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전통시장 읽어주는 책 방송, 그리고 노동조합

by 센터 posted Feb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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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aT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서울경기지역본부,

《전통시장 ‘읽어주는 책’ 방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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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뉴스를 찾다 보니 지랄 총량의 법칙, 걱정 총량의 법칙, 능력 총량의 법칙 등 그새 총량 불변의 적용 범위가 늘었다. 재난 상황이 반복되는 요즘을 떠올리면 고통과 어려움에도 총량이 있어 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 의미가 번진 것 같다. 수원 전통시장 방송에서 ‘또라이 총량 불변의 법칙’을 인용 문구로 읽으며 책을 소개했던 기억이 벌써 재작년 전의 일이다.

 

작년 10월에 책을 한 권 냈다. 2016년부터 4년간 경기도 수원 못골시장과 남문시장에서 〈읽어주는 책〉 방송을 진행했는데, 책은 그 방송 일기와 대본을 추려 모은 내용이다. 책이 나오고 방송 뒷이야기와 이후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분들이 있었지만, 따로 전하지 않았다. 그저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이 방송이나 그즈음 회사에서 만든 노동조합을 어느 또라이의 조직적 일탈 정도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요즘 나는 aT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서울경기지역본부에서 농산물 유통, 수출에 대한 지원 사업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찍 서울 송파구에 있는 가락시장으로 출근한다. 가락시장은 우리나라 농수산물의 기준 가격이 정해지는 도매시장으로, 부류별 가격 형성 과정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농식품 유통 서지 연구를 목표로 학위 과정도 다시 시작했다. 지난 학기에 공공부문 지식공동체 이론을 정리할 기회가 있어 책과 전통시장 방송을 지식공동체의 시장 버전 사례로 소개했더니 몇 개 학과에서 책을 교재로 쓰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아무튼, 정신없는 한 해를 보냈다.

 

시장으로 돌아오고 전통시장 읽어주는 책 방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농식품 전통시장에서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의외로 사소했다. 2016년 전후로 공공기관 내외부에서 시설을 지역 사회에 개방하는 분위기가 일었는데 우리 자료실도 개방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당시 나는 사서로서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aT 교육원 산하 전문자료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서에서 보안, 인력, 예산 등의 문제를 검토했는데 결국 시설과 장서를 지역에 개방하지 못했다. 대안을 내야 했던 나는 시설을 공개하지 않고 지역 사회에 책으로 봉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전통시장 읽어주는 책 방송은 그중 하나였다.

 

농식품 현장에서 책을 권하겠다고 생각하니 몇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우선, 농식품 유통 관련 종사자들은 너무 바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닌데 유독 그랬다. 이 분야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려면 오디오 북이 필요할 것 같았다. 또 다른 문제로, 내가 생각해도 농식품과 독서라는 주제가 참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국내외 사례를 참고해 ‘농식품 독서 진흥’과 ‘지역 농식품 유통 현장 지원’을 목표로 몇 가지 기획안을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방송 안을 들고 처음 못골시장을 찾았을 때 상인회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한 달 동안 주말 시간을 반납해 대본을 쓰고 휴가를 내어 시장을 찾는 등 몇 차례 시범 방송을 녹음한 후 회사에도 출장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수원 못골시장과 남문시장에서 방송하며 상인, 그리고 고객들과 5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시장 상인들은 개별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이다. 상인들은 삶을 운영하는 경제적 원천으로 개별 매출을 신경 쓰지만, 시장이란 한정된 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도와야만 개인의 목적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적 자극에 치열하고 창의적으로 반응하고 그 반응들은 대부분 매출에 영향을 준다. 2008년부터 방송국을 운영해 온 수원 못골시장 상인들은 내가 읽어주는 책 방송을 하기 전부터 이미 방송을 통해 지적 자극을 반복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공동체 활동의 성과처럼 지금도 수원 남문시장에 모인 9개 시장 중 못골시장의 모습은 단연 눈에 띈다.

 

사실 노동조합 활동도 전통시장 방송으로 시작됐을지 모른다. 회사 밖에서 시장 방송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난 2018년 5월, 안에서는 전문계약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설립했고 내가 대표로 나섰다. 당시 회사에는 장단기로 고용된 계약직이 꽤 많았지만 대부분 해당 직무가 필요한 시기에 개별 고용됐기 때문에 서로에게 관심이 부족했다. 노동조합을 공동체로 삼은 1년 남짓 동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변화를 만들어냈다. 비정규직 교섭 단위를 분리했고, 교섭과 처우 개선 TF팀를 통해 단기 계약직의 고용 안정을 이끌었고, 전체 비정규직의 승급과 임금 상승 기회를 만들었다. 모두 회사 내에서 최초였다. 되돌아보면 시기로나 성과로나 전통시장 방송과 노동조합 활동은 서로 다른 공동체의 반증처럼 뒤섞인다.

 

전통시장 방송은 2019년 11월을 마지막으로 더 하지 못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다른 지역 다른 업무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조직 내 노동운동의 단일화라는 명분으로 복수노조를 합치면서 나는 대표직에서 해방됐지만, 사서로서 자료실을 운영하지 못하게 됐고 방송을 접어야 했다. 책을 발간하면서 전통시장 방송을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노동조합 활동은 ‘전문계약직으로 다년간 일해온 선배들의 노고에 보상을 소급하지 못한 점’, ‘자회사로 전환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챙길 수 없었던 점’ 등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미련으로 남겼다.하지만 방송과 노동조합 모두 공동체 활동이라는 점에서 위안을 찾는다. 공동체가 공감하는 문제는 구성원이 파편화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해결되거나 또 다른 나비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사회와 조직이 준 두 번째 기회가 아닐까. 몇 년이 지난 후 우리는, 우리 주변의 전통시장들은, 우리 조직의 노동 환경은, 또 그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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