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다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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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비행선.jpg


겨울, 눈이 내리고 사람은 오른다. 바람 잘날 없어 현수막이 운다. 아랫자리 지켜 선 사람들은 목 꺾어 바라보다 몰래 운다. 목재 화물운반대 땔감 삼아 피운 불에 언 몸을 녹인다. 아지랑이 타고 재가 오른다. 줄 따라 보조 배터리가 오르고 빈 것이 내려온다. 두 번째 겨울, 기온은 낮고 사람은 저만치 높다. 연기 오르지 않는 굴뚝을 향해 땅바닥을 기어간 사람들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내려 오질 않는 사람의 형체를 살피던 눈이 붉다. 곡기 끊어 호소했다. 기간의 정함이 없었다. 또 어디 굴뚝 높은 일터에서 맞은 첫 번째 겨울, 스물넷 청년이 늦은 밤 홀로 일하다 하늘로 올랐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팻말 든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남은 사람은 더 이상 죽이지만 말아달라면서 울었다. 향 피워 연기 올랐다. 재 떨어져 향로에 쌓여간다. 고개 떨군 사람들이 촛불을 들어 올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오랜 구호가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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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서비스.jpg


나두식 노조 지회장이 합의서를 살펴본다. 진즉에 문구 한 줄, 토씨 하나 수없이 확인했을 테다. 거기 회사는 협력업체 직원들을 직접 고용한다고, 또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고 합법적인 노조 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었다. 오랜 구호였다. 등에 새기고 목청에 새긴 것이었다. 오랜 시간 길에서 뱉은 말이었다. 먼저 간 동료의 유서 내용이었다. 서명 마친 합의서를 다시 살폈고, 스마트 폰 들어 기록했다. 카메라 든 삼성의 홍보팀 직원이 손잡은 노사 대표자의 화기애애한 표정을 주문했다. 굳은 표정의 지회장과 노조 간부들이 잠시 웃었고 찰칵, 기록으로 남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오! 재미

by 센터 posted Aug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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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 내걸렸다. 세월호 유가족이 앞장섰다. 파업 중인 티브로드 노동자가 뒤따랐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이니, 생활임금 쟁취는 소박했지만 절박한 요구였다. 박 대통령과 여당은, 또 원청 사용자는 모르쇠로 버틴다. 짐짓 뒷짐이다. 문전박대가 한결같아 야박했다. 모래주머니 쥔 손에 힘 들어갔다. 이 꽉 깨물고 던졌다. 두들겨라, 언젠가 열릴 것이다. 박 터지게 던지니 박이 터졌다. ‘안전규제 강화’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려왔다. 박수가 터졌다. 웃음 뒤따랐다. 오! 재미도 있다. 대박이다.


축소_박터지게4.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Atachment
첨부파일 '1'

옛날이야기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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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거짓말.jpg


아이가 한 번씩 뻔한 거짓말을 한다. 곧장 타이르기는 피하고 싶었으니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다. 그러니까 옛날에 말이야 양치기 소녀가 있었는데···. 두어 번은 잘 듣더니 금세 지겨운 모양이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피노키오 이야기로 돌려막았다. 거짓말은 나쁘다는 걸 알려 주는 맞춤형 이야기들이다. 얼마간 효과가 있었다. 일하며 찍은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정리하는데, 피노키오를 알아본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이게 뭐냐고 물었다. 글 읽는 아이 앞에서 거짓말로 둘러댈 수도 없어 우물쭈물 설명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기다란 코에 적힌 노동기본권 보장이며 비정규직 제로시대 같은 것들을 말해주느라 새로운 피노키오 이야기를 지어내야만 했다. 일하다 죽은 사람들 이야기에 이르니 이어 가기가 버거웠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다. 여러 처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켜지지 않아 거짓말이 돼버린 약속을 줄줄이 읊었다. 촛불 행진을 선언했다. 생선 굽느라 켜둔 촛불을 보고도 광화문광장 구호를 떠올리는 아이가 저기 사진 속에 적힌 촛불 행진에 관해서도 물었다. 그때와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것이기도 하다며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옛날 옛적에 사람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는데···. 훗날 광장의 촛불 이야기는 어떤 교훈을 품게 될까 생각해 봤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연인은 웃는다

by 센터 posted Aug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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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바.jpg

