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산업 안전 관점으로 접근해야

by 센터 posted Jun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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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얼마 전 사무용 의자를 샀다. 일자목 때문에 어깨가 저리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목 받침이 있는 의자를 살 수밖에 없었다. 앉아보고 구입한 것이었지만 장시간 의자에 앉아 있어 보니 미묘하게 불편했다. 이리저리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의자 등받이가 내 상체 길이에 비해 길어서 목 받침이 정확하게 목 뒤가 아니라 약간 위에 닿아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의자에 방석을 깔고 나서야 목 받침이 목 뒤에 딱 맞아 편안해졌다. 의자를 만드는 기준이 되는 신체의 크기가 나보다 큰 사람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키가 큰 사람을 위해서는 목 받침을 최대 7.5cm까지 위로 올릴 수 있도록 조절할 수 있었다. 2020년 통계청이 밝힌 한국 남성의 평균 신장은 170.6cm, 여성은 157.1cm였다. 158cm인 내 키를 고려해 볼 때 이 의자는 한국 여성의 평균 키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산업 안전’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거대한 공장 설비 혹은 건설 현장 등 물리적 위험이 상존하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의자 같은 작업 도구의 크기 역시도 산업 안전의 문제로 포괄될 수 있다. 노동 현장은 대체로 남성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고, 이 의자처럼 산업 안전에 대한 기준 역시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작업대의 높이가 남성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면 여성들은 일하면서 작업대가 높아 팔이 아플 수밖에 없다. 성별 직종 분리가 명확한 한국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 여성 노동자들의 업무에 대한 안전 문제는 아직 산업 안전 영역으로 포괄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콜센터 노동자들이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코로나19 재난이 발생한 이후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지나치게 비좁은 닭장과 같은 공간에서 노동하고 있지만 이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기준도 장치도 없었다. 근골격계 질환도 남성들은 한순간 무거운 물건을 들어 나르는 지점에서 위험이 발생한다. 반면 여성들은 장시간 ‘쉼 없이’, ‘가벼운 물건’을 ‘반복적’으로 ‘들었다 놨다’ 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는 여성의 근골격계 질환이 산재 판정을 받기 어려움을 의미한다. 인과관계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산재 가입률, 신청률, 인정률 모두 여성이 남성에 비해 훨씬 낮다. 이는 여성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경험이 노동 환경에서의 안전 기준으로 포괄되지 않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이 말을 해야 하겠다. 남성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한다는 말이 아니다. 산업 안전 문제는 지속해서 노동 환경이 계속 변화하는 상황에서 그 기준도 높아져야 하지만 한국의 산업 안전에 대한 기준과 규율은 여전히 부실하다. 하지만 여성의 노동은 산업 안전의 카테고리 안에서 사고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별 직종 분리 상황에서 여성이 집중적으로 일하고 있는 현장의 배제에 대한 문제이다. 동시에 기존에 남성 중심의 산업 안전 기준이 여성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고려가 없다. 화학물질의 허용치는 남성의 신체 기준으로 되어 있어서 이에 부합한다 해도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몸무게가 적고 체구가 작아서 같은 양에 노출되었다고 해도 몸에 무리가 갈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준이 별도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또한, 이전에 문제로 인지되지 않았던 것들도 산업 안전 문제로 수용하여 규율할 수 있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이 그렇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은 개인 간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 ‘불미스러운 일’로 치부된다. 하지만 명확하게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산업 안전의 관점에서 노동권과 건강권의 문제로 사고해야만 한다. 한 회의 자리에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을 산업재해의 범주로 명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정부 관계자 중 한 명이 이렇게 반론을 제기했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이 남녀고용평등법과 형법에도 규정이 있는데 왜 산업재해에까지 들어가야 합니까.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은 명시적인 규정은 없으나 산업재해로 제기되는 경우 대부분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나는 크게 분노했다.

 

남녀고용평등법과 형법, 산재 관련 법은 그 입법 목적과 기능이 전혀 다르다. 「남녀고용평등법」에서의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은 직장 안에서의 자율적 해결에 기반을 두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권장하며 이를 안전한 노동 환경을 만들지 못한 사업주의 책임으로 규율한다. 하여 가해자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고 이는 사규에 의해 징계된다. 반면 「형법」에서는 가해자 처벌에 주안점을 둔다. 산업재해 관련 법에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을 규율하는 것은 사건의 성격을 산업재해로 규정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이전보다 강력한 조치, 사건 피해자에 대한 보호 조치가 산업재해 피해자에 준하여 뒤따른다는 의미이다. 한 가지 사건이 한 가지 법으로 규율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을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명시적 규정이 없어서 산업재해로 제기할 때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까다롭게 따질 수밖에 없다. 산업재해에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을 명시하는 것은 명확하게 산업 안전의 관점으로 이 문제를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이는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을 불미스러운 개인 간의 일이라는 사고를 넘어 명백한 노동권과 건강권의 범주로 포괄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얼마 전 발생한 군대 내 성추행 사건을 보면서 처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군인은 현행법상 노동자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군인도 분명히 노동하는 사람이다. 피해자에게 안전한 노동 환경이 제공되지 않았으며 2차 피해가 연달아 발생했다. 한 개인의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 산업재해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 재발 방지를 위한 시스템 구축은 물론, 「군인재해보상법」에 따라 순직으로 보아 순직 유족연금 지급이나 현충원 안장 등으로 이후 절차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떠난 분의 영면을 빌며 안전한 노동 환경이 이 땅 모든 여성에게 제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좀 더 나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위해 우리는 오늘도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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