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파괴 전쟁 이후의 지구

by 센터 posted Aug 29, 2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Files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날씨가 일상의 위협이다. 매번 100년 만의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100년 만의 폭우, 100년 만의 폭염. 100년 즈음이 기준인 이유는 그 이전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실상은 더 오랜 기록을 갈아치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부지방 상공에 높이 15km에 달하는 구름이 시간당 100mm 넘는 폭우를 뿌렸다. 같은 시각 경북에서는 몇 달째 오지 않는 비를 기다리며 사과나무가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이 작은 한반도에서 극단적 가뭄과 홍수가 동시에 발생하는 믿어지지 않는 오늘이다. 너무도 명징한 기후위기 앞에서 일회용품을 많이 쓴 것이 문제인지, 고기와 생선을 좋아한 죄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사실 장바구니 안에 사 넣은 것이 식재료인지 포장 쓰레기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지구는 병들었고, 이 막막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지구와 공존할 길을 빠르게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위기의 한복판에서 떠오른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미즈의 혜안이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주최한 페미노동아카데미 중 안숙영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신 ‘탈성장 사회와 페미니즘: 마리아 미즈의 빙산 모델을 중심으로’를 정리해 본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는 일제 치하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 자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선자는 부산 영도에서 어머니와 하숙집을 운영하다 결혼을 하며 오사카로 이주한다. 당시 오사카는 공장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전기가 들어오는 ‘선진’ 도시였다. 하지만 조선인은 돈이 있어도 좋은 집을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이 허가된 곳은 좁고 낙후된 조선인 거주 지역에 국한되었다. 결혼과 함께 오사카에서의 삶을 시작한 선자에게 절박한 것은 밭이었다. 영도에서는 밭에서 어지간한 채소는 직접 길러 먹을 수 있었지만, 오사카에서는 모든 것을 사 먹어야만 했다. 선자는 생존을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벌기 위해 거리에서 김치를 팔거나 식당에서 노동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오사카에서 선자는 자급의 삶을 빼앗겼다. 산업화 이전과 이후 삶의 풍경은 그렇게 달라졌다.

 

마리아 미즈는 이를 ‘자급파괴 전쟁’이라 불렀다. 1945년 이후 생명의 직접적인 창조나 유지와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한 가치 절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산업사회에서의 대량 생산이 늘어나면서 자급 생산은 쇠퇴하였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자급 경제를 파괴하는 전쟁이 자본의 진짜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자급 능력이 완전히 파괴되어야만 자본의 힘이 사람들을 전적으로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선자처럼 자급의 경험조차 갖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해야만 한다. 임금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시화된 것은 자본과 임금 노동뿐이었다. 이른바 경제라고 불리는 영역이 구축된 것이다. 수치로 환원되며, 국민총생산에 포함되었다. 가치 있고 중요한 영역으로 취급받아 왔다. 반면 자본과 임금 노동 외의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물 위에 떠 있는 빙산은 물 밑에 감추어진 빙산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감추어진 가사 노동, 돌봄 노동, 자급 노동, 자연, 비공식 노동, 식민지 등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임금 노동이 지속되는 동안 사회적으로 필요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을 모두 여성의 몫으로 책임지게 했다. 여성들은 일을 하지만 일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일은 임금 노동과 동일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을 만들지 못하는 노동은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당했다. 여성의 노동이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처럼 여겨지는 ‘가정주부화’가 진행된 것이다. ‘남성’의 ‘프롤레타리아화’와 ‘여성’의 ‘가정주부화’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자본이 임금 노동자로서의 남성을 부릴 수 있는 것은 가정주부로서의 여성이 무급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즈가 ‘임금 노동에 대한 집착은 근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도구’라고 주장한 이유이다.

 

착취당한 것은 여성만이 아니었다. 자연 역시 착취당했다. 단일 경작과 축산을 위해 베어지는 삼림, 상품화된 식품을 위해 바다 밑바닥까지 쓸어가는 어업, 전기차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 파헤쳐지는 남미의 리튬 광산과 리튬 추출을 위해 사용되는 어마어마한 물. 이렇게 착취당하는 자연을 가진 나라들과 이를 사용하는 나라는 같지 않다. 대개의 경우, 지구 남반구의 나라들이 북반구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다. 더 싸고 많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착취되는 남반구의 많은 나라들. 우리가 사용하는 질 좋고 저렴한 물건들은 모두 이국의 노동자들을 착취한 결과이다.

 

그림_여성.jpg

 

이 과정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그리고 대량 폐기로 이어지는 순환 과정을 갖는다. 자본은 대량생산을 하고 대량 소비를 부추긴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두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더 많은 물건을 팔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싼 값으로 대량 생산하고 대량 소비를 부추겨야만 했다. 필요 이상으로 생산된 물건들은 상품 생산과 소비과정에서 다량의 탄소와 쓰레기를 발생시켰다. 과도하게 생산된 물건들이 소비되지 않으면 대량 폐기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엄청난 탄소와 쓰레기를 지구에 남겼다. 그렇게 발생한 쓰레기는 다시 남반구에 폐기되고 있다. 그렇게 10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지구는 현재와 같은 상태로 파괴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이상 올라가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남은 시간은 약 5년이라고 추산한다. 그 안에 획기적인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기후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고, 임계치를 넘어간 자연은 폭주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가. 미즈는 ‘경제는 영원히 성장해야 하며, 오로지 생산적인 일만이 노동’이라는 자본주의에서의 경제와 노동에 대한 이해와 거리를 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른바 GNP/GDP 등의 성장지표가 애초에 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측정하지 않는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환가치 생산이 아니라 사용가치 생산이 우선시되어야 하며 노동의 주요 목표는 ‘삶’이어야 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 노인층과 젊은 층 사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 상호 존중하며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의 산물’로서의 ‘삶’이어야 한다. 성장 혹은 축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간의 긴밀한 결합에 기초한 여성 노동에 대한 착취를 결코 종식시킬 수 없다.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임금 노동 체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 해방인지, 아니면 ‘임금 노동의 탈신비화’를 통해 점점 더 많은 여성과 남성이 이 임금 노동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방인지를 다시 질문하며, 노동과 해방의 관계를 새롭게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 당장 뭘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니코 페히가 대답한다. 가장 저렴하고 생태적인 항공 여행은 떠나지 않는 여행이다. ‘하지 않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고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 50% 할인 물건을 사고 나서 50% 이득을 얻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지 않았다면 우리가 얻는 이득은 100%이다.

?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