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사진작가를 꿈꾸는 친구가 한 명 있다. 배달노동자로 1년 정도 일했다. 생활비를 벌면서, 여윳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남는 시간엔 사진을 찍었다. 사진으로 버는 돈을 점차 늘리면서 배달 일을 줄여 나갔다.
일이 고된 듯했다. 배달을 시작한 후로 살이 빠지는 게 눈에 보였다. 피부도 거칠어졌다. 찬바람을 맞아가며 많게는 하루 10~12시간씩 운전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눈비가 오는 날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일했다. 배달료가 더 나온다고 했다. 점심·저녁, 끼니를 거르며 일했다. 역시나 배달료가 더 나온다고 했다.
어느 날 술을 한잔 마시는데 친구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옆에 있던 차가 차선을 바꾸는 과정에서 부딪칠 뻔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배달을 하다 보면 사고 현장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고, 언제 내 일이 될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교통사고는 통계상 숫자가 아닌 눈앞의 현실이었다.
친구가 시뻘건 얼굴로 막걸리를 꿀떡꿀떡 마셨다. 사고 직전까지 갔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가 살아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역설적이게 우리는 죽음을 마주할 때 삶에 더 가까워진다고 하지 않나. 딱 그런 순간이었다.
친구의 노동을 생각해 봤다. 내게 배달은 처음과 끝만 있었다. 음식을 시킨다. 음식을 받는다. 배달 과정은 그저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고가 날 뻔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떠돌았을 길이 새롭게 보였다.
플랫폼이 그리는 세상은 매끄럽다. 클릭 몇 번이면 사람들 간의 욕구가 실시간으로 이어진다. 지도 위의 점과 점은 선으로 연결된다. 그 선을 따라 배달노동자가 움직인다. 선 위에는 추위와 더위, 소음과 매연, 끔찍한 사고가 즐비하다. 그러나 잘 드러나지 않는다. 플랫폼은 좌표에 점을 찍고 선을 그리듯 인간과 사물을 추상화한다. 그러니 노동자가 실제 이동하는 거리가 아닌 직선거리로 운행거리를 산정하는 것이다.
플랫폼 속에서 배달노동자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불린다. 수년간 어렵사리 투쟁해 노동자성을 인정받아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사용자는 자신이 사용자가 아니라며 도망간다. 법은 노동자를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사용자와의 관계 말이다. 사용자에게 인정받지 않는 이상 노동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이다.
배달노동자는 자신에게 일거리가 어떻게 주어지고 어떤 식으로 보상이 책정되는지 모른다. 업무지시와 평가, 징계도 마찬가지다. 알고리즘에 접근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전 노동 과정을 이해하고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알아야 표현할 수 있다. 표현해야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비단 배달노동뿐만이 아니다. 여러 노동자가 플랫폼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 플랫폼은 끝도 없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 한다. 골목상권까지 구석구석 파먹을 기세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플랫폼기업의 독과점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플랫폼 국감’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국회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제약할 수 있는 ‘플랫폼종사자법’ 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이에 문제의식을 가진 플랫폼 노동 당사자(배달·대리·택시노동자, 웹툰 작가)와 시민·사회단체가 모였다. 긴급 간담회를 시작으로 수차례 회의를 했다. 많은 논의가 오갔다. 두 차례 교육도 했다. 서로의 노동을 알아가기 위함이었다. 지난 25일 ‘플랫폼노동희망찾기’가 출범 토론회를 개최해 20대 대선 및 직종별 당사자 요구안을 발표했다. 대선 전후로 해서 집중적으로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플랫폼 노동자들이 연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아래는 출범 토론회에서 나온 5대 요구안이다.
“1. 플랫폼 노동자에게 권리를! 플랫폼기업에 사용자 책임을! 2. 안전운임제·안전운반료·표준단가 등 플랫폼 노동자에게 생활임금을 보장하라! 3. 플랫폼 노동자에게 알고리즘을 설명하고 교섭하라! 4. 플랫폼 노동자에게 사회안전망·사회보험 적용을! 5. 플랫폼 노동자에게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