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분필

by 센터 posted Jun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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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jpg


사진, 글 |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서울 어디 차 다니던 길에 사람이 들었다. 목소리 높였다. 차벽이 금세 높아 막다른 길이었다. 오도 가도 못했다. 아이가 쪼그려 앉아 길바닥에 글을 남겼다. 하늘나라 간 언니, 오빠의 안녕을 바랐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는데, 분필이 자꾸만 뚝뚝 부러졌다. 몽당분필 겨우 쥐고서야 마침표를 찍었다. 풍선 달린 배 그림을 그 아래에 보탰다. 옆자리 사내아이는 결정적 오타를 남기고 말았지만, 가만히 지켜보던 엄마는 그럴 수 있다면서 아이를 격려했다. 곧 그 앞 높다란 차벽 너머에서 물대포 최루액이 힘껏 솟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몽땅 거칠거칠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매캐한 물이 거기 흥건했다. 쓰고 또 쓰고 몽당분필 되도록 길바닥에 새긴 불온한 추모글을 깨끗이 지웠다. 이럴 수는 없다면서 길 위의 사람들이 밤새 울었다.


맨 앞자리에서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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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jpg


진상은 낯설지 않았다. 이미 구호에 들어 오래 외친 말들이 화면에서 흘렀다.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고 발표자가 말했다. 하청 또 재하청을 복잡한 사슬을 타고 흘러내렸다. 맨 앞자리에서 지켜보던 엄마 눈에서 물이 흘렀다. 마르질 않았다. 돈 때문이었음을 조사 결과는 말해줬다. 분할되고, 외주화된 공정에서 새로운 위험이 발생했다고도 조사위는 지적했다. 청년 노동자들은 오늘도 거기 일급 발암물질 뿌옇게 휘날리는 곳에서 일한다. 바뀐 게 많지 않다고 앞자리 선 이가 전했다. 엄마는 맨 앞자리에 앉아 두툼한 자료집 구석에 메모를 꾹꾹 남긴다. 울음 꾹꾹 참느라 자꾸만 고개를 떨궜다. 그 앞 화면에 자전거 타고 출근하는 생전의 김용균 씨 사진이 멈췄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가 8월 19일 진상조사 결과와 권고안을 발표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맨 앞에 오토바이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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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이런저런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던 하루, 퇴근길 상념이 짙다. 종일 추적거리던 비가 그치고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 짙었다. 교차로에 빨간불 들어와 급히 멈춰 섰다. ‘신홋발’이 마음 같지 않아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과했다. 그래도 맨 앞이구나, 되지도 않는 이유 들어 마음 추슬렀다. 동네 친구 집에 맡겨 둔 아이 생각에 급했다. 어느새 오토바이 한 대가 앞자리 섰다. 배달 노동자였다. 중학교 시절 방학이면 신문 배달 알바를 했다. 이른 새벽 지국으로 나가 온갖 광고 전단부터 끼워 넣었다. 책처럼 두툼해진 신문을 자전거에 싣고 한겨울 미끄럽던 골목길을 누볐다. 쓱 접어 슉 던지면 이층집 현관 앞에 착 떨어지곤 했으니 일이 손에 붙을 때였다. 반쯤 돌렸을까, 자전거 바퀴가 펑크 났다. 별수도 없어 끌고 걷고 달렸다. 지쳐 돌아가던 길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다른 신문 지국이었는데, 오토바이 내어준다면서 꾀었다. 확 끌렸지만 거절하고 말았다. 오래전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 생활이 길었는데, 그 뒤로 우리 집에서 바퀴 두 개짜리 차 얘긴 금기였다. 곧 신호가 바뀌었고, 오토바이는 치고 나갔다. 곡예하듯 차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달려 멀어졌다. 신호등 맨 앞자리엔 언제나 배달 오토바이가 있었다. 밥 차리기엔 늦어 배달 앱을 뒤적거렸다.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밤늦도록 집 앞 골목에 울렸다. 쓰는 사람은 많은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고,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이 어느 자리에서 말했다. 만나면 누가 식물인간이 됐다더라, 죽었다더라 얘기를 나눈다고도 했다. 불나방에 비유했다. 노조할 권리 보장을 그 앞자리 정치인과 정부 관료에게 호소했다. 신호가 바뀌었고 맨 앞자리 오토바이가 내달린다. 거기 배달통에 책임과 위험을 가득 싣고, 식지 않은 음식을 나른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마지노선

