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 대상_생지옥에서 피는 희망꽃

by 센터 posted Dec 3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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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석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2018년 3월 2일.

이날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난 특별한 날이다. 쉰 세 살에 가족을 두고 홀로 거제로 간다는 것도,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옷 몇 벌과 이불 한 채를 보따리에 싸서 거제로 왔다.

 

2018년은 조선업의 위기가 본격화되던 때였기에 조선소에 취업하는 것 자체가 그리 쉽지 않았고, 더욱이 나처럼 초보인 경우에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4개월 동안 거제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취업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이 막연한 기다림이 이어지던 7월, 건강검진을 받고 대기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뛸 듯이 기뻤다. 또다시 대기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8월 22일, 안전교육 날이 잡혔다. 내가 들어갈 때만 해도 200여 명이 함께 안전교육을 받았다. 8시간 교육 후 드디어 조선소에 들어가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1.총파업.jpg

도장업체 기륭이엔지 폐업에 맞서 10월 중순부터 11월 30일까지 투쟁했고 결국 승리했다.

 

그다음 날 8월 23일 첫 출근.

두꺼운 안전 관련 책을 한 권 던져주더니 읽으란다. ‘이 책을 다 읽으라고? 설명도 없이?’ 산업 안전과 관련된 책이었다. 홀로 탈의실에서 뒤적거리다 오후엔 견학한다고 하여 배에 올랐다. 안전관리자가 동행해서 올라간 배는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큰 배였다. 배에서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는데, 좌현, 우현, 선수, 선미를 알게 되었다. 이것만 알면 된다는 이야기에 진짜 그런 줄 알았다. 뒤에 알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저렇게 생긴 게 코끼리라는 동물이야.’ 정도였다. 아직도 처음 듣는 이름이 수백 가지인데 말이다. 그다음 날부터 들어오면서 가졌던 기대감, 설렘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내가 배치된 직종은 도장부이다. 일을 소개해준 동생이 “물만 푸면 되니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도장부는 전처리(일명 파워), T/UP(터치업), 스프레이 등 3개 직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 T/UP을 하고 있다. T/UP은 붓과 롤러를 사용하여 손으로 하는 도장을 말한다. 깡통(T/UP 하는 노동자가 페인트를 섞어서 작업하는 약 4L의 용기), 롤러, 인치붓, 끌칼, 스크래퍼, 보루, 안전벨트, 보안경, 안전모, 귀마개, 빗자루, 작업복(피스복-도장용), 방독마스크, 승선증, 작업증, 플래시 등을 챙겨서 승선하였다. 16가지를 꼼꼼히 챙겨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조선소는 반 단위가 최소 작업단위이자 관리단위인데 내가 속하게 된 반은 10여 명이 한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성 3~4명, 여성 6~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 체조와 조회를 끝내고 첫날 작업이 시작되었다. 첫날이니 모든 작업 도구를 두고 따라와서 구경만 하라고 하길래 긴장과 불안감을 안고 들어간 탱크. 한마디로 캄캄한 동굴에 전등 몇 개 켜놓은 듯한 어두침침한 탱크는 그 자체가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높이 20~30m를 좁은 계단이나 수직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당시 몸무게가 82kg이었으니 오르내리는 자체가 초보인 나에게는 매우 힘들었다. 하루, 이틀, 사흘째 되는 날 ‘아,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배에서 일한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생사를 오가는 것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 결심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살부터 빼야 한다고 결심하고 하루에 한 끼를 먹었다. 아침 거르고, 점심 먹고, 저녁에는 탄수화물을 끊었다. 그렇게 4개월을 보내고 17kg을 빼고 65kg이 되었다. 몸이 가벼워지는 동안 조선소에 필사적으로 적응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근로계약을 작성하고, 페인트 희석부터 터치업하는 방법, 에어호스(도장 작업은 공기를 넣어야 함. 도장 후 건조 목적) 설치 방법 등 도장에 필요한 실무기술을 익혀갔다. 문제는 고소공포증이었다. 중학교 때 우물에 빠진 뒤 생긴 병이다. 극심한 고소공포증이 있어 운전하면서도 다리를 통과할 때 시속 120km로 달릴 정도였다. 빨리 달려 지나가야 하니까. 보통의 LNG선의 배 길이는 300m, 높이가 30m 정도이니 얼마나 무서웠는지 하루하루가 공포였다. 어느 날 갑판에서 지상 안벽으로 통에어호스(25m)를 연결해서 2~3개를 내리는 일이 있었다. 안벽에 있는 동료는 고함을 치면서 “형님, 빨리 안 내리고 뭐하는교?” 하며 닦달했다. 멀리 떨어졌는데도 후들후들 떨면서 내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또 어떤 날은 탱크 안에서 길을 잃어 30분 동안 동료 노동자들을 찾아 땀이 비 오듯 하면서 헤매기도 했다. 

