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좌담] 비정규 노동 운동과 함께한 20년, 다시 또다시

by 센터 posted Jan 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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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2020년 11월 27일(금) 오후 2시
▪어디서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회의실
▪사회  문종찬 센터 상임활동가
▪참석  박승흡 매일노동뉴스 회장, 초대 소장
          조진원 센터 이사, 2대 소장
          김성희 산업노동정책연구소 소장, 3대 소장
          이남신 서울노동권익센터 소장, 4대 소장
▪정리  강인수 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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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찬   2020년 5월 20일은 우리 센터가 창립한 지 20년된 날이었습니다.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했는데 코로나 확산기여서 취소하고 하반기로 미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계속되는 바람에 결국 무산됐는데요. 앞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해나가겠지만 20돌 맞이 첫 기획으로 《비정규노동》 1, 2월호를 특별호로 발행하기로 했습니다. 소장님들과 함께 센터 20년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활동을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근황부터 얘기해볼까요.

박승흡   서울시교육청 조희연 교육감 2기를 준비하면서 노동인권 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한 조례상 기구를 만들어 학교 현장에서 적용하자는 공약을 걸었어요. 당선되자마자 이행을 하셔서 노동인권교육위원회가 설치됐고, 제가 1기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임기는 끝났는데 2기에도 아마 계속 맡아 할 것 같고요. 2019년 출범한 금융산업공익재단에서도 노동계 추천 이사로 참여했는데 연임하라고 해서 계속 활동할 것 같습니다. 매일노동뉴스도 12월 1일이 7천 호 발행이어서 기념행사를 하려고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못하게 돼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조진원   서울메트로환경을 비롯해 팔자에 없는 사장을 7년간 했는데, 그동안 경영 수업을 잘 받았습니다. 노동 운동과 회사 경영을 거치면서 노와 사 모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근래 현장의 단위노조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지난 9월 말에 은퇴하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리더십과 코칭이라는 MBA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번 학기에 마치게 됩니다.

김성희   고대 노동대학원에서 노동조합론 등을 강의하고 있고, 비정규센터 부설기관이었던 산업노동정책연구소 독립 법인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경기도에서 세계 최초로 노동인지예산을 도입하겠다고 해서 실제로 실행해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남신   서울노동권익센터 새내기 소장으로 일하면서 민간 노동 운동단체와 무엇이 다른지 뼈저리게 느끼면서 배우고 있습니다.서울노동권익센터와 서울감정노동센터, 전태일기념관 세 기관이 통합 노조로 만든 서울시민간위탁유니온과 교섭하고, 또서울노동권익센터 지부 교섭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실무 교섭위원 대표를 맡고 있어서 사측 입장을 고수하며 잘해야 하는데 두루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다니고 있는데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런저런 현안 때문에 결석도 많이 하고 과제도 잘 못 내고 있네요.

2020년 5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만든 사람들

문종찬   비정규센터가 창립한 시점부터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거액을 투자해서 센터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시작하게 되셨나요?

박승흡   전교조 해직 교사였는데 현직에 복귀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IMF 상황에서 노동시장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고용 상황이 흔들리는 거 보면서 정규직 질서의 노동 운동이 아닌 변화되는 지점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딱히 비정규센터라는 깃발을 준비한 건 아니고 정규직 외 우리 사회가 중요하게다뤄야 할 부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죠. 그때 숭실대 대학원에 다녔는데 조우현 교수가 여러 조언을 해줬어요. 미국의 비정규 전문 기관인 ‘워킹투데이’ 같은 기관을 눈여겨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비정규 문제와 관련된 구체적 자료를 구하려고 유럽에 3개월 정도 있으면서 노동문제 공부하는 분들 얘기도 듣고 했죠. 내가 일하는 스타일이 그렇긴한데, 일단 사무실을 먼저 열었어요. 그것도 강남사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을 딱 잡았죠. 혼자 할 순 없으니 현장 경험이 있는 조진원이라는 사람을 잡으러 갔죠. 찾아가서 같이 하자고 삼고초려 한 것 같아요. 

조진원   박승흡 소장님이 전략적 지점에 대한 직관력이 뛰어났어요. 저는 그때 건설노조에서 일용직과 사무직 통합 규약을 만들어 놓고 그만두고 쉬고 있었어요. 노동조합을 그만두긴 했지만, 떠난다는 생각을 별로 안 했어요.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죠. 그때 내 나이가 마흔이었으니까 다시 활동하더라도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박승흡 소장님 만나고 ‘어, 직업을 바꿔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죠. 

박승흡   진원이 형이 결합하기로 하면서 이런 쪽에 잘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주변에 수소문해보니 〈매일노동뉴스〉에서 일하는 박영삼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만나서 꼬셨죠. 처음에는 한국의 노동조합복지센터로 하냐, 비정규 영어 개념이 뭐냐 가지고도 논란이 많았죠. 난 영어는 모르겠고, 정규직의 반대 개념이 비정규니까 비정규로 하자, 그리고 센터 붙이자, 한국 붙이자 해서 ‘한국비정규노동센터’로 이름을 확정했습니다. 그러면서 2000년 5월에 출범한 거죠. 대한민국의 핵폭탄 같은 기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아무도 못 했던 길을 간다. 인터넷 시대에 맞춰 ‘워킹보이스’ 포털 사이트를 개설해서 비정규 관련된 것들을 모두 온라인으로 총집결시킨다는 목표를 가졌어요. 돈을 엄청 쏟아부었죠. 

