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 우수상_한 비정규직 노동자: 삶의 이야기

by 센터 posted Dec 3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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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정  영어회화전문강사

 

 

어린 시절

 

유년 시절, 초·중학 시절 우리 동네 대부분 아버지는 무슨 이유인지 술 없이 지내는 날이 없었고, 저와 동생들은 막걸리를 사러 주전자를 들고 외상술을 사러 매일 동네 점방을 다녔습니다. “외상이요.” 하는 말이 부끄럽고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즈음이면, 연달아 있는 동생들이 그 일을 이어서 담당하곤 했지요. 저는 아래로 네 명의 동생들이 있었으니 참, 다행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막냇동생을 낳으시기 하루 전날까지 왕복 4시간이 넘는 먼 길을 걸어서 겨우 빌린 남의 밭에서 우리가 먹을 감자와 채소류를 재배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장의 할 일을 방관하셨고 몸도 아프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하거나 공사장에 가시거나 무슨 일이든 하셔서 우리를 겨우 먹여 살리셨습니다. TV도 없고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중학교에 가서야 친구가 사는 집에 가보니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보시며 집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과일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셨는데, 명절이 아닌 평소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중학교 다닐 형편도 어려워서 지원을 받아 다녔던 나의 경험으로는 다른 삶이었습니다. 이웃 언니들은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른 도시로 일하러 가거나 공장에 취직하러 가곤 했으니 동네에서 가장 형편이 어려운 우리 집에서 제가 고등학교 갈 때가 되니 이구동성으로 말렸습니다. 당시에는 마산수출자유공단이 있어 그곳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한다는 말이 있어 지원하려고 했으나 체격 조건이 맞지 않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인근에 있는 방직공장에 취직하고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취직과 고교진학

 

중학교를 졸업하던 그 겨울부터 공장에 갔는데,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여 저녁 7시 30분 퇴근하였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은 실을 감는 것을 지켜보며 끊어진 부분을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점심시간 때 외에는 화장실도 한번 가지 않고 제 자리에 서서 지켜보며 실을 이어주는 일을 했는데, 퇴근 때 다리를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며칠을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는데, 옆에 일하던 언니가 약간의 요령을 알려주어 근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급을 받았는데 약 9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때가 1984년 2월이었고, 어머니는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돈을 구경하셨습니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제 입학 등록금을 대었습니다. 낮에도 컴컴한 공장에서 일하고 5시에 학교 가는 길은 너무도 자유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면 졸음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저는 영어를 좋아하여 항상 영어 시간이 되면 아무리 졸려도 집중했고, 영어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공장은 일주일 단위로 주·야간 교대를 했기에 어떤 때는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다시 공장으로 가서 일해야 했습니다. 잠이 많던 제게 그 일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식품회사에 일당직으로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 사정을 잘 아시던 선생님께서 좀 나은 직장을 알선해 주셔서 실험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수질오염과 대기오염을 측정하는 회사였는데, 저는 연구원들의 실험을 보조하고 실험기구를 세척하고, 샘플 채취를 보조하는 등의 업무와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연구원 선생님은 제게 앞으로 환경 분야가 중요하다며 진로의 방향을 예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급여가 열악하여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곳을 주선해 주셨는데 지역에서 가장 큰 회사였습니다. 제 일은 총무부의 업무보조, 도서실 관리와 청소 등이었습니다. 직원들이 많은 회사였기에 할 일도 무척 많았습니다. 인사과 업무도 보조해서 직원들의 인사관리 카드와 급여 정리하는 일을 도왔는데, 많은 직원이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주변에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고는 학교 선생님이 전부였는데, 그분들이 받는 급여는 당시로써는 굉장해 보였습니다.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회사에는 독일에서 기술자들이 오곤 했는데 총무부에서 접대하기 때문에 자주 커피를 들고 다니며 인사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는 정도의 인사를 영어로 하며 몇 마디를 주고받곤 했는데 칭찬을 해주시며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 박사님이 돼라.” 하며 진지하게 말씀해 주신 차장님이 계셨습니다. 또 공장장님께서는 매월 월급날 불러서 노트값 하라고 하시며 용돈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제 삶에 ‘희망과 꿈의 씨앗’을 주신 분들입니다. 겨우 야간 고등학교 다니던 조그만 아이에게 너무나 큰 비전이라 할 수 있는 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제 가슴에 살아 있었습니다.

 

동생이 대학 등록금을 지원해 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식직원으로 채용해 준다고 했지만 저는 거절하고 진학을 하겠다며 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입학력고사를 치렀고 영문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였습니다. 재수할 형편이 아니어서 아는 선생님 주선으로 과학실무원으로 취직하여 타지방으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급여는 교통비와 용돈 정도였으나 대안이 없어 1년을 다녔습니다. 다시 1년은 공무원 시험을 볼까 하는 마음으로 독서실을 다니곤 했으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시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전문대학에 지원하여 합격통지를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저는 너무 기뻐서 며칠을 아침 일찍부터 걸어서 다녔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동생이 산업체 고등학교 다니면서 번 돈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시절 정말 공부를 잘하고 재능이 많았던 동생은 인문계 다니려고 모든 것을 다했는데 가정 형편 앞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려 집을 떠나 노동의 현장으로 갔던 것입니다. 제가 방황할 때 동생은 그 힘든 수출공단 현장에서 제가 견디지 못한 그 고된 현장을 지키며 주경야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들게 번 돈으로 제 등록금을 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고 학교 방송국에서 일하며 장학금으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취직 후 동생의 한 학기 등록금을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감회는 오랫동안 가슴에 있었습니다. 동생과 제가 전문대학을 다니는 동안 엄마는 남의 집 일을 계속하시면서 저희를 뒷바라지해주셨고, 그 아래 동생들도 공부를 잘하여 힘들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대학 진학을 했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시절을 잘 견뎌내고 살아온 동생들에게 전우애를 느낍니다. 우리는 가난과 긴 싸움을 하나씩 헤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영문과 편입