 

빵 굽던 사람과 그를 응원하는 이들이 한여름 지글지글 끓던 아스팔트에 철퍼덕 붙어 몸을 굽는다. 벌겋게 잘 익은 얼굴에서 떨군 땀방울이 그들 느릿한 오체투지 행진의 흔적을 한강대로 불판에 잠깐씩 남기곤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흐릿했다. 그 길에 사람들이 아무도 웃지 않았는데, 제빵사 임종린이 다 엎어진 길에 혼자 삐죽 일어나서는 잠깐 웃었다. 내내 반 박자가 빨랐다. 전에도 그는 삐죽 먼저 일어나 밥을 오래 굶었다. 험한 길이다. 교차로 건너 잠시 쉬어 간다. 앉고 눕고 기대어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쉰다. 그들 곁에 딱 붙어 부채질하고 물을 건네고 땀을 닦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널브러진 사람들 잔뜩 찡그린 얼굴에 웃음 번진다. 저기 투쟁 머리띠 맨 스물넷 청년이 행진에 동참한다고 했을 때, 그의 연인은 말렸단다. 고집이 세서 어쩔 수도 없었다고. 옆자리 서서 걷는 것으로 응원했다. 부채질은, 물에 적신 손수건을 목에 둘러주는 일은, 눈 맞춰 괜찮냐고 묻는 일은 대개 간지러운 일인 것인지, 내내 웃음 터진다. 종종 어깨에 폭 기대어 부빈다. 땀 냄새를 나눈다. 엎어지고 일어나는 사람들 곁에 팻말 든 사람들 있어, 잔뜩 찌푸린 벌건 얼굴 땀 닦으라며 수건 건네는 누군가 있어, 또 한 번의 행진 소식 듣고 멀리서 찾아와 함께 바닥을 기는 사람이 있어 거기 고된 길에 웃음 돈다. 파리바게뜨 사태 해결을 위한 오체투지 행진 길에 여러 인연으로 모인 사람들이 연인처럼 다정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엄마 눈물이 툭

by 센터 posted Nov 0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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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눈물이 툭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217867_95077_4217.jpg

 

 

안전고리도, 안전모도, 안전교육도 없이 일용직 하청노동자가 툭, 떨어졌다. 먼 길 떠났다. 이해할 수도,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 먼 길 나선 늙은 엄마 눈물이 툭, 아 들 영정 위로 흐른다. 내 아들을 살려내요, 내 아들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이 엄마의 가슴은 찢어지도록 아픕니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비세요. 빌어야 합니다. 영정 끌어안고 엄마가 끊기질 않는 곡을 한다. 통곡 소리 원청 본사 번듯한 로비에 울린다. 툭하면 떨어지고, 끼이고, 깔려 죽는다. 눈물이 툭, 영정 타고 흐른다. 마를 날 없다.


언제나 분수처럼

by 센터 posted Apr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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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금지.jpg


