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노동뉴스 정기 칼럼]
박근혜 대통령 공약대로라면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2015. 12. 10)
▲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
공안 정국이다. 동토의 겨울공화국. 분단과 독재의 악조건을 헤치고 개발도상국으로 출발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를 동반 달성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South Korea'의 오늘이 위태롭고 숨 가쁘다. 모두가 눈 부릅뜬 채 상대만 주시하고 있다. 여유를 찾기 어려운 불통과 적대의 나라에서 대화와 교섭은 발붙이기조차 어렵다. 대통령은 야당을 발밑으로 여기고 집권여당 대표는 연일 노동자들의 대표조직에 대해 힐난과 성토를 멈추지 않는다. 조계사로 몸을 옮겨 정부 노동개악에 맞서 싸우고 있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사면초가 처지가 2천만 노동자들의 신세와 꼭 닮았다. 출구가 꽉 막힌 암울한 정세다.
이 난국에 퍼뜩 떠오르는 공약이 있다.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내세운 대표적인 비정규직 공약인 ‘공공부문 상시 지속 업무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화’다. 그것도 이제 며칠 안 남은 2015년까지 완료하겠다고 했다.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라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당시 경쟁자였던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2017년까지 정규직화 완료 시한을 제시했다. 그뿐 아니다. 박근혜 후보의 공약집에는 ‘정리해고 요건 강화’도 들어 있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를 선점한 박근혜 후보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및 정리해고 요건 강화 공약까지 제시하면서 유권자들의 표심을 공략해 당선됐다.
박근혜 대통령 공약대로라면 지금의 정부와 민주노총 간 대치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노동개혁을 둘러싼 공방은 뜬금없다. 비정규직을 파격적인 로드맵으로 정규직화하고 정리해고 요건을 강화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대통령이 왜 저성과자 해고와 불이익한 경우에도 취업규칙 일방 변경, 기간제 기간 4년으로 연장, 파견 확대 등 공약 취지와 반대되는 내용을 관철시키려고 이렇게까지 혈안이 돼 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약속 지키는 정치인이란 이미지로 국민적 신뢰를 얻은 박근혜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렇다.
정규직 과보호가 최우선 선결 과제가 아니라 천문학적 규모의 사내유보금을 쌓아 둔 재벌대기업이 고용과 투자를 확대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먼저 선행돼야 할 숙제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해 중앙정부가 가장 먼저 마련해야 하는 정책 대안은 비정규직 규모를 줄이고 차별을 해소하는 방안이다. 우리나라에선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입구 방식, 즉 최초 취업단계에서부터 상시 지속 업무는 정규직화하는 것과 더불어 차별시정의 대원칙인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법제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원청사업주 사용자성 인정 및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성 인정까지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정책대안이 긴요하다.
이는 이미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법 제·개정에 앞서 권고했던 내용이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아 지금의 비정규직 양산 노동시장이 만들어졌다. 박근혜 정부도 노무현 정부를 닮고 싶은가. 이전 정부가 지겹게 반복해 온 실패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면 이제라도 돌이켜야 한다. 대통령이 앞장서 문재인 대표도 만나고 한상균 위원장도 만나야 한다. 쟁점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치열한 만큼 비정규직과 청년·여성 노동자들의 의견도 두루 청해 들어야 한다. 교집합을 중심으로 끈기 있게 이견을 모아야 한다. 그게 진짜 정치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의 노동공약으로 보면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는 노동개혁은 심각한 엇박자다. 자신의 공약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준법을 강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는 위정자인 만큼 더 이상 물리력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합리적 공론의 장을 만들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 마땅하다. 국민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다. 공약집도 다시 들춰 보면서 정상적인 정부와 대통령으로 되돌아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