 

일당 105,000원 받다가 4개월 뒤에 115,000원을 올려받았다. 함께 소속된 반원들이 일당을 올려달라고 반장한테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4개월 만에 A급 일당을 받게 된 것이다. 죽을 각오로 일한 덕분에 반원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같은 반원들은 거의 15년 이상 도장공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임금이 같았다. 조선소 임금이라는 것이 경력도, 기술 능력도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일당 얼마로 임금을 책정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조선소 임금 몇 달을 받으면서 서서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조선소는 왜 이렇게 저임금으로 일을 할까?’

 

조선소의 하루하루는 새벽부터 시작이다. 8시부터 업무가 시작되지만 많은 노동자는 6시에서 7시 사이 출근한다. 조선소에서 밥 먹고, 샤워하고, 작업 현장에는 7시 30분 전에 도착한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차츰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알게 되었고, 나조차도 점차 그렇게 적응되어 갔다.

 

일찍 출근해야 작업 준비가 되었다. 소위 깡통을 싸고(터치업용 비닐봉지), 강아지(롤러붓) 깎고, 인치 붓을 자르고, 17가지의 준비물을 챙겨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조회하고 탱크 들어가는 도장공은 마치 바다로 들어가는 해녀와 같았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오직 화장실 가거나 담배 피우는 것 말고는 한번 들어가면 점심 먹을 때나 나왔다. 탱크 안 도장 작업은 일도 힘들지만, 유기용제 때문에 죽을 맛이다. 페인트의 특성 때문에 도료와 경화제, 시너를 희석해야 하므로 도장 과정에서 유기용제 가스가 탱크 안에 가득하다. 방독마스크를 하고 작업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스 차단이 불가능하므로 도장공 노동자들은 눈은 따갑지, 호흡하기는 힘들지 정말 죽을 맛이다. 어떤 도장공 노동자는 구역질하기도 하고, 두통을 호소해도 무조건 참아야 했다. 사내에서 건강검진을 연 2회 하는데 할 때마다 오줌 검사에서 발암 성분이 나오는 것을 보면 탱크 안의 도장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독한 유기용제 가스는 방독마스크로 100% 차단이 안 된다. 마스크를 하지 않고 일하는 도장공도 간혹 있는데 살려고 일하는지 죽으려고 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유기용제의 위험은 3년 3개월이 지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도장공은 유기용제의 위험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지만 고소 작업의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다. 규정상 안전벨트를 차고 일을 하지만 무거워서 잘 차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당연히 안전벨트를 착용해야 한다.

 

대우조선 취업한 지 6개월이 되던 2019년 1월 25일, 도장 노동자(도장부 중 전처리공)가 추락해서 사망했다. 수많은 노동자가 죽어갔다고 들었는데 입사 후 첫 사망사고가 난 것이다. 평소에 고소 작업을 할 때 항상 위험을 느끼고 일했는데 실제로 노동자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아, 누군가는,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구나.’ 생각하니 섬뜩했다. 3년 3개월 동안 추락사고로, 심정지로, 더위로, 용접하다가 노동자들이 죽어갔다. 어떤 노동자는 산업재해로 인정되기도 하고, 또 어떤 노동자는 개죽음이 되기도 했다.

 

제법 조선소 노동자들과 친해지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모이면 주로 하는 이야기는 온통 불평불만이다. 이야기 중에 절반이 욕이다. 하청 사장 욕, 원청 욕. 하청 사장 욕은 ‘돈 떼먹는다’라는 것이고, 원청에 대한 욕은 주로 직영 노동자들에 대한 욕이다. 원청 사장을 욕하는 것보다는 원청 노동자를 욕하는 것이 훨씬 많다. 왜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사장을 욕하지 않고 직영 정규직 노동자를 욕하는 것인지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규직 노동자는 노동조합이 있었고, 30여 년 동안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분단의 벽처럼 공고하게 만들어져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차별은 너무나 깊었다. 하청 노동자는 원청 정규직 노동자가 30여 년 노동조합을 통하여 투쟁하고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고, 투쟁하다가 죽어간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삶과 비교해서 너무 큰 차별이 있어 거의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그 많은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청 노동자들이 하는 말은 “조선소는 생지옥이다.”라는 것이다. ‘생지옥’ 불교에서는 지옥地獄의 종류로서 팔열팔한지옥八熱八寒地獄이라 하여 수십 가지 지옥의 종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지옥은 사후死後이지만 조선소는 생지옥生地獄이다.