개나리 꽃망울 터지듯 와글와글 피어나던 아이들 웃음꽃이 더는 광장에 없다. 솟구치는 분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아이들 뒤꽁무니를 쫓다 그만 포기해 버린 엄마 아빠의 걱정 섞인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 4월이면 시간표 따라 어김없던 일인데, 기약 없는 일이 됐다. 언젠가 잘게 부서진 물방울이 낮은 햇볕 머금어 무지개가 뜨면, 갖은 색깔 옷차림 아이들이 그 아래를 우당탕 뛰었다. 그리고 지금 잿빛 돌바닥엔 도심 내 집회 금지를 알리는 알림판만이 바람을 견딘다. 기약 없는 분수를 정비하느라 한 시설관리 노동자가 허리 굽혔다. 새로운 일상은 예고도 없이 스몄다. 전문가들은 앞다퉈 닥쳐올 경제 위기를 예고했다. 바닥에선 이제 아우성이 솟구친다. 해고 금지 팻말 든 사람들이 광장 언저리에서 이미 닥친 현실을 증언했다. 언젠가 그 바닥의 분수처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어느새 훌쩍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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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jpg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난 폭염의 기억이 어느새 멀다. 부쩍 찬바람 불어 사람들 옷차림이 훌쩍 두껍다. 바싹 마른 잎이 길에 뒹군다. 마음 따뜻한 가을 이야기가 청사며 어느 서점 외벽에 붙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오랜 적대의 기억도 얼마간 흐릿하다. 평양냉면 가게엔 단풍이 들도록 줄이 길다. 대동강 맥주 얘기는 호프집 술안주다. 고무찬양에 거리낌 없다. 막걸리 가게도 왁자지껄, 끌려가는 이 없이 평화롭다. 두 정상이 천지에 올라 손잡은 사진이 시청과 지하철 벽 여기저기에 붙어 분위기를 전했다. 훌쩍 가을, 광장엔 온갖 축제가 많아 잔디가 성치 않다. 보수 나선 조경 노동자가 수레를 민다. 축제 무대 설치 알바 나선 청년이 깔개를 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된 밥벌이가 또 하루 별일 없이 계속된다. 주름진 얼굴도, 생기 도는 이마도 가을볕에 훌쩍 단풍처럼 익어간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어느 출근길

by 센터 posted Dec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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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한편 밝게 빛나는 전광판에 사람 둘이 올라 겨울바람을 버틴다. 현수막 내걸고 농성한다. 가끔 손짓을, 때때로 구호를 외친다. 그 아랫자리에 비닐 집 짓고 동료들이 버틴다. 자주 고개 꺾어 하늘을 살핀다. 저녁 문화제에 선보일 노래 연습을 한다. 틈틈이 누워 쪽잠을 청한다. 낡은 침낭이 한낮 인도 위에 능청맞게 뒹군다. 끼니 삼은 단팥빵 포장지가 바람 따라 구른다. 바싹 마른 귤 껍데기가 분주한 발길 아래 바스러진다. 노숙 농성이 이미 길었다. 고공 농성이 어느새 기약 없다. 어서 퇴근하여 가족과 함께 지내라는 정부 광고가 전광판에 오른다. 하트 뿅뿅 정겹다. 태극기 휘날린다.



축소_어느 출근길.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슈퍼맨은 아직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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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jpg


해거름, 어린이집 향해 뛰다 걷다 경보하느라 아빠는 숨 가쁘다. 발이 꼬인다. 언 땅을 밟고 허둥댄다. 돌아온 슈퍼맨은 하원 시간 맞추느라 쩔쩔맨다. 슈퍼 가자고 징징대는 아이와 씨름하느라 길에서 떤다. 눈에서 레이저를 쏜다. 아빠 왔다 소리가 제일 반가웠을 아이한테 못할 말을 하고 만다. 코로 먹는지 눈으로 먹는지 저녁밥을 때우니 잘 시간이다. 놀겠다고 버티는 아이와 싸우던 끝에 산타할아버지를 소환했다. 잠자리에 평화가 찾아왔다. 산타 선물은 택배로 오는 거냐고 아이가 물었다. 아마도, 산타는 요즘 너무 바쁘거든. 해질녘, 로켓배송하느라 잰걸음 종일 놀렸을 쿠팡맨이 짐칸에서 바쁘다. 당일 배송 굳은 약속 지키느라 저녁이 없다. 일 150건 이상 배송, 고객 설문 만점, 무결점 근태를 지키지 못하면 정규직 전환 기회는 없단다. ‘하늘의 별 따기’란다. 계약 해지 걱정에 쿠팡맨은 전전긍긍한다. 별 보며 일한다. 얼마 전 각양각색 옷차림의 택배 노동자들이 노조 깃발 아래 모였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싸움에 나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손잡아 주는 일, 기대어 서는 일

by 센터 posted Dec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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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jpg

 

