호라고. 삼 년여, 훌쩍 큰 아이는 노란색 리본을 자기가 묶겠다며 들고 뛰었다. 글씨를 좀 쓰자고 겨우 잡았다. 잊지 않겠다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또 진실을 인양하라고 아빠는 거기 삐뚤 적었다. 새 시대를 바라는 희망의 문구가 철망에 빼곡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분리수거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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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구속행진.jpg


높다란 빌딩 휘황찬란한 강남 대로엔 담배꽁초 따위 쓰레기가 안 보여 말끔하다. 곳곳에 펄럭이던 대형 태극기 아래에 안보 1번지 선전문구가 또렷하다. 명품도시 자부심이다. 오랜 버릇 끊지 못해 또 한 대 꺼내 문 사람들이 안 보이는 구석을 찾아들어 빠끔거린다. 찬바람에, 또 벌금에 벌벌 떤다. 정경유착, 그 버릇 끊지를 못해 수백억 뇌물 꽂던 사람들의 초상이 무개차 위에 수의 차림으로 섰다. 쓰레기통 지나 광화문 소각장을 향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범죄자는 감옥에 넣는 것이 이치에 맞다. 썩은 내 진동하는 탓에 재활용이 어렵다. 복권 사면 매번 꽝이다. 철저한 분리수거야말로 시대의 과제다. 담배꽁초 따위 말고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 파괴 없는 세상이야말로 깨끗한 세상, 명품세상 아니던가.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광장에서 사람들은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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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즐겁다26.jpg


친구와 더불어 사람들은 즐겁다. 입에 붙은 노랫말 흥얼거리며 잠시 머물다가, 앞선 방송차 없이도 이제는 익숙한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누군가 앞서 외친 구호 따라 퇴진하라, 구속하라 추임새를 거든다. 모이고 또 모여 저마다의 함성이 으레 거기 높다란 돌담을 넘는다. 아이 목말 태운 아빠는 목이 휜다. 외치느라 목이 쉰 엄마가 아이 옷깃을 여민다. 팔 쭉 뻗어 손팻말을 들고, 팔 쭉 뻗어 셀카를 남기며 사람들은 살갑다. 퇴진 군밤 팔던 장수가, 하야 마스크 팔던 노점상 청년이 그 길에 바빠 흥겹다. 호두과자 익는 연기가 폴폴, 횃불 기름 타는 냄새가 풀풀. 종종 머리칼 타는 냄새가 솔솔 퍼지니 비명인지 구호인지. 타닥 탁탁 불꽃 터지는 소리 따라 꽹과리, 장구 소리 거기 섞여 요란스런 광장에서 젊은 연인이, 또 주름진 부부가 딱 붙어 정겹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되새겼는데, 털점퍼 길에 벗어두고 펄쩍펄쩍 날뛰던 교복차림 소년 소녀까지 누구나가 늦은 밤 광장에서 깨어 즐겁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작가