조진원   지금은 ‘워킹보이스’가 없어졌지만, 동영상까지 제작해서 업로드시켰어요. 유튜브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했던 거죠. 그때 김기현(현 KBS 기자)과 이정희(현 노동연구원 연구원)가 현장 나가서 촬영과 취재를 해 밤에 편집하고 그다음 날 바로바로 올렸어요. 웹에서는 이게 히트 쳤어요. 지금 유튜브만큼 생생했거든요. 그리고 한편에선 박영삼이 월간 《비정규노동》을 냈고. 그러자 센터가 실력 있는 곳이라고 확실하게 각인됐죠. 노동 운동에서 새로운 영역인데 진입을 잘했어요. 

문종찬   상당히 선구적인 느낌인데 지금처럼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 환경 기반이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굉장히 앞선 시도였네요. 

박승흡   그런데 뒷심이 부족했어요. 

조진원   박승흡 소장이 2003년 〈매일노동뉴스〉를 인수하면서 내가 센터 소장을 이어받고 〈매일노동뉴스〉 부사장을 겸임했죠. 그때 김성희 소장이 부소장을 하면서 정책 연구를 맡았어요.

문종찬   두 분이 초창기에 사업을 설계하는 역할을 하셨다면 김성희 소장님은 연구 부문으로 결합을 하신 거네요.

김성희   그렇죠. 제가 소장을 맡으면서 센터 활동 초점이 연구소 개념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정책 생산과 연대 활동 두 가지 축으로 굴러갔어요. 비정규 정책 과제 연구와 정규직 노조의 일반과제 연구를 진행하면서 2006년에 센터 부설로 ‘산업노동정책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연구자가 열세 명까지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박승흡   김성희가 소장되기 전 중앙연구원에 있을 때 간이 안 좋았다고 해서 내가 강원도에서 간에 좋은 상황버섯을 달여서 연구원에 찾아갔어요. “당신은 개인 김성희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의 아들이기 때문에 살아야 된다, 센터에 와서 일 좀 같이 하자.”고 했지. 그러면서 소장으로 영입했죠. 

김성희   열심히 먹진 않은 것 같은데, 상황버섯을 먹어서 그런지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살아있더라고요. 하여튼 스트레스 탓이었지 술 탓이 아니었음을 이 기회에 밝혀둡니다.

문종찬   그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계셨던 거네요?

박승흡   그럼 그럼. 저 사람이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에 있는데 유심히 봤더니 우리 사회의 근본 개혁 방향을 고민하는 연구자더라고. 

이남신   저는 정규직으로 이랜드 비정규 투쟁을 하고 해고된 상태에서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을 하다가 김성희 소장님 콜 받고 센터로 오게 됐어요. 반상근 부소장을 했는데 만만치 않더라고요. 2010년엔 센터가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고, 노조 못지않게 힘들었어요. 상근자들이 많이 그만두기도 했고. 저도 부소장 그만둔다고 하고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어요. 그런데 다녀와서 조돈문 대표님에게 발목 붙잡혀서 복귀하게 됐죠. 대표님이 소장 제안하려고 만나자고 한 건데, 막상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예요. 사실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답답해서 그냥 한다고 해버렸죠. 그런데 10년이나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정책 대안 제시와 비정규 현장 연대

문종찬   그러게요. 재임 기간이 점점 늘어나네요. 제 임기도 같이 늘어나면 안 될 텐데요. 시기에 따라, 개인에 따라 다 다를 것 같은데 소장하면서 센터 활동의 초점을 어디에 뒀나요? 

조진원   2000년도에 양대 노총과 30여 시민사회단체가 ‘비정규 노동자 권리 보호와 차별 철폐 공동대책위’를 발족했습니다. 비정규센터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대위의 간사 단체 역할을 했어요. 소장을 비롯해 초기 구성원들이 노동조합 경험이 많았고,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이해도 깊었기 때문에 비중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즉, 노조와 시민단체의 가교역할을 했던 거죠. 비정규 문제가 노동 운동만의 의제가 아니라, 시민들의 의제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많은 일을 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입법 활동이었습니다. 공청회를 통해 비정규법안의 필요성과 내용을 알리고, 노동자 시민들이 서명운동을 통해 입법 청원을 했습니다. 둘째, 가두 캠페인을 통해 시민들에게 비정규직의 실상을 알리고 권익 보호의 필요성을 알리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밖에 노동부 장관 면담 등 행정부의 전향적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아울러 비정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엄호 지원했습니다. 