by 센터 posted Jul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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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불 꺼진 전광판에 현수막이 붙었다. 그건 바람에 휘날려 자주 꼬이고 뒤집혔는데, 구멍 내고 추를 달아 겨우 잡아 뒀다. 그 윗자리 올라 버티던 사람 둘은 현수막 펴는 데에 많은 공을 들였다. 난파선 조각에 매달려 표류하다가 닿은 어느 섬 해변 모래 위에 새긴 조난신호처럼, 현수막에 새긴 요구는 자꾸만 찌그러졌고, 흐릿해졌다. 섬사람들은 날짜 꼬박 세어 가며 하루 또 바람과 햇볕과 무관심과 싸운다. 그 옆 불 켜진 전광판에선 단결투쟁 나선 노동자들이 선을 지켜 행복했다. 경찰과 더불어 환하게 웃고 춤췄다. 선을 지키면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서울경찰청은 광고했다. 뒤따라 어느 보험사의 신상품 광고와 메르스 예방수칙이 화면에 부지런히 돌아갔다. 지키면 안전해진다고 전광판은 또한 말했다. 거제 대우조선해양 크레인 위에서, 부산시청 앞 전광판에서 사람들이 이제는 별일도 아닌 듯 하루 또 섬을 지킨다. 마지노선이라고, 살려야 한다고, 그 아랫자리에서 고개 꺾은 사람들이 말했다.


글과 사진 |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돈보다 사람, 꽃보다 노조

by 센터 posted Jul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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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자리에 방송 카메라 한 대 보이질 않았다. 대신 무전기 들고 분주한 경찰이 많았다. 커다란 펼침막엔 누구라도 알 만한 사람의 얼굴과 누군지도 모를 이의 영정이 줄줄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사선을 넘은 이들도 한때 자랑스러워했을 회사 로고가 그 뒤로 보였다. 삼성을 넘겠다고 선언한 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옆자리에 섰다. 그곳에서 노조는 오래도록 금기였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니 차라리 광기였다. 금기를 부수겠다는 다짐에 결기가 섞였다. 탄압 사례를 읊었다. 지난 설움을 복기했다. 박수 오가며 사기 높았다. 온기 모였다. 할 말 있는 사람은 모였으나, 들어줄 이가 그 앞자리엔 적었다. 화분 속 봄꽃이 그 자릴 메꿨다. 돈보다 사람이, 꽃보다 노조가 먼저라더라.



돈보다 사람, 꽃보다 노조_축소.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데칼코마니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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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사람들은 부둥켜안고 반쯤 울었고 반쯤 웃었다. 엎드려 절하기를 108번, 때마다 바닥에 소복소복 흰 눈처럼 쌓였다. 입술 앙다물고 참았는데 꺼억 꺽 울음이 비집고 나와 터졌다. 땀인지 눈물인지가 얼굴 타고 흘러 벌건 코끝에 자주 맺혔다. 화장이 제멋대로 번졌다. 끝내 웃음 번졌다. 서로 안고 마주 보는데 울음 또 거기 섞였다. 돌덩이 하나씩 속에 들어 체증이 오래도록 깊었는데, 한결 가벼웠다. 서로를 돌봤다. 더불어 단단해졌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당신은 정년 모르시나요

by 센터 posted Sep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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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오래도록 고생하셨으니 이제는 좀 쉬시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맞벌이 나선 젊은 엄마 아빠는 별수가 없었다. 늙은 엄마 품에 딸아이를 안겼다. 무뚝뚝한 할아버지는 손주를 등에 태우고 마루를 기었다. 멍멍 짖고 야옹 울었다. 아이는 잘 따랐다. 잦은 야근에도 아이는 밝게 웃었다. 용돈 얼마간 꼬박 쥐여 드리는 것으로 마음 짐을 덜었다. 아이들 다 키워 낸 늙은 부모는 다시 아이를 키운다. 어머니 당신은 정녕 정년을 모른다. 주름진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아직 멀었다. 아버지 당신도 정년을 미처 몰랐다. 잘리고 나니 그때가 정년이었다. 황혼길이 아직은 억울한 아버지가 구직길에 나섰다. 취업박람회 안내판을 꼼꼼히 살피고, 여기저기 천막에 들러 상담을 청했다. 빨간 치마 꼬마 아가씨가 할머니 손 꼭 잡고 그 길에 쪼르르 함께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답정너

