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형, 쾌차하시오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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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규 센터 공동대표 / 관악구노동복지센터 센터장



L형!

“새벽 4시에, 늦어도 4시 30분경에는 일어나 움직여야 하고 혼자서 무거운 철판 같은 것도 들어 옮기고 하자면 엄청 힘들 텐데 그런 일 할 수 있겠어요? 아! 가슴이 아프네!” 하면서 권하고 싶지 않다던 건설 현장 일을, 결국은 오래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소. 나쁜 소식은 아니오. 빛나고 폼 나고, 또 두툼한 연봉에다 쓸 만한 칼자루까지 쥐어진 그런 자리는 아니지만, 저소득 취약계층이나 하루하루가 힘겨운 복지 사각지대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열악한 조건의 노동조합과 함께하는 일이니, 좋은 소식인 셈이오.


나라는 인간이 왜소한 덩치에 골격 약하고 손발까지 작디작아서 사실 막일을 하기엔 적절치 않은 체격이잖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잘해냈소. 그 U반장이라는 사람, 내 나이를 바짝 뒤쫓아 오는 사람이지만 참 쿨하고 화통한 사람입디다. 그 기간에 마침 5월 1일 노동절이 끼어 있었는데, 그날 현장 모든 작업장을 ‘셧다운’한다니까 “지랄하고, 노동절은 무슨 노동절! 하다못해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씩 나눠 주고 노동절이라 하든지··· 노조 있는 잘나가는 회사 근로자들에게나 좋은 날이겠지. 씨팔, 빨간 날도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사람들은 일하게 해야지··· .” 하더군요. 내가 노동운동을 했고, 심지어 민주노총 위원장까지 해먹은 사람임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는 아마도 그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다 했을 것이오. 내가 곧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탈 수 있는 늙은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깍듯이 “형님!”이라 부르면서도 일을 가르치고 지시할 때는 빈틈없는 선생에다 위엄을 갖춘 고수이고 냉정한 프로였소. 나는 그런 사람이 좋습디다. 어느새 정든 친구가 되었는데 아쉽게 헤어지게 되었소, 그려. 아무튼 나 같은 초짜를 K반장이나 U반장 같은 사람들에게 붙여준 배려를 포함해 여러 가지로 고마웠다는 말을 새삼 전하기 위해 붓을 잡았소. 특히 “아! 가슴이 아프네!”라는 말로 L형의 마음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을 때 받았던 뭉클함은, 현장까지 굳이 찾아와 추어탕 한 그릇에 마음을 담아준 내 동무 승철이와 함께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것이오.


무사히 꽤 잘해냈다 싶지만, 건설 현장이라는 곳은 솔직히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겨운 곳이었소. 더구나 이번 현장은 지상이 아닌 지하 2층이었지 않소. 자동감지기가 밝기를 조절하는 형광등 아래 짙은 새벽안개처럼 시멘트 가루가 뿌옇게 떠다니고, 작업 차량들이 탱크처럼 요란을 떨며 왔다 갔다 하고, 천공기와 절단기의 뚫고 자르는 소리는 자동총포의 총·포성을 방불케 하고, 용접 불꽃은 곳곳에서 난무하는데, 총포탄만 날아다니지 않았지 영락없는 전쟁터였소. 출근(?)하면 대략 6시 20분경, 현장에서 아침 먹고 7시에 모든 작업자가 한곳에 모여 국민체조로 몸을 풀고 각각의 작업장으로 흩어져 작업준비를 마치면 대략 8시, 노임이 발생하는 본 작업을 시작하는 시간이오. 신축 아파트 현장이라 그런지 일단 작업장에 들어서면 휴대폰은 먹통이 되고,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아득하니 세상과 멀어지면서 현세와 딴판인 세계에 빠져드는 느낌까지 들기도 했소. 얼마 못가 건강을 해칠 것 같은 매우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절단기의 불똥이 손등에 떨어질 때 깜짝 놀라며 눈길을 돌리는데 하필 용접 불꽃과 마주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지만 점심식사는 참 맛있었고, 식후 짤막한 낮잠은 그야말로 꿀잠이었소. 


처음에 그토록 무거웠던 철판을 요령껏 잘 짊어지고, 몹시 버거웠던 육신이 어느덧 가벼워지면서 머릿속도 개운해지고 매사 숙달되어 가는데, 30층 아파트 건설 현장에 슬슬 익숙해져 가는데, 특히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풋풋하게 정도 들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야말로 돌연 그 현장을 떠나오려니 참 거시기(?)했소. ‘거시기’라···. 그 기분이 하도 미묘하여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소.


L형!

같은 값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놓고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정신노동 쪽을 선호할 사람이오. 설사 정규성과 안정성과 장래성, 그리고 임금 등이 정신노동보다 비교우위에 있다 해도 말이오. 이번 경우를 굳이 비교하자면, 정규성과 안정성, 장래성 모두 L형의 현장이 다소 매력적이었소. 물론 노동 강도, 안전, 휴식, 일터의 변동성 등과 나이, 체격 조건, 적성 등을 모두 대입해서 비교한다면 셈법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오. 하여튼 나는 후자를 선택했소. 상당 부분 내 평생 해왔던 일의 연장이자 보다 다양한 현장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라는 인간이 몸으로 때우는 일보다 골머리 아프더라도 정신으로 버티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비겁한 나이니까 말이오.


형이 콩팥 이식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뒤 퇴원할 때가 다 돼서야 병문안을 가서 많이 서운했지요? 내가 그런 종자요. 화장실로 화급히 뛰어 들어갈 때와 볼 일 다보고 나올 때 행동이 다르듯,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을 때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형의가슴을 후벼 파놓고, 사각 쇠파이프 절단하던 손으로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게 되자,“아! 가슴이 아프네!” 하며 진짜 속 쓰라려했던 형의 마음에 그만 상처를 입히고 만 것같소. 형의 축하, 진짜 진짜 고맙게 받을게요. 솔직히 내가 여러 생각의 교차 지점에서 있지만, 형에게만큼은 고마움에 더해 미안하다는 말도 꼭 전하고 싶었소. 더불어형의 그 의지와 태연함을 존경하오. 유전적으로 저혈당 당료를 물려받아 한쪽 눈을잃었고, 하여 매일같이 때 되면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야 하고, 먹고살자니 눈비와 폭풍우에도 목숨 걸고 운전대를 잡아야 하고,급기야 하나 남은 콩팥조차 수명이 다되어이식받게 된 처지가 일찍부터 정해진 운명같았는데, 굳이 의지를 다지지 않으면서도태연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그 의지를 존경하오.


자본주의를 넘어뜨릴 듯이 덤벼들었다가 자본주의가 쳐놓은 그물코 하나도 제대로 끊어보지 못하고, 끝내는 자본주의 앞에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며 늘 조마조마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뒷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나이, 어떤 날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지난날의 무용담을 내뱉다가 뉴파워들에게 처참하게 묵살당하고 되치기당하여 초라해지는 나이, 꼭 내가 아닐지라도 나처럼 못난 내 또래들은 대개가 그렇지 않겠소? 자기 자신의 육신과의 싸움도 벅찬데 입양한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내고 밀려오는 삶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겨우 한 사람’으로 ‘겨우 한 사람’의 생을 ‘겨우겨우’ 사는 것 같지만 그 수를 파악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계량할 수 없는 덕을 나눠주고 있는 참 좋은 사람, 내가 따라 할 수 없는 당신 같은 분들을 새삼 존경하오. 쾌차하시오, 부디.


2019년 6월 3일

임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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