박승흡   2002년엔 양대 노총, 비정규센터,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모여 최저임금연대를 출범했어요. 해마다 토론회 개최, 최저임금위원회 앞 집회 및 참관 투쟁, 정책 자료집 발간 등 많은 활동을 한 연대조직이었죠. 비정규센터가 실무 조직본부 기능을 맡았고, 소장인 제가 2006년까지 집행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아마 특별히 험한 역할인데 맡겠다고 누구도 나서지를 않아서 그냥 센터가 맡아서 쭈욱 갔던 것이지요. 센터 첫 실태조사는 ‘영종도 건설 일용노동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센터 자체 예산 3천만 원을 들여 실시했죠.

조진원   이어 노조로부터 발주를 받아 한 연구는 ‘금속노조 비정규 노동 실태조사’였습니다. 박영삼 정책국장이 주도했죠. 박준식 한림대 교수가 사회를 보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우 체계적이고 면밀한 실태조사”라며 찬사를 보내더라고요. 사실 노동조합 조사는 골간 조직이 있으니까 설문조사 협조도 잘 되고 해서 행정 비용이 안 들고, 우리가 잘할 수 있잖아요. 초창기 멤버 중에 박영삼 국장의 역할이 어마어마해요. 우리랑 영문 자료를 다 해독하고, 특히 2002년에 《유럽연합의 비정규 고용지침과 주요 국가들의 노동입법 동향》을 출판했는데 노동부에서도 센터가 실력 있는 곳이라는 걸 인정하게 한 책이었어요. 노동부 과장이 최신 자료를 완벽하게 낸 거라며 책을 구하러 우리 사무실까지 찾아오기도 했죠. 책을 보내 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습니다.

김성희   한창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조직화 바람이 불고, 2004년 소장되고 처음 한 일이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투쟁하는 울산에 간 거예요. 그때가 민주노동당이 의원을 다수 배출하면서 센터와 함께 비정규법 대응의 일환으로 ‘정규직 전환의 사회경제적 효과’와 관련된 연구를 발표했죠. 비정규직 조직화 등의 이슈가 새로운 궤도를 타기 시작했지만, 정규직 노조에서 비정규 문제를 많이 다루지 않았어요. 그리고 센터는 2006년 부설기관으로 ‘산업노동정책연구소’를 개소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프로젝트를 노조 당사자들이 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정규직 노조나 민주노동당,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연구했어요. 노동부랑은 계속 싸웠기 때문에 줄 생각도 없었고 별로 받을 생각도 없었죠. 우리가 받은 게 당시에 감시단속 노동자(아파트 경비원) 관련 연구인데 다른 곳에서 하기 힘든 연구였죠. 당시엔 비정규 당사자와 유대가 있는 우리 센터 외엔 비정규 현장 연구를  하기 힘들었습니다. 이종탁 부소장을 비롯해 인원도 대폭 늘었죠. 이때 반상근 포함해서 열세 명이 활동했는데 노동 운동의 정책적 과제 대응과 비정규 현장 연대 두 흐름으로 운영했어요. 연구는 크게 세 축으로 했습니다. 비정규 관련 쟁점 대응, 주요 산업과 노동 연구, 그리고 노동 일반 쟁점 연구였죠. 연대는 각종 노동 사회 이슈 공대위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죠. 비정규법 공대위가 가장 중심이었습니다. 그때 지금 전국대리운전노조 위원장인 김주환의 역할이 컸어요. 2004년에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입법’ 개악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맞서 싸우는 흐름이 형성됐는데 결국 비정규법안이 강행 통과되면서 2007년 7월부터 시행돼버렸죠. 그 과정에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공대위를 결성했고 센터도 연대를 왕성하게 했습니다. 비정규 노동조합 간부들과 조합원 40여 명이 열린우리당 의장실을 일주일 동안 점거 농성하기도 하고 한창 비정규 투쟁이 분출하던 시기였죠. 

이남신   제가 소장을 맡은 2010년은 치열한 현장 투쟁과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 쟁취 투쟁 중심의 비정규 운동 흐름이 한풀 꺾이는 시기였어요.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희망버스,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 진짜사장나와라운동본부, 진짜사장재벌책임공동행동,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등 다양한 형태의 연대 운동이 새롭게 제기됐고, 센터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죠. 수많은 투쟁사업장 연대를 했는데요. 특히 당시 센터는 희망연대노조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투쟁에 전방위로 연대했고, 영등포 지역에서도 지역 단체들과 함께 삼성 자본에 맞선 투쟁을 몇 년간 열심히 했죠. 삼성노동인권지킴이가 센터 사무실에 입주해 함께 활동하기도 했는데요. 무엇보다 삼성 투쟁 관련해선 최종범 열사와 김남수 활동가가 구속될 뻔했던 염호석 열사 투쟁이 잊히질 않네요. 그리고 조돈문 대표님과 정흥준 동지, 남우근 동지, 황선웅 동지 등을 주축으로 비정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대안을 정식화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 과제를 4년 연속 진행하면서 완결지은 건 의미가 크다고 평가해요. 그 이후 센터가 장기간 실천하고 연구하며 정립한 정책 대안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정부위원회에도 참여해 다양한 방도로 애쓴 거죠. 2014년 후원주점 ‘채우고, 나누고, 얼싸안고!’와 2017년 후원주점 ‘만 원이면 참 좋겠다!’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정말 상근자들 모두 헌신하며 의기투합해 좋은 성과를 냈고, 센터 재정 문제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비정규 문제 해법, 토대를 만들다

문종찬   초창기에 비정규직 철폐냐, 차별 철폐냐를 가지고 운동 진영 내에 논쟁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비정규 문제를 풀기 위한 분위기는 어땠나요?

