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코로나19] 코로나19로 드러난 위기의 삶

by 센터 posted Jun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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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배  대리운전 노동자



정규직으로 10년 넘게 다니던 회사가 2008년 경제 위기 여파로 문을 닫아 궁여지책으로 시작하게 된 대리운전 노동자의 삶이 벌써 8년이 되었다. 처음 대리운전을 시작했을 때 나는 자유로움에 도취했다. 스마트폰의 어플을 켜면 출근이고 어플을 끄면 퇴근인 직업, 출근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뭐라는 사람 없고, 어떤 오더를 잡을지 자유로운 선택이 있고, 매일 노력한 만큼 수입이 생기고, 고객으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 이 얼마나 멋진 직업인가?


그러나 심야 노동에도 수입은 최저임금에 불과하고, 업체와 취객의 갑질을 참고 견뎌야 하며, 경력이 늘어날수록 수입이 줄어드는,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퇴직금도 없고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이 적용 안 돼 잘리거나 아파서 일을 못하면 바로 생계가 끊어지기에 출근하지 않을 자유는 굶어 죽을 자유와 다름없었다. 


5.대리운전.jpg

2020년 3월 어느 늦은 밤, 서울 신논현사거리에서 대리운전노동조합이 진행한 마스크 나눔 캠페인


코로나19는 이러한 특수고용직이자 플랫폼 직종인 대리운전 노동자의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콜 수가 반토막 나고, 평소라면 운행하기 바쁜 피크 타임에 서너 시간 우두커니 휴대폰 화면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를 여러 날, 이대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마스크도 제대로 쓰지 않은 취객들과 밀폐된 차 안에서 장시간 함께 이동하고, 심야버스나 대리 셔틀을 타야 하는 업무 특성상 언제 어떻게 감염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예 일을 포기하거나 다른 직업으로 옮겨가는 기사들도 늘어났다. 


최저임금에 불과한 수입마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업체들은 운행 시 마스크를 쓰라는 경고 공지만을 띄울 뿐 마스크 한 장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보험료, 수수료, 관리비, 프로그램비 등을 떼어가 이윤을 유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최근 대리운전노동조합에서 카카오 기사들에 대한 코로나19 방역물품 지원과 수수료 인하 등 안전 및 생계 대책을 요구했지만 카카오는 마스크 구입비 5천 원을 콜 탄 기사에게 일회성으로 지원하는 생색내기 대책만을 내놓고 있다. 플랫폼 산업과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한다는 기업이 매년 수백억의 순이익을 벌어준 소속 기사들을 이렇게 대했다. 대전의 한 업체는 코로나 특별고용지원금 신청 서류를 발급해주면서 소속 기사들에게 발급비 5천 원을 내라고 했다. 


그동안 정부가 기업주들의 이익을 위해 특수고용직을 늘리고 법과 제도로부터 배제해 온 결과 업체들은 이렇게 코로나19 위기에도 거리낌 없이 대리운전 기사의 주머니를 털어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대리운전 기사 수가 늘어나면 대리운전 기사는 소득이 줄지만, 업체는 오히려 이윤이 늘어나는 기형적 구조로 인해 대리운전 기사들의 노동 조건은 점점 더 황폐화되고 있다. 이렇게 정부의 차별적 정책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보고 있지만 정부가 마련한 긴급지원 대책은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이다. 정부는 220만 특수고용과 20만 대리운전 기사들의 규모에 10분의 1도 안 되는 지원금 예산을 편성해놓고 대다수를 탈락시키기 위한 까다로운 기준과 절차를 들이밀고 있다. 많은 대리운전 기사들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열 가지가 넘는 서류를 준비하다가 지쳐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휴업급여도 퇴직금도 실업급여도 받지 못해 일이 끊기면 당장 굶어야 하는데 정부 지원 마저 차별받는 현실에 박탈감이 커져가고 있다.  


코로나19는 노동기본권과 사회안전망이 왜 필요한지도 극명하게 드러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꽃이 된 지 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노동자가 근로기준법과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촛불로 당선된 문재인 정부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고 있다.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과 방과 후 강사의 노동조합 설립신고는 1년이 지났지만 검토 중이라며 사실상 반려하고 있다, 기업에게는 200조나 퍼주고 노동자들에게는 그 10분의 1도 지원하지 않으면서 고용보험법 적용에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려 한다. 노동법과 사회보장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생계절벽에 내던져 놓고 말이다.


코로나19 위기는 이제 기존의 조건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사회는 전 국민 고용보험 같은 근본적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 일하는 모든 사람이 사회보험과 근로기준법을 적용받고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단기적 시혜가 아니라 권리 보장을 통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생존권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으로 단결해 투쟁하는 것은 삶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대리운전노동조합의 지난 수년간의 투쟁은 대리운전 노동자를 사회적으로 하나의 직업군으로 부각시켰고 정부와 지자체의 제도적 개선과 지원도 이끌어냈다.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세상에 노동조합은 이처럼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 될 것이다. 정부의 개선 약속에 기대지 말고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앞장서 단호하게 투쟁해야 한다. 그래야 개악을 막고 법과 제도를 개선해 대다수 미조직 노동자들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지킬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단결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생계와 안전을 지킬 수 없다. 


나는 대리운전 노동자다. 코로나19 이후 사회보장과 법 제도로부터 배제된 특수고용직 노동자이자 플랫폼 노동자인 내 삶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내게는 노동조합이 있다. 코로나가 바꿔놓은 사회에서는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이라는 차별이 더이상 발붙이지 못하게 단결하고 투쟁할 조직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오늘도 나는 노동조합 가입서와 소식지를 들고 거리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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