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매년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지난해 10회를 맞이했다. 보통 9월 초에 공모를 시작해 11월 중순에 마감한다. 그 뒤 12월 중순에 시상식을 열고, 당선작은 비정규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과 한겨레 지면에 실린다. 비정규 노동자로 살면서 겪은 내 이야기, 비정규 노동자를 인터뷰한 글, 비정규노동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 공모 주제다. 응모작을 살펴보니 자신이 겪은 노동을 직접 쓴 글이 많았다. 지난해 대상작은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의 애환이 담긴 ‘해고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글이었다.

기존에는 당선작만이 한겨레 지면에 실렸다. 그런데 지난해 당선작을 모두 싣고 나서 과거 응모작 역시 실을 수 있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반응이 제법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 덕에 오래 전에 응모해 줬던 분들에게 다시 연락하게 됐다. 한겨레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숱한 노동세계의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처지, 취재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노동 당사자의 글로 공유하고자 한다”는 취지와 함께 ‘비정규노동 수기’ 코너에 실릴 글을 투고 받고 있었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또 하나의 창구가 생긴 것 같아 반가웠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된 일이다. 글쓰기 그 자체만으로도 오랜 시간과 품이 든다. 쓸 만한 글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가 떠올라도,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 문장으로, 나아가 한 편의 글로 엮어 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글의 주제가 희로애락이 담긴 노동이라면 한층 더디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 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엄혹하다. 대부분 노동기본권 사각지대에서 허덕이고 있다. 헌법이 보장한 노조할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고용·산재 보험과 같은 사회안전망의 바깥에 있다. 아픔을 들춰내지 않고는 글을 쓰기 힘든 현실이다.

그러나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한 자 한 자 어렵게 써 내려가다 보면 자기 치유가 될 수 있다. 비정규노동 수기는 더러워서, 무서워서, 지쳐서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던 아픔을 배설하고 정화하는 행위다. 게다가 매일의 노동을 되짚어 보면서 그 노동이 모여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자신을 직면할 기회다. 나아가 나의 노동이 곧 타인의 노동과 연결되고, 타인의 노동이 곧 나의 노동과 연결된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글과 행동으로 꿋꿋이 이겨 내려는 누군가를 본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노동 수기는 자기 치유이자 연대 치유다.

비정규노동 확산은 노동을 은폐한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또 다른 사용자가 끼어든다. 사용자 입맛대로 노동을 쪼개고 간헐적으로 노동자를 사용하거나, 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법과 제도가 이를 뒤에서 받친다. 현행법은 사용종속성을 기준으로 노동자성을 협소하게 판단한다. 그러나 노동의 실질을 보기 위해서는 경제적 종속 정도와 업무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필요한지도 봐야 한다. 노동자의 노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는 말이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만드는 건 형식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이어야 한다.

비정규 노동자의 자기 글쓰기는 은폐된 노동을 조명하는 한 방법이다. 법과 제도가, 노동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놓칠 수 있는 진실을 담고 있다. 노동자가 왜 노동자인지를 알려 주는 확실한 근거다.

물론 꼭 글쓰기일 필요는 없다. 사진이나 동영상도 괜찮다.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노동을 기록하고 드러내면 된다. 어떤 식으로라도 좋으니 더 많은 비정규 노동자의 이야기가 들려오길 희망해 본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