박승흡   초기에 잘한 건 비정규 개념을 잡고, 센터를 세우고, 방향을 정확히 잡았기 때문에 사업에 살을 붙이고 속도를 붙일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비정규 노동자를 법적으로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있을 거다, 해서 지금 대법관인 김선수 변호사를 찾아가서 비정규직 보호 입법안을 센터 안으로 만들고 그걸 공대위(비정규 개악안 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 안으로 확장했죠. 사용사유제한이라고 하는, 근본주의적 입장이 담긴 기본법적인 토대를 센터가 잡고 간 거죠.

조진원   처음에 김선수 변호사가 법률안을 만들 땐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확고한 방향을 제시했어요. 김 변호사가 상시적 업무에 대해서는 정규직 고용을 해야 한다는 ‘사유제한 원칙’을 분명히 했으니까요. 왜냐하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의 본질은 결국 고용 기간에 대한 차별이거든요. 기간 제한이 아니라 사유 제한으로 가야 한다고 처음부터 못을 박은 것이지요. 그게 운동의 원칙이자 방향이잖아요.

김성희   2004년 법안이 나온 게 기간 제한으로 나왔기 때문에 기간 제한과 사유 제한 구도로 계속 간 거죠. 비정규법의 문제는 세부 내용에도 있지만, 설정한 테두리의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기간제 중심의 기간 제한이라는 프레임이죠. 특수고용은 아예 다루지도 않고, 불법 파견이 쟁점인 간접고용 관련 내용을 더 개악시켰죠. 기간제 외에도 더 심각한 불안정 문제가 많은데 의제를 좁혀버렸어요. 그래서 2007년에 비정규법이 통과되면서 센터는 공식 입장으로 간접고용 문제 해법이 비정규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정리하고 제기하기 시작했어요. ‘간접고용(넓은 의미로는 특고도 포괄됨) 해법 없이 비정규 문제 해결 없다’를 슬로건으로 했지요. 비정규법 논란부터 노무현 정부와 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던 흐름이 이어지게 됩니다. 

박승흡   센터가 비정규 문제 해법에 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선도적으로 제기하는 임무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어려워진 센터 살림살이

문종찬   대외적으로는 선구적인 사업과 선도적인 이슈, 그러면서 정부와 각을 세웠네요. 그런 와중에 센터 살림을 살아가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박승흡   제가 가지고 있던 총알은 다 떨어지고, 그 시점에 김성희한테 이제는 회원 중심 단체로서 독립적으로 서라, 하고 나는 〈매일노동뉴스〉로 떠났죠. 그러면서 센터가 고생길에 들어선 거죠.

조진원   초대 소장님도 회원 구조로 가야 된다는 걸 아셨어요. 그걸 하려면 월간지가 필요하다, 서비스를 제공해야 된다. 그래서 《비정규노동》을 만들었던 건데 거기에 비례해서 회원이 늘어나진 않은 거지. 재정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비정규노동》은 격월간이 됐지만, 처음엔 월간이었어요. 여름과 겨울엔 통합본을 냈기 때문에 10회 발행을 했습니다. 보통 7, 8월호엔 경제활동인구부가조사를 분석해서 비정규 관련 통계 자료를 담았죠. 비정규 규모가 국가의 공식 통계로 들어가야 된다고 요구하고, 센터가 중심이 돼서 싸웠어요. 그러면서 2003년부터 양대 노총이 참여하고 의견 반영해서 월간지에 담았던 거죠. 

김성희   경제활동인구부가조사는 2002년에 예비조사를 시작했고, 2003년부터 본조사를 했습니다. 한노사연(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박사도 통계를 냈죠. 한노사연 조사 방침과 우리 방침이 조금 달랐어요. 비정규 규모 총 숫자를 보면 우리 통계치가 정부보다 20%가량 높았죠. 그 규모와 추이를 정기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고 봐요. 초창기에 통 큰 출현으로 시작하다 보니 회원 구조가 약했습니다. 2004년에 회원이 2백여 명이었으니까. 《비정규노동》에도 투자를 많이 했는데 만들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죠. 일 년에 열몇 개씩 프로젝트를 수행하잖아요. 그래도 월급 밀리고 그랬는데, 제가 센터 그만두면 임금을 제대로 못 주더라도 열세 명이나 되는 상근활동가를 계속 이어갈 순 없겠더라고요. 그건 전임자가 해결해주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산업노동정책연구소가 따로 나가는 걸로 정리했고, 딱 필요한 인원만큼으로 해서 초기 모델로 돌아가자고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남신   김성희 소장님 때 상근자가 가장 많았죠. 또 제가 소장 이어받았을 때 난감했던 게 급여가 높았던 거야. 승흡이 형이 동종업계 최고 수준으로 급여 수준을 책정했대요. 