아들 먼저 보낸 엄마는 오늘 또 눈이 퉁퉁 부었는데, 전처럼 사람 많은 데서 자주 울지는 않았다. 3주기를 맞아 엄마는 자신을 사회운동가로 소개한다. 억울한 죽음을 막는 일을 한다. 떠난 이의 이름을 딴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과 중대 재해를 처벌하는 법을 곡절 끝에 만들었지만, 죽음이 여전하다. 김용균의 동료는 지금도 비정규직이다. 탄가루 쌓인 현장에서 언제든 자신에게 덮칠 수도 있는 참사를 예감한다. 그러니 추모는 지금도 시위가 된다. 영정은 말 없는 구호다. 아들 잃은 엄마가 동생 먼저 보낸 누나 손잡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지금껏 길에서 바쁘다. 검은색 긴 패딩 점퍼 벗을 날이 없다. 국회에서 열린 추모 사진전에 가면서 지독하게 추웠던 지난해 국회 본관 앞 단식농성장을 회상한다. 그즈음부터 유가족의 영상을 기록하던 다큐멘터리 감독이 오늘 건넨 손편지를 손에 들고 엄마는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말하고 또 말했다. 그뿐인가. 곁을 지킨 사람들이 많았다. 주저앉지 않고 3년을 달려온 힘이다. 사람들은 기대어 선다. 손잡고 산다. 선거철이니 유력 정치인의 악수야 뻔하고 흔한 일이라지만 여전히 절박한 엄마는 두 손 포개어 꼭 쥔다. 눈 맞춘다.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 그 뻔한 말을 하느라 오래도록 잡고 섰다. 카메라 다 떠나고 돌아서는데, 엄마는 울지 않았다. 그저 삼켰던지, 낯빛이 온통 붉었다. 옆자리 울음 터진 고 김태규의 누나 손을 꼭 잡고 다독였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설 자리

by 센터 posted Jan 0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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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자리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노동에세이.jpg

 

 

규탄하고 촉구할 것이 많아 길에 나선 사람들 구호 따라 입김이 뽀얗다. 맞춰 입기라도 한 것인지 검은색, 또 길고 두터운 패딩점퍼 차림 사람들이 팻말 든 손가락을 파고드는 한기를 어쩌지 못해 자꾸 꼼지락거린다. 그 중 누군가 곡기 끊고 말라가는 사람도 있어 추운 티를 내지 못한다. 동료가 건넨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철 따라 바람 따라 낙엽 구른다.

길에 나서 말하기 고된 철이다. 설 곳 좁아 더욱 그렇다. 한때 울긋불긋 농성 천막 줄줄이 많았던 고용노동청 앞자리에, 또 기자회견 줄을 선 대통령실 앞에 질서유지선이 길고도 촘촘하다. 거기 겨울을 견뎌 사철 푸른 나무 든 커다란 화분이, 아니, 실은 죽지 도, 썩지도 않는 나무 모양 조형물이 빼곡하다. 경찰이 많다.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작동하지 않았던 공권력은 길에 나선 노동자 열댓 명 앞에 추상같았다. 질서정연한 폴리 스라인 안쪽으로 낙엽만 쌓인다. 바람에 뒹군다.


사라져야 할 것들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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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처럼.jpg


한때 크고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는 기자증을 대신하곤 했다. 공연장이나 공사 현장에서 형광 스태프 조끼가 그러했듯 말이다. 좋은 촬영 조건을 찾아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오른 건 대개 큰 카메라였다. 스마트폰은 눈치를 살펴 주저했다. 오랜 관습이었으나 곧 뒤집어질 구습이기도 했다. 누구나가 찍는다. 저마다의 언로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대형 집회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올라 스마트폰과 태블릿 피시와 소형 캠코더로 찍는다. 생중계한다. 시청자와 독자를 지닌 미디어는 적어도 그 자리에서 눈치 보지 않고 과감했다. 주최 측은 1인 미디어를 차별하지 않았다. 기자만이 찍고 알린다는 건 낡은 질서에 들었다. 사법적폐 청산을 외치던 촛불집회엔 구호가 다양했는데, 그중 언론 개혁 팻말이 적지 않았다. 기레기 표현이 잦았다. 엘이디 촛불을 든 사람들이 크고 무거운 카메라 든 기자들에게 똑바로 하라고 질책했다. 드론이 날아 담은 촛불 파도 영상이 무대 위 유튜브 생중계 화면에 흘렀다. 천박한 구시대 유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최후통첩에 적었다. 무대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사라졌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비보호

by 센터 posted Jun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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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호.jpg

