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공정이 시대의 화두라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하지 싶다. 각자 말하는 공정의 의미는 다르더라도 말이다. 공정 담론 속에는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녹아 있다.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공정의 의미가 달라진다.

공정이 능력주의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그들은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반대와 정시 확대를 주장할 것이다. 정규 채용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비정규직은 그 능력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기에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 수능시험이 그나마 가장 공정한 평가 방식이다. 학생부·논술 등이 중요한 수시는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고, 시험보다 반칙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그 결과 개인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아마 능력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한다.

능력주의자들은 인간을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이성적인 실체로 본다. 오롯이 나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빚어진 결과니 그에 따른 권리와 책임도 나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 많은 걸 얻고 싶다면 능력을 가꾸어 경쟁에서 이기면 된다. 공정한 경쟁을 더럽히는 반칙은 용납할 수 없다. 경쟁의 결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인간은 환상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내린다.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억압적인 관습과 문화에 못 이겨 물러서기도 한다. 반대로 누군가의 선의와 응원에 힘입어 제가 가진 능력 이상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능력을 가늠할 경쟁은 개인과 개인 간의 온전한 대결이라고 단정 짓기 힘들다. 그 배경에는 부모의 재력, 자라 온 환경, 경쟁 규칙의 변화, 어쩌다 찾아온 행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어느 시기에 어떤 지식과 기술이 유망할지를 결정하는 건 사회 변화의 결과다. 누군가의 능력은 그가 속한 사회에 많은 빚을 지는 것이다.

인간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세계 속에 놓인 존재라면 무엇이 공정일까? 누군가는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만 하면 그 속에 속한 인간도 자연히 변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반칙과 특권, 억압과 차별, 지나친 불평등 등 부조리는 개인의 문제에 앞서 세계의 문제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부조리한 세계를 타파하는 게 곧 공정일 듯하다.

그러나 위 주장에도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부조리한 세계만을 콕 집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이 모여 세계를 이루고 세계는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이념으로 똘똘 뭉쳐 자기 손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외치는 자가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입으로는 인간을 위한다고 하지만, 머릿속에는 인간이 거세된 세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인간은 시혜를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검찰·부동산 개혁이라는 도그마에 갇혀 온갖 부정과 ‘내로남불’을 견뎌 내는 모습을 우리는 봐 왔다. (개혁은 필요하다. 단, 개혁을 위한 개혁은 반대한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은 독립적인 실체만도, 세계 속에 놓인 존재만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좌절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반항할 수도 있다. 인간이 간단하게 정의될 수 없는 만큼 공정 역시 그렇다. 공정을 쉽게 이야기하며 한낱 정치 구호로 소비하는 이가 있다면 포퓰리스트일 가능성이 크다.

능력이라는 건조한 잣대를 신봉해 인간을 파편화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고, 타인을 도와주면 앞으로 내가 힘들 때 타인도 나를 도와주겠지, 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동시에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해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저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다. 공정의 가능성은 능력 예찬도, 공허한 시혜도 아닌 타인과 연대해 느리더라도 스스로 나아가려는 지난한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공정 담론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정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