박승흡   그게 아니라 차비 받아 가는 수준으로 센터를 운영할 거면 아예 안 한다고 그랬지. 활동가로서 최소 생계를 책임져 주고, 정규직 노조 채용직 수준의 대우를 기본으로 센터를 운영한다는 입장이었고, 그대로 집행했지.

이남신   저는 선배 소장님들 같은 기획력이 없었기 때문에 비정규센터를 복구하는 게 목표였어요. 먼저 직책, 직급, 근속 상관없이 임금을 백만 원으로 다 확 깎아버렸죠. 체불임금이 1억 6천이라 어떻게든 매듭지어야 할 상황에서 조돈문 대표님이 대출을 받아 센터에 2천만 원을 빌려주셨고요. 퇴직한 상근자들 다 만나서 해결하는데 1년 걸렸어요. 1년 동안 대표님과 마음고생 많이 했어요. 그리고 새 출발해야 되는데 그때는 기부금 등록단체도 아닌 데다 하드웨어도 많이 무너져있었어요. 먼저 기부금 등록단체 지정받으려고 노동부 앞에서 1인 시위도 했죠. 지정받기까지 1~2년 걸렸습니다. 제가 왔을 때 회원 정리를 다 다시 했어요. 회원 숫자는 거의 6~700명인데 회비 내는 회원은 150명밖에 안 되는 거야. 살림살이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회원 확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지인부터 투쟁하는 동지들, 정규직 동지들한테 받고 해서 조금씩 늘렸어요. 그러면서 나중엔 상근자 수가 네다섯 명이 된 거죠. 

운동의 원칙은 지킨다

문종찬   우리 센터가 비정규 문제에 있어서는 선도적이고 선구적인 역할을 시작하고, 현장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시민사회진영과 폭넓게 연대 운동을 조직한 활동에 대해 말씀 잘 들었는데요.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아주 특징적인 일로 한비네(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와 같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도 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을 한번 짚어보도록 하죠.

이남신   저는 정규직 노동자로 비정규 투쟁을 하다 센터로 왔잖아요.그래서 내가 할 일은 현장 연대라고 생각했어요. 2010년 10주년 토론회를 준비하는데 비정규 관련한 주요 당사자 실태조사나 이런저런 논쟁들은 이미 다 해서 할 게 없더라고요. 그때누군가가 지역에 비정규센터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당시만 해도 전 잘 몰랐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허접한 수준의 설문지를 만들어서 실태조사를 했어요. 의외로 반향이 있어서열일곱 곳의 센터에서 답을 했죠. 사실 조사 결과를 부끄럽게내놨는데 단병호 위원장님이 인상 깊게 잘 들었다면서 어떻게이런 걸 할 생각을 했냐고 하는 거예요. 정규직 양대 노총 동지들도 지역비정규센터 실태를 잘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나니 일회성으로 끝내기 아쉬운 거야. 지역에서 고생고생하고있는데 오갈 데도 없으니까 동병상련으로 모이자 해서 처음엔 지비네(지역비정규노동단체네트워크)로 출발했죠. 그러다 2012년 한비네를 출범했습니다. 사실 전 네트워크 사업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요. 투쟁하는 동지들이 대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장 연대에만 중심을 뒀거든요. 그런데 모여서 함께하다 보니 네트워크 사업 비중이 커버린 거죠. 그리고 민간 노동단체뿐만 아니라 지자체 지원센터들이 연달아 생기면서 뜻하지 않게 커졌고, 우리 센터가 주력하는 하나의 사업으로 됐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울노동권익센터를 수탁받으면서 더 그랬죠. 그것도 문종찬 동지가 애를 많이 썼는데 운동 진영 내부에 날카로운 논쟁이 있잖아요. 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토론을 거치면서 지자체 지원을 받는 센터, 공적 예산으로 비정규 문제를 개선하고 해결하는 쪽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서울감정노동센터도 수탁받게 된 거죠. 게다가 지역 비정규 운동 센터가 모인 한비네, 서울지역 노동인권 단체들이 모인 서로넷(서울노동인권복지네트워크)에서 우리 센터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생각해보면 뜻하지 않게 이렇게 흘러온 거예요. 

조진원   운동권은 항상 스펙트럼이 다양하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분파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누가 뭐래도 우리가 운동의 원칙을 가지고 가면 된다는 것이지요. 대중 조직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가 파당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진정성은 다 느끼는 것 같아요.