 

재수 끝에 운전면허를 따낸 어떤 청춘은 당장 차를 끌고 여기저기 달려 볼 생각에 설렌다. 늦은 밤, 탁 트인 자유로를 달리며 평소 꼼꼼하게 선곡해 둔 드라이브 음악을 튼다. 창을 내리고 선선한 바람을 맞는다. 스트레스를 날려 보낸다. 어느 주말이면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들었던 한적한 동네를 찾아가 유유자적 거닌다. 동해안으로 달려 볼까. 저 아래 남쪽 마을은 또 어떨지. 대형마트 장 보는 것도 이제 문제없다. 그러나 초보 운전자는 오늘 도심 복잡한 도로에 나가 거친 야생 속 초식동물의 삶을 겪고야 만다. 온통 바쁜 사람들뿐인 그 도로에 자비란 없으니, 홀로서기 생존이 쉽지 않다. 빵빵 소리에 화들짝 놀라 가슴 뛰는데, 좌회전 신호는 들어오지 않는다. 건너편 직진 차량은 끊이질 않는다. 머릿속이 하얗다. 동공엔 지진이 온다. 어느새 적신호다. 비보호 좌회전은 도로의 효율을 위해서 만든 것이라는데, 능숙한 운전자라도 매번 쉽지 않다. 사고가 날 경우엔 높은 과실 비율을 떠안게 된다. 보호받지 못하는 나의 갈 길을 어찌하나. 비보호 좌회전 표시는 영 반갑지 않다. 마침 표지와 겹쳐 보인 저기 노동자 신세가 또 어떤가. 사람이 들어가 점검하는 중에도 제철소의 기계는, 발전소의 컨베이어벨트는 멈추지 않았다. 안전을 지켜봐 줄 동료가 곁에 없었다. 효율 때문이다. 돈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니 벨트에 말려들어 사람이 죽어 나간다. 끼이거나 떨어져 크게 다친다. 온갖 적신호에도 질주는 쉬이 멈추지 않아 산재 공화국 오명이 여태 선명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붉은 ‘농성’

by 센터 posted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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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오.jpg

 

에 안 보이면 흐릿해진다. 기억은 시간을 이기지 못해 풍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길에 나와 싸우는 사람들은 뭐라도 한다. 굶고 기고 소리 지르는 것 같은 일 말이다. 잊히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 농성 천막이 있다. 거기, 꿈적 않는 사람이 있다. 한때 굶고 땅을 기고 점거 농성을 벌였던 그들은 오늘 또 새로운 농성 날짜 팻말을 건다. 455일, 코로나 위기와 함께 시작된 싸움이 길다. 언젠가 구호 새겨 그 앞에 걸어둔 일회용 방역 마스크엔 매연이 덕지덕지 붙어 잿빛이다. 정년이 진작에 지났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한다. 부당해서라고, 또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잘못한 게 없으니 그렇다고 했다. 노조 만들어 싸운 죄가 다만 중했다. 유명 로펌을 앞세운 회사는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큰돈을 아끼지 않았다. 지노위와 중노위의 부당해고 판정에도 행정소송이 뒤따랐다. 얼마 전 감옥에서 풀려난 어느 재벌 얘기를 하면서는 험한 소리가 따라붙었다. 개돼지 신세를 한탄했다. 안 해본 걸 꼽기가 어려운 이들은 이제 포기 않고 버티기를 하는 중이다. 낡은 천막 안에 걸어둔 달력에는 연대투쟁 일정이 빼곡하다. 행정소송 선고일도 거기 보인다. 인스턴트 커피를 찬물에 풀어 냉커피를 만든다. 양재동 법원 앞 기자회견에 갈 준비를 한다. 마스크를 고쳐 쓴다. 원래는 붉었을 농성 두 글자가 물이 다 빠져 이제는 누렇다. 아시아나케이오 해고자의 농성 천막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분리수거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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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구속행진.jpg


