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감정노동존중 수기 공모전 당선작 [대상] 아프냐? 나도 아프다

by 센터 posted Jun 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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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성

 

 

그녀는 내 눈에는 어떤 업무든 척척 해내는 ‘원더우먼’이었고, 어떤 악당 같은 고객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마블 히어로의 차도녀 ‘블랙 위도우’였다. 그런 그녀가 울고 있다. 아무도 몰래 화장실에서 번진 마스카라를 고쳐가며 소리죽여 훌쩍이고 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너무 놀라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금융기관이라는 곳은 참 매력적인 직장이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회생활의 간접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런 곳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많이 후회했겠다’라고 생각하며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져 나의 열정을 불태우고 싶었으나 현실은··· .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회 초년생 막내 사원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사무실 정리 정돈이나 직장 상사의 잔심부름, 고객들의 간단한 요청에 응대하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그마저도 실수 연발이었다.

 

그런 나에게 옆자리의 그 여자 선배님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어떤 일이고 막힘없이 술술 처리하고, 보지도 않고 누르는 계산기는 항상 10원 하나 틀림이 없었다. 게다가 100만 원 지폐 묶음을 착착착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빠르게 세고 마지막 한 장을 딱 튕기는 모습이란 부럽다 못해 경이로웠다. 각양각색의 고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크고 작은 항의나 불만 민원이 끊이질 않는데도 얼굴에 미소는 늘 흐트러짐이 없었고, 고객에게 찬찬히 설명해가며 고객의 심중을 헤아리려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정말 배우고 싶은 직장의 롤모델이었다.

 

사무실 근처에 사는, 거액예금을 예치해 놓은 팔순의 고객이 있었다. 평소에는 평범한 할아버지인데 술버릇이 고약하여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에는 세상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지점장도 피하고, 과장도 피하고··· . 언제나 그분의 뒤치다꺼리는 내가 도맡아야 했고, 직원들 특히 나에게 말을 너무 함부로 하셨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얼른 집에 모셔다드리고, 가끔 술이 과해 객장에 실수라도 해 놓는 날에는 얼굴 찌푸리며 치워야만 했다. 그분의 패악질에 나의 불만은 점점 극에 달했고, 결국 상사에게 불만을 얘기했다. “내가 왜 그분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만 하느냐, 더 이상 못 견디겠다.”라며 푸념하자, “그럼 니가 나가서 거액 예금주 한 명 데려와 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능력이 안 되면 꾹 참고 지내라는 인생의 쓰디쓴 충고도 아끼지 않았던 그 쿨내 진동하는 직장 상사. 고객에게 상처받은 마음에 따가운 알코올로 소독까지 해주는 그 차가운 반응에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 퇴근 후 입사 동기들끼리 술자리에서 울분을 토하며 상사 뒷담화도 하고, 그러려니 하면서 훌훌 날려버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서운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지금도 마치 어제일 마냥 기억이 또렷하다. “야, 우리가 받는 월급에 그런 것도 다 포함된 거야.”라는 동기의 말을 위로 삼으며 그 후로도 그곳을 떠날 때까지 고객의 갑질과 상사의 무관심을 그저 꾹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과 교대로 점심을 먹고 막 지점으로 들어오던 때였다. 근처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단골 아주머니인데 나의 롤모델 그 선배를 향해 도둑년이니 뭐니 하며 쌍욕을 해대고 있었다. 다들 놀라 무슨 일인가 하고 있는데, 그 선배는 역시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저희가 두 번 세 번 다 확인해 봤어요. 가져오신 금액이 틀리신 거 같으니 가게에 가셔서 다시 확인해 보세요.”라며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속으로 선배의 저 강인한 멘탈에 존경을 표할 뿐 아무도 나서서 도울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길길이 날뛰던 그 고객은 분을 못 이겨 육두문자를 쏟아내며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나갔고, 그 뒤통수에 대고 안녕히 가시라는 흔들림 없는 인사를 하는 선배의 모습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예의 그 쿨하디 쿨한 책임자가 오더니 그 직원에게 “김 대리,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고 자리를 떠나고, 그 선배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기 고객의 업무를 계속 처리했다. 잠시 후 그 아주머니가 다시 돈을 더 가지고 입금을 하러 왔다. 예상했듯이 고객의 착각으로 빚어진 오해였지만 그 고객은 선배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그 선배 역시 별일 아니라는 듯 전과 똑같이 그 고객에게 싹싹하게 잘 대했다.