줄초상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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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사람들 흰 국화 들고 줄줄이 섰다. 얼굴 없는 영정 앞에 향을 피웠고, 고개 숙였다. 안전화와 안전모와 안전띠가 그 앞자리에 가지런했다. 망자의 것은 아니었다. 2013 대한민국 안전대상 소방방재청상 수상 기념 동판이 박힌 어느 통신 대기업의 높다란 빌딩 앞이었다. 일터는 높았고, 비가 줄줄 내렸다. “일이 많이 밀려 있다. 다 처리하라”는 회사의 지시가 떨어졌다. 전봇대를 올랐다. 툭 떨어지던 몸을 잡아 줄 안전줄이 없었다. 머리를 지켜줄 안전모가 거기 없었다. 감전의 흔적이 손에 남았다. 밥 벌어먹기를 바랐던 그는 누워 젯밥을 받았다. 꽃 피워보지 못한 그 이름 앞에 활짝 핀 국화가 쌓였다. 안전은 저기 원청의 경영 지침에 그쳤다. 다단계 하도급 고질병이 뿌리 깊다. 모두의 상식으로 그 죽음은 외인사였으나, 끝내 병사로 남는다.떨어지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비처럼 떨어지던 비정규 노동자 혹은 근로자영자의 작업복 가슴팍에, 또 영정 놓인 높다란 빌딩 앞에 주황색 ‘행복날개’가 있다. 헛된 것이어서 오늘 또 국화가 팔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폐허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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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머리에 빨간색 띠를, 왼쪽 팔엔 붕대를 두른 이재헌 금속노조 갑을오토텍지회장이 서울 용산구 갑을빌딩 앞에서 기자를 기다렸다. 앞자리가 한산했다. 건물 안 경비노동자가 폐문 알림장을 유리문에 붙였다. 양복 차림 사람들이 종종 폐문을 드나들었다. 약속한 시각, 마이크 잡아 말을 풀었는데 말 못할 사연이 많아 말이 길었다. 노조 파괴를 규탄하고 교섭을 촉구했다. 주먹 종종 쳐들어 기세 높였으나 구호는 건너편 버스정류장을 향했다. 무전기 든 경찰이, 수첩 든 회사 직원이 멀찍이서 바빴다. 그 앞 비좁은 인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잠시 멈칫거리다 고개 숙여 휙 지났다. 찌푸린 표정이었다. 푹푹 찌는 날이었다. 홍보팀 직원이 한참을 달려와 다른 기자가 왔는지를 물었다. 다른 기자가 없었으니 대화가 짧았다. “아무래도 사안이 그렇긴 하죠. 노동뉴스니까 오셔야 했을 테고”라고 직원은 덧붙였다.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다음날 포털사이트 뉴스 면에 갑을오토텍 인도법인이 인도 서부지역에서 남부 항만도시로 이사했다는 뉴스가 깔렸다. 사진도 내용도 한 모양새였다. 홍보팀 직원이 진땀을 뺀 모양. 불편한 기사는 구석에 파묻혔다. 물량 공세는 성공했다. 직장 폐쇄와 용역 투입, 복수노조 설립으로 이어지는 노조 탄압도 오랫동안 성공적이었다. 칼날은 대개 비정규직 없는 공장을 향했다. 부당노동행위로 회사 대표가 실형을 받은 일은 이례적이었다. 중요한 뉴스가 되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동료의 영정을 들고 여전히 길에 섰다. 노조 파괴 전문으로 통하는 어느 노무사는 징계 기간이 끝나자 새 사무실 문을 열어 복귀를 선언했다. 충남 아산 문 닫힌 공장 안팎이 연일 흉흉하다. 땀범벅, 눈물범벅이다. 복수노조 시행 5년, 곳곳이 폐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개 풀 뜯어먹는 소리

by 센터 posted Jun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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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개풀뜯어먹는소리.jpg


한강 노들섬 사는 개 노들이 2세가 한가로이 풀을 씹는다. 보통 터무니없는 말을 두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하는데, 개는 종종 풀을 뜯는다. 먼 친척 중에 진돗개도 있다는데, 종류를 딱히 말할 수는 없단다. 동네 흔한 똥개다. 사람을 물지 않는단다. 거기 텃밭 도시 농부들이 오며가며 아는 체를 하면 좋다고 꼬리치며 바닥을 구른다. “앉아” 소리도 잘 알아듣는다. 지킬 것도, 딱히 바쁠 일도 없어 노들이는 내내 노닐었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에 귀가 쫑긋, 경찰 무전 소리에 화들짝 잠시 놀랐지만 곧 풀 뜯고 자빠졌다. 주말도 아닌데 그 일대가 북적거렸다. 개팔자가 상팔자, 뒷발 들어 가려운 목을 긁다가 파리 사냥에 나섰다. 꼬리 물고 빙글빙글 돌다 멈추고 누군가 던져준 마른 뼈다귀를 으적으적 씹었다. 지금 고분고분 그릇에 얼굴 묻고 사료를 먹지만 그도 분명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졌다. 한때 산과 들판을 자유롭게 내달리며 사냥했고, 날고기 맛을 봤다. 안정적인 먹이와 비와 추위를 피할 나무 집, 그리고 적잖은 애정을 얻었지만 쇠사슬이 그 대가였다. 노닐었지만 그건 쇠사슬 길이 만큼이었다. 빵빵, 자동차 경적이 요란했다. 길 막혀 답답한 사람들이 창문 내려 개새끼를 찾았다. 멍멍, 노들이가 짖었다. 신호등엔 노란 불이 점멸했다. 노동자 둘이 현수막 들고 한강대교 아치를 거닐었다. 카메라가 몇 대 왔고, 국회의원이 왔고, 기사가 몇 줄 났다.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거리라는데, 요사이 노동자는 어딘가 올라서야 잠시 뉴스가 된다. 이게 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일 텐데, 개는 풀을 뜯어 먹는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책임지라 말하고, 어느새 농성은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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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분향소.jpg


