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박재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연구위원)
연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중국 우한지역에서 처음 출발했던 신종 코로나19 감염 사태는 일부 국가의, 아시아만의 문제처럼 비추어졌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해 12월 31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을 중심으로 정체불명의 폐렴이 발생했다고 보고한 지 100일이 지난 지금(4월 9일 현재) 전 세계 확진자는 150만 명을 넘어가고 있다. 사망자도 9만여 명이 넘어가면서 빠른 감염 전파뿐 아니라 사망률도 높아지면서 유례없는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에 전 세계가 패닉에 빠졌다. 이제 세계 어디에도 코로나19 감염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다. 심지어 언제 종식될지도 가늠하기조차 어려워 ‘인류 최대의 재앙’, ‘제2의 스페인 독감이나 흑사병’이라 비유되고 있다.
현재 세계 각국은 확산을 억제할 최선의 수단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인구 이동을 제한하는 강력한 봉쇄조치를 취하고 있다. 근본적인 치료 백신 개발은 최소 몇 개월이 걸린다고 하니 현재로서는 감염 확산을 억제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다. 외신 보도를 보면 각국의 봉쇄조치 때문에 전 세계 인구 3분의 1 이상이 이동 제한조치 아래에 놓여 있으며, 유네스코는 전 세계 학생들 가운데 91.3%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아온 계층들이다. 미국 사망자의 70%가 흑인이라는 통계는 미국 사회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이는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회적으로 고용·교육·의료·주거환경 등 전반에 걸쳐 차별받아온 소외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점은 공통된 상황인 듯하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대구 신천지 집단 감염으로 시작된 지역 감염 확산에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감염 예방 지침에도 불구하고 제2의 집단 감염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콜센터에서 생겨났다. 콜센터는 대부분 외주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노동자 사이의 간격이 매우 비좁고 통화를 통한 업무 방식 특성상 충분히 집단 감염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원청이나 위탁업체 차원의 간격 조정이나 칸막이, 마스크 착용 등의 사전 예방조치는 업무 실적에 막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감염 확산 이후 콜센터에 대한 대책과 개선방안이 정부 차원에서 점검되고 권고되고 있으나 여전히 근본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지난 3월 말 희망연대노동조합이 조사한 CJ대한통운·CJ오쇼핑·LG헬로비전 콜센터 업무를 위탁받아 담당하고 있는 CJ텔레닉스 콜센터 노동자들의 코로나19 대응 지침 준수 여부 결과를 보면 제대로 된 대책이 시행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조가 발표한 ‘CJ텔레닉스 코로나19 대책 긴급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칸막이나 가림막을 설치한 곳은 12.1%, 간격 조정은 19.4%에 불과했다. 연차·병가·조퇴·반차 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공지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도 32.4%뿐이었다. 의심 증상이 나타나면 자가격리 및 검진을 위해 자유롭게 연차·병가를 써야 하지만, 여전히 임금과 연동된 실적 압박과 전날 오후에나 확인되는 스케줄 배정 등의 운영 행태는 해당 노동자의 건강권이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지 보여준다.
콜센터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역 감염 확산 초기 케이블방송통신 외주업체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노조 차원에서 개인 마스크와 손 소독제 지급, 긴급 사안이 아닌 이상 대면접촉 업무 축소 등을 요청했지만 사측은 비용 문제와 매출 실적과 연동된 문제라며 거부했다. 결국 감염자가 발생하고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자 뒤늦게 부랴부랴 대책 방안을 내놓았을 뿐이다. 사전예방 개념은 외주화된 노동자들에게는 예외였다. 이뿐이랴. 회사 차원의 마스크나 손 소독제 지급, 재택근무 전환, 의심 증상 자가격리 사용이 가능한 일부 기업의 정규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비정규직,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감염 예방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에게 감염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생계를 잃는 해고와 다름없다. 최근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한 노동·시민사회의 제언’을 통해 질병과 생계 위기 국면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경제적인 취약계층에 대한 정책 수립을 정부에 요구한 것은 매우 필요하고 적절한 대응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러한 요구를 정책 방향으로 채택하고 실질적인 대책을 시행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19 감염 사태가 해결된 이후 우리 사회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세계 각국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연적으로 사회경제적 활동의 제약을 수반하며 결국 세계 경제는 금융위기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세계 각국은 대규모 재정 투자(현금 지급 등)를 통한 고용과 사회정책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나 코로나19 종식 이후 경제 위기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소외계층과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통은 감염의 공포보다 더욱 클 것이다. 모두가 예상하듯 기업들은 경제 위기를 빌미로 법인세 인하 등 기업 살리기 규제 완화 정책을 요구하면서 노동자들에게는 고통 분담 논리를 다시 끄집어내 희생을 강요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 예상되는 경제 위기 국면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코로나19 이후 경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 구축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경제적 취약계층과 노동자 서민을 위한 새로운 사회경제 시스템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이전 사회로의 회귀가 아니라 노동자 서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상상력과 구상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