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지난 13일, 이재용 삼성전자 전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이번에도 법과 원칙은 가진 자 앞에서 쉽사리 굴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익을 위한 선택으로 받아주시며 국민들께서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2015년 1월로 되돌아가 보자.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최태원 SK 회장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가석방 시도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형량에서 많은 특혜를 받고 있는데 가석방 특혜까지 받는다면 그것은 경제정의에 반하는 일이다. 경제정의라는 관점에서 더 분명한 원칙이나 기준들을 세워야 경제정의가 살면서 기업도 발전하고 국민들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궁금하다.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의 경제정의에 대한 원칙이나 기준이 변한 것일까. 혹은 경제정의를 지키는 것이 국익을 해하는 걸까. 알 수 없다.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틀렸으나 지금은 맞는 모순이 넘쳐 난다. 말글이 가볍게 쓰이고 쉽게 버려지는 탓이다. 논리는 숙의가 아닌 말싸움에 쓰인다. 정보는 쌓이나 지혜가 흐르지 않는다. 당장의 기분을 배설하면 그만이다. 아무렇게나 뱉은 말글은 기억에서 금방 사라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여기저기에 쌓인 기록을 들춰내면 된다. 검색 몇 번이면 충분하다. 물론 비교되는 두 시기의 상황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뀌는 말글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합리적인 설명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가벼움의 시대다. 신념과 그것을 지켜 나갈 굳은 의지가 부족하니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른 채, 어쩌다 보니 운전대를 잡은 꼴이다. 부끄러움이나 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말글을 무겁게 여기지 않아 그렇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듯 강물도 흐른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변화를 만들어 낸다. 바로 조금 전의 나라도 지금의 나와는 다르다. 그 사이 머리카락 한 올 떨어졌을지도, 세포 하나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변화는 인간의 숙명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말글이 오늘의 그것과 다른 게 뭐가 그리 큰 대수냐. 불변에 대한 믿음은 허상이다. 영원할 것이라던 사랑도 쉽게 깨진다. 예술은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려 하나, 그것은 현실에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그러니 모순 따위는 견뎌라?
아니다. 납득하기 어렵다. 삶을 받아들인 이상 허무에 굴복할 수는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지만, 변하지 않으려는, 소중한 것을 지켜 내려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반항이고 투쟁이다. 인간은 순간순간의 감정과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 이상이어야 한다. 결코 가벼워서만은 안 된다.
무엇을 위해 힘들여 싸우는가. 조심스럽게 움켜쥔 채 간직하려는 게 무엇인가. 하나의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그것은 최소한 인간의 얼굴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건 인간만의 특권이니 말이다.
20대 대선이 반년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부패와 무능만큼이나 위선에 분노한다. 말글의 중심에 인간을 세운 채, 흔들릴지라도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