봄맞이하느라 사람들이 바쁘다. 노랑 파랑 빨강 온갖 꽃과어린 나무를, 또 잔디를 심는다. 물을 주고 살뜰하게 보살핀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 경고문 세워 지킨다. 봄볕 아래 초록빛 쑥쑥 잘도 자란다. 투실투실 잔디 더미가 저기 가득. 얼음지치던 광장에도 어느새 봄이다. 거기 동료 떠나보내느라 노동자들이 상복 입고 바쁘다. 국화를 꽂고, 향을 심는다. 눈물몇 방울 거기 보탠다. 먼 길을 오가고, 긴 밤을 새운 탓에 언젠가 밤낮 없던 일터에서처럼 깜박 졸았다. 올빼미는 밤에 운다.늦은 밤 상가에서 이들은 울음 참느라 입을 앙다물었다. 노조를 짓밟지 마시오. 오랜 구호 새긴 선전물은 광장에서 부서지고 밟혔다. 영정만을 품어 겨우 지켰다. 앉아 버티며 향을 또심었다. 재가 수북했다. 언젠가 향내 멈추질 않던 거기 또 향내짙다. 건너편 대한문 앞에서 화단 지키느라 바빴던 경찰이 오늘, 광장에서 잔디 지키느라 빙 둘러 우뚝 섰다. 책임지는 이가 없어 탈상이 멀었다. 멀지 않은 곳 옥상에 오른 비정규 노동자 둘이 그 꼴을 지켜봤다. 끝장을 보고 싶다 말하고, 어느새꽃은 피고지고. 매한가지 책임을 묻는 농성이 어느새 길었다.


정기훈 |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출근길

by 센터 posted Mar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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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첫출근1.jpg 쌍용차첫출근2.jpg 쌍용차첫출근3.jpg


유제선 씨는 요사이 잠을 설쳤다. 지난밤이 유독 길었다. 새벽 4시 30분까지 버티다 그냥 씻고 나섰다. 가방엔 세면도구와 여분의 양말, 접이식 깔개 따위를 챙겨 넣었다. 없으면 불안한 것들이다. 노조 조끼도 넣을까를 잠시 고민했다. 오랜 버릇이다. 회사 정문 앞 새로 생긴 커피 집에 들러 잠을 쫓았다. 언젠가 분향소와 낡은 농성천막이 있던 자리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걸음이 성큼 가벼웠고 표정이 종종 밝았다. 정문 너머 공장을 슬쩍 훑었다. 우뚝 선 굴뚝에서 연기가 폴폴 솟았다. 뒤따르던 박호민 씨는 노조 사무실 앞에서 사람들을 안고 울먹이느라 눈두덩이 부었다. 흰자위가 붉었다. 축하인사가 내내 민망했지만 내민 손 꼭 잡아 화답했다. 울다 웃던 박 씨는 담배 물고 땅을 오래 살폈다. 비정규직 지회장 서맹섭 씨도 언 손을 비비며 거길 찾았다. 스마트 폰을 들어 노조 현판을 찍었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이름이 거기 나란했다. 그 안쪽 사무실에 일찍부터 김상구 씨가 서성거렸다. 가끔 웃었는데, 표정 변화가 적었다. 말수도 그랬다. 별일도 아닌 듯, 7년 만의 출근을 기다렸다. 윤충열 부지부장이 안쪽 부엌 개수대에서 머리 감느라 바빴다. 낡은 노조 조끼를 서둘러 챙겨 입고 나섰다. 출근길 사람들을 배웅했다. 인재개발원행 버스가 곧 출발했다. 2016년 2월 1일 오전, 손 흔들던 사람들이 길에 남았다.


