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을 파괴하는 일터
최혜인 (직장갑질 119 노무사)
정책칼럼을 요청받은 지 몇 달이 지났다. 아무리 바빠도 데드라인을 어기는 일은 거의 없지만 정책칼럼을 시작할 엄두가 나질 않았었다. 수차례 데드라인이 지났다며 독촉전화를 했던 비정규센터 활동가가 직접 주제까지 지정해줬지만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는 멘탈이었다. 올해 유난히 노동법 개정이 많았고 장기투쟁이 마무리된 사업장들도 있고 사회적대화가 시작되는 등 노동이슈가 끊이질 않지만 내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2018년 내내 일 하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아직까지 읽어본 대법원 판결문이 몇 개 되진 않지만, 일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보여준 판례가 하나 있다.
사용자가 근로자를 해고할 만한 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오로지 근로자를 사업장에서 몰아내려는 의도로 고의로 해고하거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징계해고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인데도 징계해고를 한다면 불법행위가 성립된다. 근로자는 근로제공을 통해 참다운 인격의 발전을 도모하여 자신의 인격을 실현시킬 수 있고, 사용자는 이를 배려해야 할 신의칙상 의무를 부담한다. 따라서 사용자가 고의, 과실로 근로자를 부당하게 해고한다면 근로자의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는 것이라 근로자가 입게 되는 정신적 고통에 대해 배상할 의무가 있다. (대법원 92다43586 판결 1993.10.12. 선고)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를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근로라는 행위는 ‘밥벌이’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특정 직업을 떠올리는 것처럼, 일은 밥벌이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정당한 이유 없이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 부당해고를 당한 경우 노동위원회를 통해 구제할 수 있는 절차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근로자를 부당해고 한 사용자를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 2007년 근로기준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근로자를 부당하게 해고한 사용자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이 있었다.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꽤 강력한 처벌 규정이었다. 해고가 살인이라는 말처럼 해고는 근로자의 생존권을 직접 위협하기 때문에 부당해고를 한 사용자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취지였다. 그러나 해고의 본질은 민사분쟁이고, 근로자를 해고할 때 마다 사용자가 형사처벌을 각오하게 하는 것이 너무 과도하다는 비판과 함께 2007년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처벌규정은 삭제됐다.
종종 상담을 하다보면 부당해고 구제신청 절차를 문의하는 게 아니라, 부당해고를 한 사용자가 받게 될 불이익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구체적인 사정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해고 자체의 부당성을 다투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을 해고 한 회사가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질문인 것 같았다. 있던 법이 없어진 만큼 부당해고를 형사처벌로 규율하는 것은 어려워졌지만, 판례가 말하는 것처럼 일부러 근로자를 쫓아낸 사용자는 근로자가 받은 정신적 고통에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가 근로자의 인격권이 침해됐기 때문이라는 판례의 논리가 참 멋졌다. 그만큼 일은 밥벌이 이상의 인격 실현의 수단이고, 일터는 그것을 실현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쌍용차노조 조합원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궁금했던 건 당신들에게 일이 어떤 의미길래, 10년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는지였다. 그리고 2009년 옥쇄투쟁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겁쟁이라 회색빛 영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미소 띤 얼굴로 그 날을 추억하는 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토해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맣게 무장한 경찰특공대와 용역깡패가 늘어나는 걸 보면서 특유의 직감으로 구리스를 잔뜩 모았다. 구리스를 지붕 곳곳에 뿌려 경찰특공대와 용역들이 미끄러지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경찰특공대는 전투화를 갖춰 신었기 때문에 단번에 미끄러지진 않았지만 구리스가 잔뜩 묻고부터는 꼼짝없이 미끄러졌다. 옥상에 올라가 있던 쌍용차 조합원 백 명 남짓은 쪽수만 봐도 불리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싸웠을 것이다. 그렇게 상대편 한명을 포로(?)로 잡았고, 포로와 교환할 대상으로 고작 담배 한 갑을 요구했다. 포로와 맞바꾼 담배 한 갑. 20개비를 백여명의 조합원이 한 모금씩 나눠 폈다. 일의 의미가 궁금해 던진 질문이었는데, 일을 되찾기 위한 전쟁 같던 싸움의 한복판이 다시 삶으로 귀결됐다. 담배를 사기위해 오물을 뒤집어쓰고 기어서 매점에 다녀온 이야기, 햄이 들었던 주먹밥이 맨밥으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끊겨 굶었던 이야기들. 대화 중에 자꾸만 “더 웃겼던 건 뭐냐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의아해, 정말 웃긴 이야기로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니었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 당시 일을 진술하려고 했으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서 한참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도 인사권을 쥔 사용자가 해고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근로자를 해고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반복적으로 최하점의 인사평가를 주거나 계약기간을 설정하거나 업무에서 배제하거나 꼬투리를 잡아 징계해고를 하거나 등등등. 마음만 먹는다면 근로자를 해고하는 것쯤이야 사용자가 가진 권력으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은 곧 밥벌이고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지만, 일터에서 일의 의미는 쉽게 좌절된다. 그나마 부당해고라면 괘씸한 사용자를 처벌할 순 없더라도, 노동위원회 제도를 통해 구제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법적으로 별 문제 없는 부당한 해고들도 너무나 많다. 쌍용차 정리해고가 그랬고, 상담을 요청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다.
일은 자신의 창조성을 발현할 수 있는 수단이고 자아실현의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대할 때 기계적이거나 계산적인 것을 넘어, 그 이상의 헌신과 애정을 투여한다. 그렇지만 일과 자아실현을 겹쳐서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사방에서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고용형태를 불문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근로자를 일터에서 쫓아내는 것도 그렇다. 노동시장은 유동적이다 못해 흐물흐물해지는 것만 같다. 이런 불확실성은 일터를 더욱 비인간적인 곳으로 만든다. 장기적인 미래를 구상할 수 없는 곳에선 성장은 불가능해지고 경쟁만 남게 된다. 상사와 부하직원, 동료 관계의 인간성은 약화되고 오로지 본인만 신뢰하고 본인을 위해서만 헌신한다. 장기적 미래가 없으니 방향성도 없고, 많은 순간마다 일관성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 흐물흐물한 노동시장에서 근로자들은 더 쉽게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이 되어 가고 있다.
인간성이라는 건 지속가능한 감정들로 형성되는 것이다. 법전만큼 딱딱하기만 한 판례가 인격권을 언급하며 누가 봐도 부당한 해고를 당한 근로자에게는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던 것도 일에는 인간성이 담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선망하던 회사에 취업하는 것, 그 곳에서 존경할만한 선배를 만나는 것들이 인간성을 형성한다. 인간은 장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흐물흐물한 일터는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으니 장기적인 건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인간성은 억압되거나 파괴된다.
어디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근로자를 쉽게 해고하는 사장을 처벌해야 하는지,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해야 하는지, 싸워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여러 고민들이 머릿속에 맴돌다 불안정한 운명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떠올랐다. 그리고 옥상 위의 쌍용차 노조 조합원들은 인간성을 실현하던 자신의 일터를 지켜야 하는 운명공동체였기 때문에 아픈 싸움을 멈출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 공동체는, 모임이나 스터디라는 형태의 소비시장이 되어버리고 있기도 하다. 비싼 돈을 내야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조차 돈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나 향유할 수 있는 상류문화처럼 여겨진다. 결국 삶터에 기반을 둔 지역 공동체가 답인가 싶어, 집에나 일찍 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