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역설

by 센터 posted Apr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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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인  센터 정책연구위원



무차별적이라는 건 역설적으로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의미다.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어린아이 가브로쉬는 가난과 폭압 정치에 분노해 혁명군 소속으로 싸우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평등이란 대체 무엇인가, 죽으면 모두 평등해지지.” 계층이 있을 뿐 계급은 없다고 하지만, 수저계급론은 우리에게 ‘뼈 때리는’ 공감대를 선사했고, 조국사태는 기회마저 불평등한 세습사회를 실감하게 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도 우리 앞에 놓인 코로나19는 모두를 평등하게 위협하고 있다. 


온 나라의 정책과 예산이 코로나19를 향해 있고, 언론은 연일 코로나19를 주인공으로 한다. 모임이 취소되고 집에 일찍 귀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며 여럿이 사용하는 물건을 소독하거나 수시로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위생 관념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국민의 생활방식이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던 세상은 여전히 코로나19 안에도 다 들어있었다. 


‘직장갑질119’는 2월 중순부터 코로나19가 일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상담 사례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쯤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상담 사례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역감염이 빠르게 확산되던 2월 말, 회사에서 강제로 연차유급휴가를 사용하게 한다거나 무급으로 휴가를 가게 한다는 사례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소비가 줄어들자 영업시간을 줄이거나 문을 닫는 사업장이 속출했다. 항공업, 관광업뿐만 아니라 식당, 카페, 헬스장, 도서관처럼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곳들도 곧 문을 닫았다. 소비와 생산과 투자가 감소하면서 경제는 한 치 앞도 예상하기 어렵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용자들이 방어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건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종의 유행처럼 인건비에 가장 먼저 손을 댄 건 분명 최악이었고, 그 피해가 비정규직, 영세사업장에 집중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소극적이기만 한 정부의 무능은 더욱 최악이었다. 


2월 말부터 일부 대기업들은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사무실에 오래 앉아있는 게 성실함과 헌신성을 상징하는 한국 사회에서 재택근무는 초유의 사태였지만, 코로나19 공포는 이를 간단한 일로 만들었다. 동시에 다른 곳에선 해고가 시작됐다. 불확실성에 취약한 중소기업에선 강제로 사용하게 했던 연차유급휴가가 금방 소진되자 무급휴가를 가게 했고, 무한정 무급휴가로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자 노동자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직장갑질119’의 상담 패턴을 보면 3월 둘째 주까지 무급휴가가 44.1%, 해고·권고사직이 14.6%였으나, 셋째 주에는 무급휴가가 37.1%로 줄어들고, 해고·권고사직이 21.3%로 늘어났다. 


정부가 고용유지지원금 규모를 늘리고 요건을 완화했지만, 해고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이미 유사한 정부지원금을 받고 있어서 지원 대상이 아니거나,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은 뒤 인력 변동이 있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부담스럽거나, 아니면 신청 절차가 귀찮거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어쩌면 마음대로 월급을 깎고 마음대로 사람을 내쫓을 수 있다는 천박한 인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코로나19는 모두에게 평등했지만, 코로나19로 회사에서 쫓겨날 때는 익숙한 불평등이 반복됐다. 


2.눈먼자.jpg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한 장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이 멀게 되는 이상한 전염병이 돌자 정부는 감염자를 외딴 정신병원에 격리했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도우려는 게 아니라 전염을 통제하려는 일종의 감금이었다. 제공되던 식량이 점점 줄어들기도 전에 격리된 사람들은 정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걸 눈치챘다. 정신병원은 무정부 상태였고 모두가 평등하게 눈이 멀었지만, 식량 배급을 무기로 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처음에 귀중품을 약탈했지만, 나중에는 여자들을 강간했다. 


인간은 위태로움을 공유하면서 인간성을 회복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약한 존재에게 쉽게 폭력성을 드러내며 ‘눈먼 자’가 되길 자초하기도 한다. 불평등 사회에서도 코로나19가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건 첫 번째 역설이고, 그 평등함으로 말미암아 불평등이 도드라진다는 건 두 번째 역설이었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거나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애초에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노동자, 잦은 인력 변동이 불가피한 파견업체 소속 파견 노동자, 근로감독이 어려운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에게 지금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나마 권력을 가진 사용자들은 고통 분담이란 거짓말로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있다. 


경기도를 시작으로 재난소득이 지급되고, 일이 끊긴 영세사업장과 특수고용 노동자에게는 긴급생활비를 지급한다고 한다. 고용노동부는 코로나19를 이유로 무급휴가를 강요하는 사업장을 신고할 수 있는 익명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여러 대안이 시도되고 있지만,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최악의 해고 대란을 막기 위해 해고를 규제해야 한다. 해고는 쉬운 방법이지만 개인과 사회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1997년 외환위기에 이뤄진 대규모 구조조정은 가장 먼저 가족을 해체했고, 개개인의 인생 사이클에 회복 불가능한 불안정을 안겼다. 망가진 노동시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이 양산됐고, 그때 만들어진 이중구조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해고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할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코로나19 영향으로 퇴사할 경우 한시적으로 자발적 여부를 묻지 않고 실업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코로나19로 무급휴가를 강요받는 상황이라면 자발적으로 퇴사할 수밖에 없지만, 현행 요건에서는 단순한 자발적 퇴사 코드가 부여돼 실업급여 수급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해고를 당하거나, 당하지 않거나 무급으로 코로나19에 맞서야 하는 현실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해고 규제와 함께 일자리를 잃은 개인이 당장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안전망이 갖춰져야 한다. 


때마침 경총은 자유로운 해고와 비정규직 확대를 요구했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 양보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사람보다 돈이 중요한 한국 사회는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으로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먼 자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끝까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았다. 먹을 게 없을 땐 다 같이 굶었고, 먹을 게 생기면 아이와 노인을 먼저 챙겼다. 이들의 희생은 오로지 공동체를 위한 것이지만,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더이상 희생이 아니었다. 눈먼 자들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 연대였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자가 될 것인가, 깊은 시선을 가진 진정한 눈뜬 자가 될 것인가. 코로나19라는 위기가 한국 사회의 정의와 분배 논의를 촉발하는 세 번째 역설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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