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불평등과 차별이 문제다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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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2010년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돌아보건대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적지 않은 ‘젊은 죽음’을 가슴 아프게 목격해야 했다. 서울 구의역의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김군’과 전북의 한 대기업 하청업체 콜센터에서 일하다 심한 욕설과 압박으로 인해 입게 된 마음의 상처와 병을 이겨낼 길 없어 목숨을 끊은 홍은주, 제주의 한 음료회사에서 프레스기에 몸이 끼여 사망한 이민호는 2016년과 2017년 당시 열여덟 살이거나 열아홉 살이었고, 모두 현장실습생 신분이었다. 그리고 한 해 뒤에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로 일하던 김용균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졌고, 2019년 10월과 11월엔 무책임한 대중매체의 무분별한 루머며 악플에 시달리던 설리와 구하라가 세상을 등졌다. 그들은 모두 1990년대에 태어난 20대였다. 빠르게 양극화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이 야기해온 구조적 불합리와 그 토대 위에서 여성 혐오를 게워내며 굳건히 작동 중인 성차별적인 사회가 그들을 마침내 ‘공평한’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모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죽임’이었다. 계급과 계층을 떠나 그들은 어쩌면 ‘젊기’ 때문에 죽었고, 현장 실습생이든 하청 노동자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그들을 죽인 이들은 누구였을까. 또는 무엇이었을까. 명백하게 드러나는 죽임의 주체는 없고 당사자의 옷을 입은 객체만 구체적이고 싸늘한 주검으로 남았다가 다시 속도와 오만 가지 구설 속에 묻히고 덮여서 잊히어가는 중이다.


‘여성 혐오’라는 고질적인 된서리를 맞고서 한겨울 아침의 모진 추위 같은 세상 속에 발가벗긴 채로 내몰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죽음을 맞은 설리와 구하라라는 두 연예인의 이름이 내 귀와 머리에 들어와 박힌 건 불과 한두 달 전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세상을 뜨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난 그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10년도 훨씬 전부터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고, SNS도 잘 접하지 않아온 내게는 한두 번 들어 보았을까 말까한 이름들이었다. 장자연, 최진실, 전미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연예인들의 이름이 설리와 구하라라는 두 이름 위에 겹쳐져 떠올랐다. 참담한 기분이 들었고, 가슴이 먹먹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얼굴 없는 살인자들을 떠올렸다. 여성 연예인들을 성적 대상화하여 거침없이 소비하면서 ‘인형’이 되기를 때로는 은연중에 때로는 대놓고 요구하는 연예산업과,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을 넘나들며 무차별적으로 양산되는 성차별적 여성 혐오라는 야만적 발화와 기술 문명과 결탁한 자본주의의 교묘한 소란이 살인자들의 배후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이내 떠오른 이름이 ‘구의역 김군’과 홍은주와 이민호와 김용균 들이었다. 그 속은 진창 같았을지언정 어찌 됐든 겉으로는 반짝거려온 유명 연예인들과 장삼이사 같은 서민들의 자식이었을 어리거나 젊은 그들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만난다고 느꼈기에 내겐 이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을까. 살아생전 유명했거나 말았거나 물질적 풍요를 누렸거나 누리지 못했거나 그들은 똑같이 자신의 의지와는 별반 상관없이 각박한 사회 속에서 바빴고 쫓겼고 종종 굶었고 위험한 오프라인 세계와 온라인 세계 속을 오가며 괴롭힘을 당하다 죽었다. 


그러고 보면 2010년대엔 유난히 많은 젊음이 옴나위없이 수장되거나 매장당했다. 2014년 2월에는 경주에서 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장인 리조트 지붕이 무너지는 바람에 10명이 사망했고, 그해 4월엔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어이없이 죽어간 그들 대다수는 겨우 10대 후반이거나 스무 살 무렵이었다. 편법으로 자본의 증식을 촘촘히 도모해온 자들이 엉성하게 구축해놓은 안전하지 못한, 위험한 사회의 살인적 구조물과 시스템에 희생된 것이었다.


와중에 ‘미투’라는 혁명이 될 뻔한 바람이 불기도 했다. ‘미투’라고 입을 떼어 말할 용기를 내는 여성들이 있기까지 단지 여성이라서 당해온 폭력으로 인하여 자책과 분노 속에서 분열증과 우울증을 앓다가 죽어간 여성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어리거나 젊어서, 여성이라서 죽지 않아도 되는 사회는 요원한 걸까. 사회적 약자들을 얼마나 더 착취하고 죽음 곁으로 떠나보내야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어온 지금의 체제와 문명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수 있게 될까. 생때같은 목숨들이 얼마나 더 스러져야 하는 것일까. 억울한 죽음들 앞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얼마나 더, 언제까지 애도의 눈물바람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저출산율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건만 어렵게 태어난 목숨들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여전히 굳건하게 불평등하고 성차별적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의 슬픈 한 해가 이렇게 또 저문다. 2020년대엔 사뭇 느리게라도 변화의 조짐을 일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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