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평생 비정규직 시대 만드는 최악의 노사정위 합의에 반대한다
지난 9월 13일,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에 최종 합의가 있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는 평생 비정규직 시대를 여는 사상 최악의 노동개악이라며 삭발식과 시국농성 등으로 반발하며 긴급하게 움직였다. 이에 반해 사용계는 현재의 합의 수준으로는 노동시장의 유동성을 높일 수 없다며, ‘노동개혁’이라고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했다. 정부와 국회는 또 달랐다. 박근혜대통령은 고생했다며 이기권 노동부장관을 격려했고, 청년 일자리 해결에 앞장서겠다며 청년희망펀드를 조성하겠다고 했다. 새누리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합의문을 넘어서는 내용까지 보태 5개 법안을 제출했다. 노·사·정 합의라고 하기에 합의 이후의 반응들이 제각각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번 합의의 핵심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이다. 정부와 사용계는 정규직-비정규직 혹은 대기업-중소기업 간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과보호된 정규직 일자리의 유동성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개선’은 열악한 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국어만 잘 했더라도, 이 같은 결과는 있을 수 없다. 가족과 맘 편히 외식 한번 못할 정도의 저임금, 수시로 해고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적정 임금과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것이야 말로 ‘개선’이다.
합의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승리했던 기쁜 순간들이 떠오른다. 원·하청 상생협력 등 동반성장과 파견과 도급 기준 명확화, 파견 규제 합리화 등이 간접고용과 관련된 것들이 대표적이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파견법으로 금지된 제조업 생산라인에 근무하며 온갖 차별과 고용불안을 겪었다. 이에 대법원은 현대자동차(원청)가 불법파견을 했으므로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 등 유사 산업에서 비슷한 판결이 잇따랐다.
그런데 합의문에 따르면, 원·하청 상생협력은 그동안 불법파견의 징표가 됐던 원청의 하청에 대한 직접 지원을 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SK그룹 등 대기업은 원·하청 상생협력 명목으로 막대한 정부 지원금을 받고 있지만, 정작 저임금과 고용불안이 있는 간접고용 일자리만 잔뜩 양산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32개 업종으로 제한된 파견 규제를 완화한다면, 노동시장과 우리의 삶은 더욱 불안정해 질 것이다. 합의문대로라면 현재의 불법파견은 모두 합법파견이 돼버린다. 그 간 불법파견에 대한 대법원의 합리적 판결과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당연한 승리는 앞으로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불법파견 논란을 진화하는 정부와 사용계의 방식이 이처럼 얍삽하다.
비정규직에 있어 공공부문의 선도적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했지만, 비정규직 일자리를 괜찮은 일자리로 만들겠다는 믿을만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전환될 정규직 일자리는 노동조건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 무기계약직일 뿐이고, 그마저도 신규채용 방식으로 이뤄지며 그 과정에서 해고가 자행되기도 한다. 정부가 만들겠다고 하는 공공기관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강제성이 없어 ‘안 지켜도 그만’에 불과하다. 차라리 이미 만들어져 있는 용역근로자보호지침의 적용 범위와 의무를 강화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새누리당은 한술 더 떠 합의문에도 없는 기간제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35세 이상)하는 기간제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렇다면 청년 시절에는 인턴과 아르바이트 등 과도기 노동을 하고, 35세가 넘으면 기간제로 일하다 기간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으면 파견노동자가 되란 말인가. 이번 합의는 평생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살라는 정부와 사용계의 학대이자 방임이다.
계속 쟁점이 됐던 임금피크제만 봐도 그렇다. 비정규직은 평생을 일 해도 임금에 ‘피크’를 찍을 수 없다. 취업규칙이 없는 중소영세사업장의 노동자, 그리고 그와 다를 바 없는 사용자들은 일상적으로 대기업의 횡포를 겪어야 한다. 비싼 학자금 등을 감당해야 하는 청년들은 해고 보다 당장의 일자리 걱정이 더 크다. 이처럼 정부와 사용계는 노동시장 문제의 본질을 흩트리며 엉뚱한 대안을 내놓고 있다.
노·사·정의 이해관계가 달라 노동시장을 바라보는 온도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이번 합의는 과도하게 ‘기업 편향적’이다. 노동자의 희생만 강요하고 있다. 정부와 사용계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진짜 대안은 멀리 있지 않다. 노·사·정 공동의 실태조사로 각기 입장차를 최소화하고 노동시장의 문제를 진단한다면 가장 현실적인 대안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은 노동계가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비정규직을 줄이고 차별을 해소하며 노동3권을 신장하는 방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9.13 노사정위 합의는 역대 최악의 야합이다.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다시 원점에서 노동시장 구조개선의 핵심인 비정규직 문제 해법을 중심으로 새 틀을 짜야 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2천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합의를 규탄하며 노동자들을 살리는 방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2015년 9월 18일
한국비정규노동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