by 센터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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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의 신조어다. 진짜 생각 따위가 궁금한 게 아니다. 맞장구가 필요할 뿐이다. 격한 공감, 토 달지 않는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한다. 대개는 일방적이다. 그 옛날 왕과 독재자의 질문이 그러했을 터. 신조어는 종종 역사를 거슬러 올라 그 의미를 찾는다. 힘없는 이는 대답을 할 뿐, 질문은 불온한 것이었다. 때때로 그건 목숨을 걸어야 할 문제였다. 저기 머리숱 적은 남자는 여의도 아스팔트에 비닐 집 짓고, 밥을 오래 굶었다. 언제까지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으니 무기한이다. 답을 들을 때까지라고만 했다. 질문의 대가는 그 옛날처럼 가혹했다. 해고가 부당했다고 대법원이 판단했지만 돌아갈 공장이 없었다. 꾸준한 흑자로 우량기업이라던 회사는 미래의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들었다. 재차 해고로 답했다. 길에 떠돈 지가 어느새 9년째다. 집권여당의 대표는 이게 다 노동자와 노조 탓이라고 말했다. 원하는 답이 따로 있었다. 노동개혁, 그건 더 쉬운 해고와 평생 비정규직, 노조 무력화를 뜻하는 신조어라고 길에 선 사람들이 말했다. 머리 희끗희끗한 해고자가 밥 굶어 가며 되묻고 있다. 답이 없어 하루 또 말라 간다. 오래된 미래다. 답은 정해졌다.


글, 사진 |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노래 이야기

by 센터 posted Feb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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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jpg


서울 강서구 등촌동 그늘진 골목이 바람길이라 거기 덩그러니 웅크린 천막이 울었다. 현수막이 널을 뛰고 손팻말이 날았다. 미세먼지 가신 하늘이 쨍했다. 해 들지 않는 천막에서 기타 소리가 울렸다. 노래가 따랐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4천 390일, 과연 그들의 해고 이야기는 끝을 몰라 티도 나지 않는 끝자리를 하나 더 보탰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바람에 홀씨 날려 여기저기 떠다니다 아스팔트 좁은 틈에 뿌리 내리기를 반복했다. 인천 어느 문 닫은 공장 앞에서,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또 여기 등촌동까지 거친 틈에 살았다. 13년, 억세고 질기기로 민들레 못지않았다. 홀로 가는 길이며 또 무슨 흘러간 옛 노래 메들리가 돌고 돌았다. 광야에서, 언젠가 촛불광장의 애창곡도 흘렀다. 스트로크는 불안했고, 코드 옮겨 잡는 손가락이 느렸다. 높은 음은 버거워 가성에 기댔다. 만들 줄은 알았지만 다루는 일이 또 달랐다. 늙어 손가락이 맘 같지 않다고, 기타 연주 6년차 이인근 씨가 말했다. 거리에서 긴 밤 지새우느라 비닐마다 맺힌 이슬이 하나둘 뭉쳐 흘러내렸다. 오래 끌던 문제들이 하나둘 풀리는 걸 보면서 우리도 잘돼야지 싶었다고. 농성 신기록은 도대체가 명예롭지 않은 일이라고 흰머리 긁던 임재춘 씨가 말했다. 그 머리도 한때 검었다. 솔잎처럼 푸르른 시절 다 갔지만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도 거기 낡은 악보첩 어딘가에 들지 않았던가. 다시 돌고,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인가. 다 늙은 기타 노동자의 노래 이야기가 끝을 몰라 하염없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꿰어야 보배