높다란 빌딩 휘황찬란한 강남 대로엔 담배꽁초 따위 쓰레기가 안 보여 말끔하다. 곳곳에 펄럭이던 대형 태극기 아래에 안보 1번지 선전문구가 또렷하다. 명품도시 자부심이다. 오랜 버릇 끊지 못해 또 한 대 꺼내 문 사람들이 안 보이는 구석을 찾아들어 빠끔거린다. 찬바람에, 또 벌금에 벌벌 떤다. 정경유착, 그 버릇 끊지를 못해 수백억 뇌물 꽂던 사람들의 초상이 무개차 위에 수의 차림으로 섰다. 쓰레기통 지나 광화문 소각장을 향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범죄자는 감옥에 넣는 것이 이치에 맞다. 썩은 내 진동하는 탓에 재활용이 어렵다. 복권 사면 매번 꽝이다. 철저한 분리수거야말로 시대의 과제다. 담배꽁초 따위 말고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 파괴 없는 세상이야말로 깨끗한 세상, 명품세상 아니던가.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봄 마중

by 센터 posted Feb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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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중.jpg

 

내복에 두꺼운 점퍼를 벗지 못하고 산다. 길에서 바들바들 떨었던 기억 탓이다. 칼날 같던 바람이 어느새 산들산들, 훌쩍 창밖으로 봄기운 스민다. 습관처럼 껴입은 나는 별 수도 없이 땀 흘린다. 그제야 봄 가까운 줄을 안다. 청소해야지, 이불을 빨아야지, 내 맘속 묵은 때도 좀 털어야지, 새봄맞이 계획을 세워 볼 만할 때다. 봄볕 소중한 줄을, 겨울 혹독하게 겪은 사람이 안다. 저기 병원 청소 노동자는 인터뷰 기다리는 그 시간을 그냥 보내질 못하고 틈틈이, 꼼꼼히 걸레질한다. 창가에 가지런히 둔 화분을 제집 것인 양 살뜰히 살핀다. 우유를 물에 섞어 주면 좋다고 집과 일터에서 비밀의 화원을 가꾼 노하우를 전한다. 빨간색 제라늄꽃과 초록의 이파리는 그곳 재활의학병동 휠체어 탄 환자와 간병인 누구나의 시선을 오래 잡아끈다. 사방에 꽃망울 팡팡 터지는 창밖의 봄을 떠올리게 할 테다. 걸레질하는 ‘여사님’은 카메라 앞에 서기를 처음에 꺼렸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단다. 곧, 찍어도 괜찮다고 했다. 정규직 됐다니 그건 좋은 일이었다. 월급이 많이 오른 것도 아니라 민망하다고 노조 사람은 말했지만, 복지 혜택과 고용안정이 저이에게 봄볕 같았다. 마음 써 가꾼 화분 옆에 앉는다. 손 뻗어 꽃 옆에 둔다. 시선은 카메라를 향한다. 사진첩에 수십 장은 보일 법한 그 포즈를 자연스레 해낸다. 능숙한 걸레질에 바닥이 반짝인다. 살짝 주름진 얼굴에 봄볕 들어 웃음꽃 피어났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기자


밥 냄새

by 센터 posted Jun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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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보호.jpg

 

어느 저녁 연장 가방 달그락거리며 집에 들어온 아빠 몸에선 시멘트 냄새가 났다. 발 구린내가 섞였다. 종종 술 냄새, 홍어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얼굴 벌건 아빠가 까칠한 턱으로 내 얼굴을 부볐다. 땀 냄새가 시큼했다. 싫다고 버둥거렸다. 그게 다 밥 냄새였다. 저기 조경관리 노동자들이 초여름 땡볕 아래 연신 허리 굽힌다. 거름 포대 둘러매고 청와대 앞 너른 화단을 훑는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동작으로 거름을 흩뿌린다. 구린내가 진동한다. 지극한 관심 덕에 잔디는, 또 거기 색색의 꽃과 온갖 풀이 쑥쑥 자란다. 뒤편 가족상이 변함없이 화목하다. 폐지 더미에 깔려 퇴근하지 못한 아빠의 죽음을 알리느라 상복 입은 딸이 양손 가지런히 모은 채 기자들 앞에 선다. 초점 흐릿한 눈으로 먼 데를 살피다 종종 고개를 숙인다. 험한 말을 참느라 꺽꺽 말이 끊긴다. 옆자리 함께 선 유가족이 등을 쓰다듬는다. 현장을 목격한 동료는 마이크를 잡았지만 끝내 말 한마디를 못 하고 만다. 지극한 관심사에 들지 못해 오늘도 사람들은 일하다 죽는다. 깔리고, 끼이고, 질식하고 떨어져 그렇다. 그 저녁 뜨뜻한 밥 한 공기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고 제삿밥을 받는다. 향냄새만 짙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발전 없다