박승흡   저도 노동 운동 정치조직에서 활동을 하고 화이트칼라 노조인 전교조를 건설하면서 해직을 경험했기에 끊임없이 운동적 삶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요. 정파보다는 실사구시로 운동에 기여하는 방법을 계속 모색하다가 비정규센터를 구상하게 된 것이지요. 운동가로서의 삶을 고민하면서 1998년 교단으로 돌아갈 것인지 비정규 운동의 깃발을 들 것인지···. 불면의 밤을 많이 새웠고 중요한 결단을 내린 거예요.

김성희   여러 가지를 다했는데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요. 다른 데서 못 푸는 문제에 대해서 집요하게 제시해주고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직접 조직화는 안 했어요. 정파도 아니에요. 그렇다 보니 외롭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한,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죠. 그 과정에서 저는 정규직 노조를 비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정규직 노조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 거였고, 노동 운동이 지각변동을 해야 할 과제인 것이지 정규직 노조가 어떻다 해서 풀리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건 옹호가 아니라 더 큰 의미의 비판이죠. 정규직 노조가 판을 주도해서 변화시킬 주역이 아니라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비정규 노조가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정규직 노조의 지원이나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죠. 자생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연대의 과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당시 민주노총에서 노동자끼리 무슨 연대냐 단결이지 라고 해서 같은 노동자가 아니다, 연대라도 잘하자고 답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남신   미조직 비정규 노동이 광범위하다 보니 노동조합 운동으로 안 되는 것도 있잖아요. 그러면 노조 조직률 30% 될 때까지 기다리자? 그건 너무 무책임한 거죠. 그런 측면에서 네트워크 활동은 우리 센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정파도 아니고 노조 당사자 조직도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폭넓게 현장 당사자와 정책 연구자와 심지어는 지자체 자원까지 끌어올 수 있는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20년 동안 비정규 의제와 관련해서 국면마다 주요 과제도 비껴가지 않았다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촛불항쟁 이후의 열린 정치적 공간, 논란이 굉장히 많았잖아요. 얼마만큼 개입할 거냐 말 거냐 가지고. 그런데 비정규센터였으니까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최저임금위원회, 일자리위원회, 정규직화 심의위원회 등에 들어간 거죠. 양대 노총 추천받아 들어가는 데는 우리밖에 없어요. 욕을 하기도 하지만 비정규센터가 아니면 누가 해, 이런 거에 대해서는 일종의 동의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우리 센터의 역할, 몫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뭘 할 때마다 우리 센터는 마지노선이 있는 운동단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울타리를 넘어 경계를 허물어야

문종찬   노동시장이 극단적으로 분절화되고 불평등과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는데요. 이 문제가 기존 노동조합 때문은 아니겠죠. 그렇지만 기존 노동조합 역할이 미흡하지 않냐는 비판은 있어 왔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떤 경험과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박승흡   저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관련해서 정규직을 공격하는 건 아닌데, 노동 운동이 공장(기업) 내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합니다. 울타리를 넘어서 그 경계를 허물어야 합니다. 단일기업 내에서는 비정규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인데, 조직론적으로는 산별노조가 제대로 해서 정규직,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실업자들을 다 포괄하면 끝나는 문제지요. 우리 센터도 초기에 사실 조직화 욕심도 있었거든요. 전국에 지부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매일노동뉴스〉를 맡게 되면서 일이 중첩되다 보니 그 길로 가지 못했죠. 대신 지역일반노조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지요. 여러 다른 나라 조직화 사례도 소개하면서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 모델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에요. 그 고민의 연장선에서 당시 김주환 센터 사무국장과 함께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 운동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조직론을 2002년도 《비정규노동》에 발표했습니다.

김성희   정규직 노조 관련해서는 비판할 필요가 없어요. 비정규센터 존재 자체가 정규직 노조에겐 비판적으로 보이고, 기성노조가 못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이남신   우리 슬로건이 ‘낮은 곳을 향한 연대’잖아요. 우리가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센터가 가진 장점과 특징이 뭘까, 하고 생각했을 때 저는 실사구시에 있다고 봐요. 센터 운동을 제 맘대로 명명한다면 ‘비정규 운동 실학파’로 표현하는데요. 비정규 문제는 활동가들의 전유물로 남을 게 아니라, 정말 어려운 사람들의 문제가 조금이라도 개선되고 해결되는 방향으로 가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당사자 눈높이에서 활동하는 단체가 우리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양대 노총에 대한 쓴소리는 그것대로 했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노동조합 바깥의 대다수 사회적 약자로 차별과 불이익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 문제를 실제로 개선하기 위해 힘써왔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 문제의 심장은 비정규 문제

문종찬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그런데 비정규센터는 닥친 상황과 시대와 정세에 해야 할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그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는데 지금 시점에서 우리 센터가 마다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은 뭘까요?