by 센터 posted Jul 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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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던가. 노동자가 수천이라도 조직해야 보배다. 사람답게 살자고 나선 일인데 죽어 앞장선 이가 검은색 머리띠에 흔적을 남겼다. 같이 울고 웃던 동료였으니 남은 사람들은 상복을 입었다. 영정 들고 거리를 헤맸다. 밤이면 서초동 어느 높은 빌딩 앞자리에서 노숙을 했다. 눈 뜨면 또 하루 머리띠 묶고 바빴다. 살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죽자고 달려들었다. 그곳에서 노조는 오래도록 금기였다. 이름값이 높았다. 때로 목숨값을 넘었다. 법당을 찾았다. 전자제품 정교한 부품을 다루던 손이지만, 염주 알 하나 실에 꿰는 게 쉽지 않았다. 절 한 번에 한 알이었다. 땀 한 방울씩이 거기 섞였다. 늦었지만 온전히 꿰어 염주 알을 셌다. 108개였다. 먼저 간 동료의 넋을 기렸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의 손이다. 피땀으로 만든 이름이다.




축소_삼성서비스조계사24.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꼿꼿하게

by 센터 posted Apr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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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꼿하게.jpg

 

무성하게 자란 장미 넝쿨을 쳐내느라 가지를 잡아 비틀다 그만 가시에 찔렸다. 따끔하고 말 줄 알았는데, 종일 욱신욱신 찔린 자리가 아팠다. 다가올 여름에 빨갛게 피어 예쁠 장미는 꼿꼿한 가시를 촘촘하게 품었다. 그래선지 집 울타리에 흔했다. 철 따라 붉어 멀리서 보면 예뻤지만 가까이하기엔 위험했다. 함부로 넘나들지 말란 뜻일 테다. 길가 어디고 말 무성하게 뻗는 곳이면 거기 화분이 있다. 언젠가 대한문 앞에서 수십여 영정을 두고 해고는 살인이라고 말하던 쌍용차 해고자들 천막 뜯긴 자리엔 어느 날 화단이 들어섰고, 예쁜 꽃 무더기로 피어났다. 정부서울청사 앞 언제나 말 많은 그곳에도, 광화문 세월호 광장이라 불리던 자리에도, 여의도 쌍둥이빌딩 앞 청소 노동자 농성하고 기자회견 마이크 잡던 데에도 화분이 곧 빼곡해 그 위로 색색의 꽃들이 노랗고 붉었다. 비록 거기 가시는 없었지만, 그 품은 뜻이 뾰족했던지 안 그래도 할 말 많은 사람들은 화분 얘기를 두고두고 한다. 눈엣가시였다지, 예쁜 꼴을 한 울타리 앞에서 분을 참지 못한다. 텐트 치고 꿋꿋하게 버틴다. 종종 아니 자주 가시 돋친 말들만이 화분을 넘나든다. 저기 서울시청 정문 앞에도 화분이 빽빽하게 들어서 선을 그었다. 폴리스라인을 대신한다. 할 말 미룰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앞에 꼿꼿하게 선 채로 마이크를 들고 이따금 주먹을 뻗는다. 할 일을 미룰 수도 없는 조경 관리 노동자가 물 주느라 별 일없이 거길 지난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그들이 꿈꾸었던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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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jpg


광장 건너편 낮은 자리에서 가수 박준이 노래한다. 작은 모금함을 앞에 뒀다. 뇌출혈로 쓰러진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에 작은 도움 주기를 노래 틈틈이 알렸다. 일어나,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겼다. 노조 깃발 들고 그 길 지나던 사람들이 습기 머금은 지폐를 통에 넣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가수 박준은 마저 노래했다. 그 앞 집회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가 흘렀다. 그 날 선 노랫말 속에 노래 활동가 그들이 꿈꾼 세상이 선명하다. 그 길 지나던 아이들이 낯선 노랫말을 두어 구절 따라 했다. 모자에 온갖 배지 잔뜩 매단 길거리 가수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땀에 젖은 가수 박준이 작은 무대를 정리했다. 뜨겁던 광장에 소나기 한바탕 곧 쏟아졌다. 반가운 비라고 누가 말했는데 해갈엔 부족했다. 되레 습기 잔뜩 몰고 와 숨이 턱턱 막힌다고 사람들은 푸념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광장에서 사람들은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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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즐겁다26.jpg