by 센터 posted Aug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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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없다.jpg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멘 라이더는 토끼처럼 빨라야 했다. 재빨리 눈을 굴려 콜을 확인해야 했고, 밥이 식기 전에 자전거와 오토바이 타고 내달려야 했다. 신호등 붉은빛은 밥 식는 신호였고, 평점 깎이는 표시였다. 차와 차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좁은 틈이 갈 길이었고, 살길이었다. 세차게 쏟아지던 장맛비 속에서도 페달 질을, 액셀러레이터 당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국이 식기 전에, 아이스아메리카노 얼음이 녹기 전에 가야만 했다. 넘어지면 국물 걱정, 일어나면 시간 걱정, 다치면 치료비 걱정을 했다. 새빨간 떡볶이 국물 같은 피가 흘러도 떡이 불기 전에, 튀김이 눅눅해지기 전에 목적지에 가야 했으니 그들은 거북이 등짐 지고 내달렸다. 그러는 사이사이 배차 기회를 잡기 위해 스마트폰을 살펴야 했다. 배터리는 빨리 닳았다. 보조배터리 크고 묵직한 것을 밥 가방 한구석에 넣고 긴 줄로 연결해 충전해 가며 살펴야 했다. 충전 선이 곧 밥줄이었다. 그러니 그는 노동 3권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자리에 서서도 그 줄을 치렁치렁 달고 있었다. 할 말을 그 끝 스마트폰에 적어 읽었다. 플랫폼이니, 4차 산업이니 하는 수익 모델은 빠르게 발전하는가 본데, 일하는 사람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움직임이 느렸다. 발전이 없다. 3일이면 나올 노조 설립신고증을 받기 위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를 그들은 걱정했다. 기자회견이 끝났고 털털거리던 발전기가 멈췄다. 라이더는 잠시 내려둔 밥 가방을 다시 멨고, 충전선 길게 늘어진 스마트폰을 살피느라 거기 노동청 앞 화단 턱에 한동안 꾸부정히 앉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무사고 사이

by 센터 posted Sep 1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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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고사이2.jpg

 

 

 

무사고 사이에 사고가 끼었다. 한 글자 작은 차이에 사고가 있다. 빵 만드는 공장 반죽기에 끼어 노동자가 죽었다. 처음도 아니다. 밥벌이 나선 사람이 퇴근하지 못해 그날 저녁 밥상에 국이 싸늘하게 식는다. 갓 지은 고봉밥 오른 제사상을 받는다. 향냄새 짙다. 그 공장엔 무사고와 안전예방 구호 새긴 형광 조끼가 많고,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 팻말도 있고, 재해 예방을 위한 두툼한 지침서도 있을 테다. 대체 무엇이 없어 한 글자 작은 차이 사고를 불렀는지 보려고 찾아간 국회의원들을 막아선 배짱이 또한 두둑했다. 정문 앞 위생모자 쓴 사람들 어깨 사이에 빈틈이 없었다. 공장 앞마당 막고 줄줄이 세워둔 물류트럭 사이 틈도 그랬다. 세상 가득 맛과 행복을 전달한다고 그 트럭에 적혀 있다. 그 너머로 삐죽, 공장 굴뚝이 높았다. 막지 못한 죽음을 두고 막아선 이와 막힌 사람들 언성이 자주 높았다. 빈틈없는 출입 관리로 그 회사 문턱이 끝내 높았다. 사니 죽니 하는 일 어딘가에 다만 빈틈이 있어 조끼에 새긴 무사고 구호가 오늘 또 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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