정기훈 |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올해는 당신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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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해가 떴다. 어제 또 그제의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애써 의미를 찾는다. 매듭 삼아 오늘 더 새롭기를 바란다. 그 새벽 어디 높은 곳이며 땅끝을 찾아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볕은 대체로 공평한 편이어서 새벽어둠과 추위를 견디던 사람들의 볼에, 눈에, 코에 고루 이르렀지만, 그늘 짙은 곳엔 미치질 못했다. 오래전 쌓인 눈이 그대로다. 얼음으로 남았다.


어느 광장에서 손잡은 연인은 떨어질 줄을 몰라 이인삼각 꼴을 하고 엉거주춤 빙판을 기었다. 노란색 안전모 쓴 아이들이 겁도 없이 치고 나가는 통에 뒷자리 따르던 부모가 뒤뚱거렸다. 서툰 솜씨였지만 저마다의 속도로 나아갔다. 넘어져도 웃을 일. 손잡아 일으켜 줄 이가 곁에 있었다. 머리 희끗희끗한 왕년의 청춘은 녹슬지 않은 솜씨를 뽐내려다 그만 들것 신세를 졌지만 허허 웃고 말았다. 음악 틀던 디제이가 소리 잠시 줄여두고 말솜씨를 뽐냈다. 흥을 돋웠다. 망원동에서 온 누군가의 가족 사랑 사연을 알렸고, 빙판 위 젊은 남녀의 애정행각을 지적했다. 붉은색 점퍼 입은 젊은 여성의 전화번호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외로운 청춘의 마음도 마이크 잡아 전했다.


새해 광장에서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즐겁다. ‘올해는 당신’이라고 적힌 새 현수막이 도서관 벽에 걸렸다. ‘기아차 비정규직 정규직화’라고 적힌 낡은 현수막이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위에 해를 넘겨 여전하다. 넘어가던 햇볕이 그래도 공평한 편이어서 거기 잠시 머문다. 그 자리 하늘을 지붕 삼아 오래 머문 사람이 엉거주춤 오가다 가만 섰다. 빙판 위 즐거운 사람들을 한참 살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답정너

by 센터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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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의 신조어다. 진짜 생각 따위가 궁금한 게 아니다. 맞장구가 필요할 뿐이다. 격한 공감, 토 달지 않는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한다. 대개는 일방적이다. 그 옛날 왕과 독재자의 질문이 그러했을 터. 신조어는 종종 역사를 거슬러 올라 그 의미를 찾는다. 힘없는 이는 대답을 할 뿐, 질문은 불온한 것이었다. 때때로 그건 목숨을 걸어야 할 문제였다. 저기 머리숱 적은 남자는 여의도 아스팔트에 비닐 집 짓고, 밥을 오래 굶었다. 언제까지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으니 무기한이다. 답을 들을 때까지라고만 했다. 질문의 대가는 그 옛날처럼 가혹했다. 해고가 부당했다고 대법원이 판단했지만 돌아갈 공장이 없었다. 꾸준한 흑자로 우량기업이라던 회사는 미래의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들었다. 재차 해고로 답했다. 길에 떠돈 지가 어느새 9년째다. 집권여당의 대표는 이게 다 노동자와 노조 탓이라고 말했다. 원하는 답이 따로 있었다. 노동개혁, 그건 더 쉬운 해고와 평생 비정규직, 노조 무력화를 뜻하는 신조어라고 길에 선 사람들이 말했다. 머리 희끗희끗한 해고자가 밥 굶어 가며 되묻고 있다. 답이 없어 하루 또 말라 간다. 오래된 미래다. 답은 정해졌다.


글, 사진 |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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