친구와 더불어 사람들은 즐겁다. 입에 붙은 노랫말 흥얼거리며 잠시 머물다가, 앞선 방송차 없이도 이제는 익숙한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누군가 앞서 외친 구호 따라 퇴진하라, 구속하라 추임새를 거든다. 모이고 또 모여 저마다의 함성이 으레 거기 높다란 돌담을 넘는다. 아이 목말 태운 아빠는 목이 휜다. 외치느라 목이 쉰 엄마가 아이 옷깃을 여민다. 팔 쭉 뻗어 손팻말을 들고, 팔 쭉 뻗어 셀카를 남기며 사람들은 살갑다. 퇴진 군밤 팔던 장수가, 하야 마스크 팔던 노점상 청년이 그 길에 바빠 흥겹다. 호두과자 익는 연기가 폴폴, 횃불 기름 타는 냄새가 풀풀. 종종 머리칼 타는 냄새가 솔솔 퍼지니 비명인지 구호인지. 타닥 탁탁 불꽃 터지는 소리 따라 꽹과리, 장구 소리 거기 섞여 요란스런 광장에서 젊은 연인이, 또 주름진 부부가 딱 붙어 정겹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되새겼는데, 털점퍼 길에 벗어두고 펄쩍펄쩍 날뛰던 교복차림 소년 소녀까지 누구나가 늦은 밤 광장에서 깨어 즐겁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작가


골든타임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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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무직파업선언.jpg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간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고, 비정규 노동자들이 유령 가면 쓰고 광장에 섰다. 미룰 일이 아니라고, 지금 당장 나설 일이라고 팻말 들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얘기 풀어내다 보면 땡볕 아래 회견이 길었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였다. 누구나의 상식을 구호 삼아 외쳤다. 퇴행이 오래도록 빠르고 깊었던 탓이다. 꽃도 한 철이다. 오랜 가뭄에 바짝 타들어 가는 게 논밭의 작물과 거리의 나무만이 아니다.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겨울, 거울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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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거울.jpg


거기 액자에 김용균 아닌 누가 들었대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의 광장에서 운이 좋아 죽지 않은 그의 동료가 유행 지난 롱패딩을 입고 서성인다. 비질하고 꺼진 촛불에 불 놓아 살린다. 꺼지지 않는 향에서 연기 오르는 동안 회색빛 재가 툭툭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쌓여 간다. 어느새 수북했다. 철을 모르고 싱싱한 국화가 또한 그 앞에 쌓였다. 뒷벽에 빼곡하게 붙은 온갖 추모의 글은 사진을 인쇄해 붙인 것이니 진짜가 아니었다. 수년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붙은 접착식 메모지는 지금 다른 이의 영정 뒤에 병풍처럼 붙어 묵은 추모를 새롭게 이어 간다. “당신의 죽음은 사회구조적인 죽음입니다.”라는 말이 다만 진짜였다. 달라진 것 없는 죽음 뒤에 붙은 추모 문구가 달라질 리 없었다. 촛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외투 주머니에 손 넣은 채 잔뜩 움츠린 사람들이 그 앞 횡단보도를 끝없이 오갔다. 거기 누가 들어도 어색할 것 없는 영정 액자에 빛 들어 수은주 새겨 넣은 등대 조형물이 비친다. 김용균을 처음 발견한 동료가 이불 같은 점퍼에 손 넣은 채 죽음 옆자리에 머문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겨울

by 센터 posted Dec 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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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국회.jpg

 

국회 앞에 농성 천막 빼곡하니, 비로소 겨울이다. 거기 온갖 집회와 행진이 많아 시 끌벅적하니, 연말이다. 무성하던 잎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처럼 삐쩍 말라  가는 사람들이 둥그런 돔 가까운 곳에서 터덜터덜 기운 없는 발걸음을 옮기는 때가 바 로 겨울이고, 연말이다. 밥보다 법이 급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가슴팍에 일력을 달고 하 루하루를 찢는다. 노조법 개정을 따뜻한 잠자리보다 밥이 중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가 슴팍에 핫팩을 끼고 누에고치처럼 실을 짜 그 안에 든다. 밥 짓다 죽지 않겠다고, 급식 실 인력 확충과 복지수당 차별철폐를 말한다. 중단하라, 폐지하라, 제정하라, 저마다 의 절절한 구호 담은 색색의 현수막이 넘쳐 국회 앞 단풍이 철 지나도록 질 줄을 모른 다. 집회 행진하던 사람이 노숙농성 중인 지역 동료를 만나 응원의 5만 원을 건넨다. 날  춥다기에 십수만 원도 넘는 빵빵한 오리털 침낭을 검색했던 사람은 마트에 파는 3만 원 짜리 합성 솜 침낭을 작은 텐트에 넣는다.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니라고, 다들 능숙했는 데, 찬 바람에 아린 볼이며 손끝의 감각은 매번 새로운 것이어서 핫팩을 끼고 산다. 법 치며 불법 엄단이며, 온통 법 얘기만 높아 스산한 계절 겨울이다. 법 짓는 곳 앞마당에  밥 짓는 사람과 배 짓는 사람이, 또 회사 청산을 막으려는 사람이 다 만나 서로를 응원 하는 계절이다. 겨울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개 풀 뜯어먹는 소리