 

그 일이 있고 1시간쯤 후, 내가 그 선배의 감춰진 진짜 모습을 본 것이다. 경력이 오래되면 일을 하며 생기는 어지간한 마음의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강인한 멘탈로 타격감 1도 안 받고 빈틈없이 고객을 대하던 그 원더우먼이 아니었다. 베테랑 선배 역시 신입사원인 나랑 똑같이 그저 상처받으면 마음 아프고 괴롭고 슬퍼하는 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내가 혹시라도 그 선배의 치부를 본 것 같아 당황하며 얼른 자리를 피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너무 후회스러웠다. 뭔가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는데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었다. 뭐 어차피 직장생활을 하며 누구나 겪는 일인데··· . 나 따위가 감히 무슨 위로를··· . 하며 내 소극적인 행동을 합리화할 뿐이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고 나는 관리자가 되었다. 거래하는 고객들의 성향은 다원화 사회에 걸맞게 더욱 다양해졌다. 아무래도 금융기관이 ‘돈’이라는 것을 취급하다 보니 서로 예민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진짜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정말이지 직원들의 진을 쏙 빼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까탈스러운 고객도 있고, 차라리 모든 거래를 해지하고 떠났으면 싶은 진상 고객도 있다. 이젠 고객의 성향에 맞춰 응대하는 스킬도 많이 다양해졌고, 좀 더 세련되게 거절하는 법, 기분 나쁘지 않게 설득하는 법도 터득했다. 그런데도 마음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내는 고객은 여전히 존재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나와 같은 서비스 직업군들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숙명이려니 하며 견뎌내야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들어 감정 노동, 감정 노동자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예전부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계속 있어 왔지만, 새삼스레 이런 단어가 생기고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그만큼 더 각박해지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메마른 사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오죽하면 ARS 콜센터 첫 멘트가 감정 노동자를 가족같이 생각하고 대해달라는 부탁의 멘트일까.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칼날 같은 말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에 독이 될 뿐이다.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존엄하여야 하고, 갑과 을이 없으며 귀와 천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지금 이 시각에도 어디선가 여전히 갑을관계가 존재하고, 귀천을 따지고 있다. 직장생활은 점점 더 녹록지 않게 되고, 고객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는 내가 당당한 전사戰士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객과 마찰을 빚는 그런 싸움꾼이 아니라 감정 노동 전쟁으로부터 나와 우리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힐러healer 말이다.

 

난 더 이상 내 월급에 고객에게 상처받는 대가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처받은 직원에게 무관심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위로하지 않는다. 고객을 대할 때는 최선을 다하되 감정까지 다치며 비굴하지 않으려 한다. 하는 일이 이런 일일 뿐 열심히 내가 맡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근무 중에 상처받고 있는 직원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고객과 직원을 분리하고, 잘잘못을 따져 억울하게 난 상처는 보듬어주고 덮어주려고 한다. 최소한 퇴근할 때는 후련한 마음으로 가야지, 집에까지 그 아픔을 안고 가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내가 이렇게 노력한다 해도 완전한 치유가 되진 않지만 나쁜 기억을 조금이라도 빨리 지워버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때 그 난장을 피우던 할아버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직장 상사의 차가운 말과 표정은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나는 아마 그 상사에게 받은 상처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약간의 관심으로 상처 입은 막내 직원의 어깨라도 토닥여 주었다면 아마도 지금 이런 씁쓸한 기억도 없었을 텐데··· . 만약 옛날의 그 원더우먼 선배가 지금 나와 함께 일하는 후배 직원이라면 그런 상황 뒤에 몰래 눈물 흘리는 모습을 이제는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오롯이 다 알진 못하겠지만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다. 존중받지 못했다고 너무 아파하지 마라. 오늘도 최선을 다한 당신을 내가 진심으로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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