 

조선소는 활황기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도장공 노동자들이 한 달에 500~700만 원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임금을 받았는지를 물어보니 한 달에 400시간, 500시간 일해서 받은 임금이란다. 현재 내가 받는 임금은 1공수(조선소에서는 하루 일을 1공수라고 함)에 125,000원이다. 30일 일하면 세금공제 전 3,750,000원이다. 거기다가 1시간 잔업 하면 15,000원이니 하루 4시간에 30일 하면 1,800,000원. 합치면 5,550,000원이다. 500만 원 정도를 벌었다면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10시까지 일해야 받는 임금이다. 당시에는 최저시급이 훨씬 적었으니 한 달에 몇 시간 일했을까 생각해보면 끔찍하다.

 

조선업 위기라는 요즘 그조차도 지난날 추억이 되어버렸다. 일이 없다는 이유로 8시간 정시 퇴근, 잔업 0, 토·일요일은 휴무니 한 달에 20공수 내외, 임금 200만 원 내외, 심지어 여름휴가나 명절이 있는 경우에는 무급이니 150만 원 내외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위험구역에서 일하지, 유기용제에 노출되어 서서히 죽어가지, 인간 대우를 받기는커녕 중세시대 노예처럼 살아야 하지, 생지옥이란 말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 생지옥에서 살아가는 노동자 삶의 모습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함께 살자’가 아니고 ‘나만 살자’다. 대우조선 공장 안에는 수십 개의 식당과 샤워장이 있다. 점심시간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식당 문을 열자마자 서로 먼저 먹으려고 뛴다.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먹이를 서로 먹으려고 쫓아가는 동물들처럼. 그리고 샤워장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이용하는데 샤워장 바닥에는 수건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수건 함이 있지만, 그냥 본인만 닦고 바닥에 던져버린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제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것이 1도 즐겁지 않고, 대우조선에 대한 소속감도 1도 없다. 하루 잘 개기다가 살아나가면 그것이 다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년 3개월 만에 내가 속한 도장반에서 최고 고참이 되었다. 나처럼 한 회사(소위 협력사)에 붙박이 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거제는 삼성중공업이 있으니 여기저기 다른 하청업체로 떠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단돈 1,000원이라도 더 주면, 잔업 많이 한다고 하면 옮긴다. 다닌 회사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면 자신도 기억 못 할 정도로 많이 옮겨서 모른다고 한다. 소위 진보 정부라고 하는 지금, 조선소는 아직도 전태일 열사의 평화 시장이다.

 

조선소에 들어온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면 새로운 전환점이 생겼다. 2년 7개월이 지난 2021년 4월, 조선소의 도장공 노동자들의 파업(정확히 말하면 노동을 안 하는 것임)이 있었다. 도장부는 90% 이상이 일당제이다. 일당제라는 것은 일하면 돈 주고, 일하지 않으면 돈을 안 준다는 것이다. 그동안 1~3개월씩 근로계약을 작성하고 3년이 넘었으니 무기계약으로 전환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일당제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꼴이다. 도장 노동자들의 파업은 파업이 아니라 그냥 노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용자들이 할 말이 없지만, 그들은 근태가 어떻고, 무단결근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일당제인데 말이다.

 

300여 명이 모여 23일간의 파업을 했다. 그동안 잘릴까 봐 아무 말도 못 했던 노동자들이 무려 23일간을 파업하다니. 절대다수의 파업 노동자들은 도장공 중 전처리 노동자들이다. 일명 파워 노동자들이다. 여기에 터치업, 스프레이공 노동자가 함께했다. 23일 동안의 투쟁 과정에서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동안 대우조선을 중심으로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가 있었고, 조선하청지회 간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투쟁이 있었기에 23일의 투쟁은 자연스럽게 하청지회로 연결되었고 승리했다. 23일 동안의 투쟁은 단기 근로계약서를 1년으로 바꾸었고, 휴가비(설 추석 각각 15만 원, 여름 휴가비 10만 원), 블랙리스트 금지, 데마찌 금지(강제무급휴가) 등을 쟁취했다. 그리고 그동안 없었던 퇴직금도 쟁취했다. 그동안 퇴직적치금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에게서 임금을 공제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대우조선 내 도장 9개 업체 대표와 업체별 노동자 대표 사이의 합의(하청업체는 노동조합과의 합의를 거부했고, 심지어 노동조합 조끼 입는 것조차 거부)지만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성과였다. 특히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감격이었다. 1~3개월 근로계약은 노동조합 활동 자체를 원천봉쇄하였고, 사용자들이 근로계약만 해지하면 아무런 저항도 못 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1년 근로계약. 3년 3개월 동안 회사 이름이 두 번 바뀌었지만, 올해 12월 1일이면 한 회사에서 2년 이상 계속 근로를 하고 있으므로 법적으로 해고할 수 없다. 물론 또 다른 이름으로 바꾸겠지만.