by 센터 posted Jun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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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개풀뜯어먹는소리.jpg


한강 노들섬 사는 개 노들이 2세가 한가로이 풀을 씹는다. 보통 터무니없는 말을 두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하는데, 개는 종종 풀을 뜯는다. 먼 친척 중에 진돗개도 있다는데, 종류를 딱히 말할 수는 없단다. 동네 흔한 똥개다. 사람을 물지 않는단다. 거기 텃밭 도시 농부들이 오며가며 아는 체를 하면 좋다고 꼬리치며 바닥을 구른다. “앉아” 소리도 잘 알아듣는다. 지킬 것도, 딱히 바쁠 일도 없어 노들이는 내내 노닐었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에 귀가 쫑긋, 경찰 무전 소리에 화들짝 잠시 놀랐지만 곧 풀 뜯고 자빠졌다. 주말도 아닌데 그 일대가 북적거렸다. 개팔자가 상팔자, 뒷발 들어 가려운 목을 긁다가 파리 사냥에 나섰다. 꼬리 물고 빙글빙글 돌다 멈추고 누군가 던져준 마른 뼈다귀를 으적으적 씹었다. 지금 고분고분 그릇에 얼굴 묻고 사료를 먹지만 그도 분명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졌다. 한때 산과 들판을 자유롭게 내달리며 사냥했고, 날고기 맛을 봤다. 안정적인 먹이와 비와 추위를 피할 나무 집, 그리고 적잖은 애정을 얻었지만 쇠사슬이 그 대가였다. 노닐었지만 그건 쇠사슬 길이 만큼이었다. 빵빵, 자동차 경적이 요란했다. 길 막혀 답답한 사람들이 창문 내려 개새끼를 찾았다. 멍멍, 노들이가 짖었다. 신호등엔 노란 불이 점멸했다. 노동자 둘이 현수막 들고 한강대교 아치를 거닐었다. 카메라가 몇 대 왔고, 국회의원이 왔고, 기사가 몇 줄 났다.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거리라는데, 요사이 노동자는 어딘가 올라서야 잠시 뉴스가 된다. 이게 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일 텐데, 개는 풀을 뜯어 먹는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가면

by 센터 posted Oct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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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와이퍼.jpg

국정감사 시작하던 날, 저기 자동차 와이퍼 만드는 노동자가 푸른 수의에 가면 쓰고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정문 앞에 앉았다. 목소리 내내 높였다. 그 앞 지나는 국회의원들이, 또 기자가 보고 한 번 보고 묻고 찍기를 바랐다. 바람에 그쳤다. 애써 준비한 보람이 적었다. 눈에 띄기를, 말이 돌기를 바라는 일이 대개 그렇다. 지나던 카메라를 무척이나 반긴 이유다. 저 가면의 주인공은 인근 식당에서 국수 한 젓가락을 뜨던 참이었다. 전화 받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고용노동부 건물을 무대 삼아 상황극을 선보였다. 외국 자본의 먹튀 행각을 꼬집었다. 위장청산 의혹을 제기했다. 국수 면발이 다 붇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숨도 고르질 못하고 가면을 벗고 뛴다. 가면, 속뜻을 감추고 겉으로 거짓을 꾸미는 의뭉스러운 얼굴 혹은 그런 모습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한다. 그 가면을 벗겨 속뜻을 밝히겠다고 길에 나선 사람들은 천막을 치고, 집회를 하고, 먼 길 뚜벅이 행진에 나선다. 눈에 띄기를, 말이 돌기를 바라며 뭐든 한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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