조진원   초창기 문제의식과 지금까지 센터가 왔던 가치를 관통해서 얘기하면, 비정규 철폐하고 권리를 보호하는데 노동조합의 태도와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부분에 우리가 초점을 맞춘 거고. 또 하나는 연장선일 수 있는데 연구를 통해서 운동의 방향과 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해명해 나간 거잖아요. 우리가 열심히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는 노동 운동이 아닌 시민 운동으로서의 비정규 철폐 성격이 있기 때문에 노동단체들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와 연대성을 강화하는 게 필요하죠. 단지 노동 운동만의 의제가 아니라는 것, 즉 시민 운동으로까지 확장시켜야 된다는 세 가지 점에 출발점이 있었다고 봐요. 그리고 최선을 다해 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성희   비정규 투쟁 연대와 비정규 정책 연대 양 축으로 움직이는데, 이 자체가 노동 운동의 미래, 불평등한 한국 사회를 바꾸는 데에 의미를 함축하고 있죠. 물론 비정규 문제의 전 사회적 의제와 접맥되고 또 부설 산업노동정책연구소의 역할로 인해 노동 전반적 쟁점에 사회 연대와 정책 연구가 이루어집니다. 비정규 문제로 바라본 한국 사회 전망을 내세우는 역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의미를 어떻게 더 잘 살려 나갈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비정규 문제는 이슈화됐고, 이젠 모두가 다 거론할 수 있는 상황이 됐어요. 비정규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전망을 세우는 데 있어서 연결고리를 더 많이 찾아내고 확장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틀을 어떻게 세워나갈까 하는 게 센터의 고민이고, 센터를 거쳐 간 사람들이 천착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고, 이를 어떻게 엮어내야 하는가가 지금 센터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봅니다.

이남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 노동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변방에 있거나 바깥으로 배제되어 있어서 누구도 주목하지 못하거나 문제 개선에 엄두를 내지 못한 당사자 눈높이에서 자기 몫을, 일정하게 한계가 있었더라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하고요. 무엇보다도 정파를 비롯한 노동 운동 내에 바람직하지 못한 이런저런 경향에서 좀 자유롭게 자기 몫을 하는, 일종의 노동 운동 내의 소수자 이해 대변을 가장 잘한 단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단순히 당사자 문제에만 천착한 게 아니라 정책 대안을 내며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접목하면서 운동의 바른 방향도 놓치지 않았지만, 한 축으로는 실질적인 문제 개선과 관련해서 합리적 대안을 끊임없이 모색해왔던 역할을 잘해온 20년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박승흡   저는 우리 센터가 20년 활동해오면서 비정규 문제를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사회적 핵심 의제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젠다라고 하는 건 무엇인가. 공동의 실천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서 보다 나은 사회로, 좀 더 잘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로 나아가는 것까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20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은 경제의 하위 범주입니다. 지금까지 민주정부 세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습니다만 관료들은 아직도 노동 문제를 비용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고 정책의 주요 흐름도 거기에 맞춰 있단 말이에요. 비정규 문제는 경제사회 정책과 연동돼있기 때문에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뭐가 달라졌냐는 거죠. 문재인 정부에서도 과연 무엇이 바뀌었고 나아졌어요? 청년 비정규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노동 정책 방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봅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최저임금 인상, 52시간제로 속도를 냈고, 그 이후로는 방향과 속도 모두 잃어버린 상황이죠. 촛불혁명 정부라고 하면서 정작 비정규 문제를 포함해서 먹고 살아가는 여러 중요 담론이 모두 상실돼 버린 시대를 우리가 맞이하고 있어요. 부동산 폭등만 보더라도 국민의힘 지지자들의 자산소득을 어마어마하게 불려주고 있지요. 보수집권 시절에도 경험하지 못해 본 자산 인플레이션을 문재인 정부가 깔끔하게 해결해주고 있잖아요. 5~6억 하던 아파트가 24억을 훌쩍 넘겼으니. 촛불혁명의 결과가 보수층의 자산소득을 이렇게 불렸으니 이런 아이러니와 역설이 또 어디 있습니까. 노동자, 비정규직 포함 자산 양극화의 밑바닥에 놓인 수백만 노동자의 고통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 반동의 상황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사회가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다시 의제 확장과 담론 투쟁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여러 문제 중에서도 심장에 해당하는 문제가 비정규 노동 문제라 판단해요. 심장을 뛰게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심정지 상태로 가는 걸 놔둘 수는 없습니다. 비정규센터를 매개로 동지들이 다시 싸움을 시작해 나가야 한다, 깊고 넓은 투쟁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비정규 담론 제시하는 센터로

문종찬   일단, 코로나라는 초유의 사태가 우리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다 드러내고 있죠. 현실은 하나도 안 바뀌었고,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더 안 좋아졌거든요. 담론 투쟁이 필요하다는 고민에 공감해요. 이른바 포스트 코로나, 뉴 노멀 얘기 많이 하는데 우리가 20년 전에 비정규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하고 이슈를 만들고 담론 투쟁을 했다면 20년이 지난 2020년에는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갈 거냐. 20년 전에 던졌던 그 마음가짐으로 다시 던져야 하는 거 아니냐. 근데 그게 뭐냐. 그런 고민 속에서 노동기본권 개념, 사각지대 문제를 드러내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최근 몇 년을 복귀해보면 거버넌스라고 하는 정부 참여를 비정규센터가 많이 한 거예요. 정부위원회 참여뿐만 아니라 서울노동권익센터, 서울감정노동센터 위탁 운영을 통해 서울시 행정에 결합해본 거죠. 담론, 의제 투쟁, 현장 투쟁 외에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죠. 지역에서 계속 생기는 센터들과도 협력하고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 부분이 우리에게 부여됐는데요. 고민이 많습니다. 그리고 연대의 문제인데요. 시민사회운동으로서 노동조합, 비정규 당사자들과 노동 의제를 어떻게 연대할 것이냐에요. 보완하거나 첨언해주실 말씀 부탁합니다.  