 

4월 파업 투쟁 이후 6월에 조선하청지회 도장분회 이름으로 정식 교섭공문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협력업체는 공동교섭을 거부했고 개별업체와 개별업체 노동조합 대표와 교섭을 하게 되었다. 이마저도 대단한 일이지만. 6차에 걸친 교섭 그러나 돌아온 사용자의 답변은 당연히 수용 불가다. 특히 돈과 관련된 것은 100% 수용 불가란다. 안전보호구를 지급하라는 것도 수용이 아니라 검토라고 했다. 그리고 4월 투쟁의 성과인 휴가비를 지급하지 못하겠다, 데마찌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현재 그들은 4월 합의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19개 요구안 중 대부분은 법적으로 당연히 지급 내지는 지켜야 할 산업 안전 관련 요구임에도 말이다. 조선소 도장공 노동자들은 포괄임금제로 계약한다. 포괄임금 안에는 연차, 휴일 등 법정 수당들이 다 포함되어 있고, 기본급은 최저시급이다.

 

6차 교섭 후 결렬을 선언하고 지난 11월 1일부터 드디어 합법적인 쟁의권을 확보했다. 대한민국 조선소 역사상 하청 노동자가 합법적인 쟁의권을 확보한 것은 처음이란다. 1978년 대우조선이 창립되고 처음 있는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단체행동권을 이제야 합법적으로 행사하게 되었으니 이제 도장공 노동자들은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다. 파업권을 쟁취하고 열흘 뒤인 11월 11일 12시 대우조선 현장 민주광장에서 첫 부분파업이 있었다. 간부들은 6시간 파업, 조합원들은 오후 4시간 파업하고 400여 명이 모였다. 모두가 손을 잡고 ‘아, 이제 우리는 인간답게 살아갈 최소한의 준비를 하고 있구나.’ 하고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감격 광장에는 부산 갈매기 대중가요에다 가사를 바꾼 하청 갈매기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불법을 그만해 차별을 그만해 비정규직 철폐해

도장도 비정규직 발판도 비정규직 청소도 식당도 용접도 생지옥 대우조선아

내 청춘을 조선소에 원, 투룸 전세방 떠돌며 살았는데

이제는 못 참아 더는 못 뺏겨 하청 노동자 일어서야 해

불법을 그만해 차별을 그만해 비정규직 철폐해

우리 모두 뭉쳤다. 다 함께 투쟁해요.

쥐꼬리 임금은 말도 안 돼 힘차게 외쳐 임금인상

흩어지면 죽는다. 어제도 오늘도 끝까지 투쟁하자.

임금인상해 차별 철폐해 인간답게 살아보자.

노동조합과 함께해 인간답게 살아보자

불법을 그만해 차별을 그만해 비정규직 철폐해”

 

〈임을 위한 행진곡〉도 〈파업가〉도 이제는 우리의 노래가 되었다.

진짜 첫 파업을 마치고 행진을 시작했다. 도장업체 중 가장 악질적인 한 개의 사업장을 찍어 업체 앞에서 규탄 집회를 하고, 하청 노동자들의 진짜 사장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대우조선 진짜 사장 원청 사장은 나와라!” 목 터지게 외치며 본관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노동자들은 200여 명이 넘었지만2,000명이 넘는 우레가 울려 퍼졌다.

 

11월 1일 사망한 고故 김도영 노동자-산업재해 사망이지만 산업재해 불인정, 유족들께서 11월 1일 발인하는 날 화장장으로 가지 않고 대우조선 정문으로 오심-에 대한 추모, 대우조선 다섯 분이 계신 열사 추모비를 지나 원청본관, 소위 지원센터라는 곳에 도착했다. ‘어이없게도 차벽이라니!’ 철옹성처럼 둘러싸인 버스 차벽은 하청 노동자의 앞날이 얼마나 험난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듯했다. 하청 노동자들은 그 차벽을 ‘거머리 산성’이라고 불렀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먹는다. 하청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원청의 산성은 말 그대로 거머리 산성이었다. 거머리 산성에서 구호를 외쳤다. “대우조선 진짜 사장 원청을 박살 내자!” 하청 노동자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바로 이곳이다그 어떤 하청 노동자도 이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작은 도둑 하청 대표를 넘어큰 도둑인 원청을 때려잡지 않고는 하청 노동자의 근본적인 삶의 변화는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원청규탄 집회를 마치고 다시 대우조선 서문 선각 삼거리로 향해 마지막 정리 집회를 했다. 대우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합법적인 파업과 야드 행진과 투쟁, 울려 퍼지는 투쟁의 노랫소리, 옥포만 바닷바람을 타고 출렁이는 조선하청노동조합의 깃발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뱃고동이다. 도장공 노동자들의첫 파업은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4대 보험 체납업체가 수십 개이고,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던져주는 임금’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1만 4천 하청노동자들이 있고, 더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투쟁하는 노동자가 있기 때문이다. 생지옥 대우조선의 척박한 땅에서 하청 노동자들의 희망꽃은 활짝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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