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먼저 질문할 것인가

by 센터 posted Feb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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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여성노동자회에서 운영하는 평등의전화에 접수되는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상담들은 개별적 상황은 다르지만 맥락은 항상 같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권력에 눌려 있다. 당연한 듯 권력을 휘두르는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가 폭력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의 노동을 저평가하는 공간, 여성을 노동자로서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일상화되고 집단화된 곳, 여성이라는 이유로 요구하는 기형적 노동이 상존하는 직장에서 어김없이 사건은 발생한다. 그곳에서 때론 술을 핑계 삼아 때론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과 아무런 공감 없는 일방적 감정의 배설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물화된 존재로 취급한 결과가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이다. 그래서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은 성차별과 동전의 양면으로 존재한다.

 

이론상으로 이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하는 이들도 막상 실제 사건에 부딪히자 모든 것이 무화된다. 바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이 그러했다. 지난해 7월 사건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부터 지난 1월 25일 국가인권위원회 결정이 내려지고 난 지금까지도 피해자에 대한 꽃뱀설과 음모설이 끊임없이 제기되며 2차 가해가 되풀이되고 있다. 2차 가해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2차 가해라는 사실조차 부인한다.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 소속으로 활동을 하던 내게 많은 이들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끊임없이 물어왔다. 그러면서 박원순 시장이 추진해 오던 많은 개혁 과제들이 중단된 현실을 개탄했다. 그 말들에 화가 났고, 질문한 이들에게 실망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해당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피해 근로자 등의 의사에 반하여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것은 법률로도 금지된 사항이다.

 

회사가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회사가 노동자들의 눈을 가격했는지, 복부를 가격했는지 묻지 않는다. 피해 노동자들의 안위를 묻고 폭력으로부터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연대한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성희롱 성폭력을 당했다는 말을 들을 때 피해자의 안위를 묻지 않는다. 항상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가 먼저 따라온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노동조합조차 없이 개별로 흩어져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에 맞서 홀로 싸우는 여성 노동자들에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많은 피해자들은 복합적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싸우고 있다. 불면증, 우울증, 대인기피 증상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고통의 수위는 매우 높다. 반복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내부에서 문제 제기할 때는 일부러 수위가 낮은 사건을 골라 문제 제기하기도 한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끊임없이 질문받고 사건 자체를 복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만 상대의 죄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의 과정을 어쩔 수 없이 반복해야 한다. 피해자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진실을 판별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복기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을 감내해온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도마 위에서 마음대로 난도질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가 어떤 일을 당했는가가 아니다. 1차적으로 피해자의 구제와 가해자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 이후 그 직장의 최고 관리자가 안전하고 평등한 노동 조건을 피해자에게 제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개선 방안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는가, 가해자의 권력이 어떻게 피해자를 누르고 있었는가, 성차별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가, 피해자가 피해당하고 호소해도 주변이 이를 방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고쳐야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고 이전과는 다른 성평등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안위나 사건이 발생한 환경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묻는 이는 불행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은 안전하지 못한 노동 환경의 문제이자 남용된 권력 위계의 문제이다. 왜 같은 노동 문제에 이렇듯 다른 태도를 보이는가에 대해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이라영 작가는 공동행동에서 개최한 토론회에 참여해 “노동의 세계에서 여성의 자리는 밥과 유흥 사이에 걸쳐 있다.”라고 일갈했다. 이 서글픈 문장에 이토록 깊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팠다. 적어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여성의 자리가 평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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