 

그 후 결혼을 하여 첫 아이가 세 살 될 무렵 제법 부유해 보이던 시댁의 사업이 점점 부진해 보이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시기로 보였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내 공부에 투자하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동의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영어영문학과 편입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했습니다. 서른세 살이었는데 교수님은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말씀해 주시며 공부할 거리를 많이 주셨습니다.

 

아침이면 도시락과 함께 아이를 내복 바람으로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는 학교로 갔습니다. 어린이집 마치는 시간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퇴근하곤 했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제 형편을 아시고 응원과 도움을 주셨기에 난생처음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영어를 좋아했지만, 공부해본 적은 거의 없었으니 실력 있는 학생들 틈에서 죽기로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쪽지시험 준비를 하고, 과제를 하느라 새벽에 겨우 몇 시간 자기 일쑤였고, 시험 때면 두피에 뾰루지가 나서 베개를 벨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괜한 짓이 아닐까, 미쳤지,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그 모든 후회가 사라지고 다시 후회하고 하면서 졸업을 했습니다.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는 것은 제게 마치 날개를 달고 비상할 수 있는 것처럼 좋았습니다.

 

직업을 위한 교육의 시간과 비정규직 강사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느낌도 잠시, 시골 초등학교 방과 후 영어 강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익자 개인 부담이 아니라 학교가 정한 강의료가 너무 적었고 방학이면 아예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일을 그만두고 서울 한 대학교의 테솔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친정어머니께 부탁드리고 한 달 동안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남편은 그동안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영사기사로 취직을 해서 다른 지방에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여러 공부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한 달의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배움을 경험했고 교수법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이 출산 후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아이를 키우며 논문을 쓰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사이 남편은 젊은 나이에 퇴직을 당하고 취업을 위한 직업교육을 받으러 떠났고, 저는 시골의 한 초등학교 영어체험실에 내국인 영어 강사로 취직을 하였습니다. 외국인 2명과 내국인 2명의 강사가 전교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주제의 활동을 체험하며 방과 후 영어수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예산이 부족하다며 내국인 강사를 갑작스럽게 해고하였습니다. 놀란 가운데 다행히 기간제 교사 영어 전담으로 1년을 근무했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예산이 더 줄었다고 해 외국인 강사들이 떠났고, 저는 내국인 강사로 1년 계약을 했습니다. 해마다 예산에 따라 달라지는 신분과 불안한 근로조건으로 겨울방학이 오면 몸살을 앓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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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세종시 교육부 앞, 영어회화전문강사의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집회(@전국교육공무직본부)

 

영어회화전문강사의 겨울

 

다음 해에는 영어회화전문강사직(영전강)에 결원이 생겨 시험에 응시해 채용되었습니다. 정규 교과 시간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평가권이 있는 영전강은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며 4년이 끝나는 해 퇴직하며 신규로 시험에 응시해야 하는 비정규직 강사입니다. 고용 시점부터 4년마다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며 시험과 계약을 치르며 이곳에 근무한 지 만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매년 학생들과 학부모, 동료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임용고시의 문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용불안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은 비인간적 처사입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업 현장에서 전문성을 쌓아왔고 신뢰를 쌓아왔음에도 어느 날이면 동료가 감독자가 되고 수험자가 되어 시험과 면접을 보아야 하는 자괴감에 빠지는 현실이 어디에 있을까요. 주무 부처인 교육부와 도 교육청은 공을 서로 떠밀며 책임 있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 사이 수많은 강사가 현장을 떠났고, 1/3 남은 강사들은 또다시 다가오는 추운 겨울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다른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으로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과연 이런 종류의 일이 되풀이될 수 있을까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일을 하든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반 여건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의식주는 해결하고 살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정규직이기에 생활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이 아니고, 내일의 꿈을 꿀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나치의 ‘유대인 표식’ 같은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사회 곳곳에서 차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미치지 못하고, 마치 기준 미달인듯한 ‘비정규직’이라는 어휘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에서부터 사회의 3등 시민인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비정규직의 ‘고립된 섬’들이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리면 언젠가 그 병폐는 예상할 수 없는 큰 문제로 나타날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인 인구 절벽의 현실 앞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정책과 수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고용 불안정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현실을 봅니다. 누구도 불안정한 삶 속에 살고 싶지 않고,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학생들이 살아갈 내일은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맡는 일을 탐색하고, 어떤 일을 선택하든지 그 일에서 존중받으며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는 비정규직 없는 사회를 눈이 시리도록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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