조진원   부분적으로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시키고, 지방자치단체에서 특히, 서울시 같은 경우 8천 명 가까이 정규직화 시켜서 진전도 있었죠.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 사회 변동이 너무 빠르고, 그 근저에 통신 등 급격한 기술 변동이 놓여 있잖아요. 구체적으로 플랫폼 노동자들이 증가하는 문제는 사실은 정규직 지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는 거고,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사각지대가 증가한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기술 변동이 사회 변동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착목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고,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연구가 계속 가속화될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을 입법이든 제도든 어떻게 할 건지 계속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운동이 활성화되는 속에서 훌륭한 활동가들이 나와요. 투쟁 경험에서 나오는 거죠. 사람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리더십을 갖추고···. 그런데 초기엔 경험을 통해서 리더십이 갖춰질 수 있을지 몰라도 교육 훈련이 되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봐요. 정규직이기 때문에 총연맹 위원장이 가능하고 비정규직이어서 불가능하다고 얘기할 수 없죠. 비정규 활동가들에게 제한된 범위 내의 경험은 첫 출발일 수는 있지만, 그게 리더십을 영원히 담보해주는 내용은 아니에요. 센터도 연대 활동을 넘어서 비정규 활동가들의 교육 훈련을 통해 그들이 운동가로서, 운동의 리더로서 성장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배출되는 비정규 노동자를 활동가로 전환시키고 리더로 성장시키는데 우리가 리더십 교육과 훈련에 착목하고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는 거죠. 

김성희   플랫폼 노동이 비슷한 얘기만 계속하고 있어요. 노동이 아니라 플랫폼 경제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플랫폼 기업이 어떻게 수익을 갖고 가는지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해야 노동의 전체 그림이 그려지는데, 플랫폼 노동의 현상, 형태만 너무 서술적으로 많이 다뤄지고 있거든요. 이런 것처럼 의제를 스스로 설정할 능력이 없고 주어진 의제에 세부적인 답을 주는데 머물러 있는, 담론이든 의제든 미래 전략이든 설정을 스스로 못해나가고 있는 게 역할을 잘못하고 있는 거죠. 

문종찬   기술의 변화도 있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은 산업 변화, 일자리에도 영향이 클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대응을 준비해야겠죠. 노동자 당사자들을 활동가로 키울 수도 있지만, 서울만 해도 자치구 센터가 25개 생기면 상근자만 해도 100명이에요. 서울노동권익센터, 서울감정노동센터, 전태일 기념관 다 합치면 160명이에요. 전국으로 하면 더 많거든요. 굉장히 훌륭한 자원인 거예요. 그중에 노동조합 활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손에 꼽아요. 이들의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교육 사업에 대한 고민도 상당히 있긴 하죠.

이남신   깊이 있는 고민은 아니지만, 우리도 대안사회를 진짜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 제가 듣기로는 빌 게이츠마저도 불평등 문제, 기후 변화 문제는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사회주의가 대안이다, 라고 할 정도로. 주류를 대표하는 자본가도 불평등 문제나 기후 변화 문제는 자본의 탐욕때문에 해결되지 못한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판국에 우리는 왜 이렇게 더딜까 하는 생각이 한편으론 들어요. 그런 점에서 양대 노총이 제 몫을 하길 원하지만, 기대치에 미치기 쉽지 않죠. 비정규 운동마저도 20년 전 연대가 충만했던 분위기에 비하면 사뭇 달라요. 살가움이 없어요. 비정규 노조 규모는 많이 커졌는데 연대 강도는 예전 같지 않아서 일장일단이 있는 거죠. 그러면 우리 센터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심장 뛰게 하는, 그게 의제 수준이든 대안 체제 수준이 됐든 담론을 누가 던져야 하는데 비정규센터가 적임자가 아닌가. 촛불항쟁으로 불의한 권력자를 끌어내리긴 했지만 불평등 문제, 노동 문제에는 천착하지 못한 한계가 있잖아요. 비정규 문제를 핵심매개로 하는 대안사회의 상을 만들고, 센터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각지대 해소 운동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민주노총을 견인하고 한국노총도 따라오게 해야 된다. 비정규센터가 오히려 스피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낮게 포복했다면 지금은 허리를 펴고 외쳐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문종찬   역대 소장 좌담을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언론사 초청 좌담회도 아닌데 네 사람이 한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얘기하더라고요. 비정규센터에 대한 애정으로 시간 내주시고 좋은 말씀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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