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 12. 30 매일노동뉴스 연재
노동자 글쓰기가 진짜 혁명이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비정규노동자, 치유를 위한 글쓰기’. 올해 아름다운 재단의 ‘변화의 시나리오’ 지원사업으로 선정돼 한 해 동안 진행된 한국비정규노동센터(비정규센터)의 글쓰기 사업 프로젝트명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의 기록과 치유를 위한 이 글쓰기 프로그램의 이름은 바로 ‘쉼표 하나’다. 물음표와 느낌표가 난무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희생양인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가장 절박하게 요구되는 건 바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쉼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세계 최장 노동시간에 허덕이며 쉴 틈 없이 노동을 착취당하는 일상을 돌아보면 쉼표가 갖는 문제의식이 더 쉽게 다가온다. 그런데 단순한 휴식을 넘어 진정한 쉼이란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그 쉼의 매개로 글쓰기를 주목했다. 삶의 기록과 자기 치유를 위한 과정이면서 상처받고 지친 일상에 옹달샘 같은 신선한 쉼을 가져다주는 글쓰기. 그 매력 있는 글쓰기에 비정규 노동자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비정규노동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차별과 불평등·빈곤 문제의 가장 첨예한 상징이다. 그러나 비정규 노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는 비정규 당사자 관점에서는 여전히 미진한 편이다. 노동유연화와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기업의 목소리가 주도적인 데다가 노동운동의 경우도 비정규직의 조직률이 낮고 계급대표성에서도 상당한 한계를 보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부 비정규노조를 제외하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문제의 본질에 구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매몰되고 잊히기 쉬웠던 비정규노동자들이 현실의 삶에서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들은 다시금 환기될 필요가 있다. 당사자운동과 직접민주주의가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는 지금이 비정규 노동자들이 직접 자신의 체험과 사회적 고통에 대해 증언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비정규센터는 지난 10여년 동안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애써 왔다. 비정규노동 포털사이트인 ‘워킹보이스’를 운영하고 지금은 격월간으로 전환돼 발행하고 있는 ‘비정규노동’을 펴내면서 비정규 현장을 취재하고 당사자 인터뷰와 기고를 받아 왔다. 그런데 차별과 권리침해의 실태, 치열하고 절박한 투쟁과정과 문제들을 중심으로 드러내다 보니 비정규 노동자들의 총체적 삶에 바탕한 웅숭깊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는 늘 한계를 느껴왔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이 오롯이 묻어나는 글쓰기를 위해 비정규센터는 2006년 ‘비정규직 노동자 가족 생활수기 공모전’을 공동주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비정규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주로 활동가나 기자들, 전문가들에 의해 대변돼 온 감이 있다. 하지만 이랜드 파업 당시 비정규 여성 조합원들이 월드컵 농성장에서 쓴 편지들, 이제 한글을 갓 뗀 청소노동자들이 서툴게 적어 내려간 노트, 인터넷 카페에 올라오는 수다들을 보면 이미 비정규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능력이 충분했고 준비가 돼 있다. 필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욕구와 문예활동이 알찬 프로그램과 계기를 통해 결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지난해 말 센터는 글쓰기 모임이나 글쓰기 교육, 공모전 3종 세트를 기획했고 마침내 올해 처음으로 진행된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이 탄생됐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 우리 스스로도 더욱 깊이 알게 됐다. 글쓰기는 사회적 억압에 직면한 소수자들이 그간 감내해야 했던 고통에 대해 새롭게 해석을 시도하면서 배려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는 것. 이러한 과정이 내면의 치유와 자존감의 획득으로 이어지면서 자신의 삶을 견뎌 내고 타인과 다시 만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 우리는 글쓰기가 갖는 이러한 가능성이 비정규 노동자들로 하여금 숨 막히는 현실을 이겨 내고 변화를 촉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딱딱한 법제도적 논의나 건조한 통계수치가 담지 못하는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발언을 통해 오히려 비정규문제의 보편성에 접근하는 것이 더 용이해질 것이며 집합적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공모전에 응모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 기대에 대한 넘치는 응답에 뿌듯했다.
이번 비정규노동 수기공모전 모토는 ‘비정규직 당신이 희망이다’였다. 노동자 글쓰기가 진짜 혁명이고 희망의 메신저임을 올해 김진숙 동지와 희망버스를 통해 절감한 만큼 ‘희망’에 그 무게를 실었다. 공모전에 응모한 원고는 총 40편이었다. 퀵서비스 노동자부터 학원 강사 노동자, 미래의 노동자인 학생들까지 폭넓게 참여해 우리 사회에 매우 다양한 아픔들이 존재함을 드러냈다는 게 이번 공모의 가장 큰 성과다. 심사위원들은 모든 원고를 각자 읽고 최종 합심을 가졌는데, 결과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해 합의점을 찾기 위해 충분한 대화가 필요했다고 한다. 이는 심사위원 각자의 기준이 다른 탓이기도 하지만 우리사회의 비정규노동이 너무도 폭넓고 깊게 퍼져 있고 또 그로 인한 고통이 심각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좋은 글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어서 심사위원들의 고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후문이다.
심사위원 총평에서 인용하면 “심사위원들은 이번에 응모된 글들을 읽으면서 개별적인 아픔에 깊이 공감하게 됐고 이 글들이 모두 소중한 기록이라는 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입선하지 못했지만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혹은 이렇다 저렇다 했던 글들이 많았다. 그만큼 난감하고 힘들었다는 뜻이다. 이 고충을 입선하지 못한 분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리포트를 쓴 듯한 글이나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경험 없이 모호한 주장을 되풀이한 글, 학술적 성격을 빌린 글들은 공모전의 취지에는 부족하다는 의견을 모아 선택하지 않았다.” 40편의 글 중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어서 어떡할까 고심한 끝에 결국 센터는 이번 수기공모전에 들어온 모든 글들을 묶어 한권의 단행본으로 발간해 시판하기로 했다. 내년 초에 비정규 노동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소중한 책 한권이 선보일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내년에도 ‘제2회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이 진행된다. 올해보다 더욱 많은 비정규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참여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여행에 동참하는 의미와 함께 당선되면 적지 않은 상금과 상패도 주어지고 일간신문 등에 자신의 글이 실리는 짜릿한 경험도 맛볼 수 있다. 우리 노동자들의 글쓰기가 더 나은 삶과 세상을 만드는 작은 실천이라는데 공감하는 분들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고 싶다.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에 꼭 응모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