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사람들은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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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즐겁다26.jpg


친구와 더불어 사람들은 즐겁다. 입에 붙은 노랫말 흥얼거리며 잠시 머물다가, 앞선 방송차 없이도 이제는 익숙한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누군가 앞서 외친 구호 따라 퇴진하라, 구속하라 추임새를 거든다. 모이고 또 모여 저마다의 함성이 으레 거기 높다란 돌담을 넘는다. 아이 목말 태운 아빠는 목이 휜다. 외치느라 목이 쉰 엄마가 아이 옷깃을 여민다. 팔 쭉 뻗어 손팻말을 들고, 팔 쭉 뻗어 셀카를 남기며 사람들은 살갑다. 퇴진 군밤 팔던 장수가, 하야 마스크 팔던 노점상 청년이 그 길에 바빠 흥겹다. 호두과자 익는 연기가 폴폴, 횃불 기름 타는 냄새가 풀풀. 종종 머리칼 타는 냄새가 솔솔 퍼지니 비명인지 구호인지. 타닥 탁탁 불꽃 터지는 소리 따라 꽹과리, 장구 소리 거기 섞여 요란스런 광장에서 젊은 연인이, 또 주름진 부부가 딱 붙어 정겹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되새겼는데, 털점퍼 길에 벗어두고 펄쩍펄쩍 날뛰던 교복차림 소년 소녀까지 누구나가 늦은 밤 광장에서 깨어 즐겁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작가


줄초상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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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사람들 흰 국화 들고 줄줄이 섰다. 얼굴 없는 영정 앞에 향을 피웠고, 고개 숙였다. 안전화와 안전모와 안전띠가 그 앞자리에 가지런했다. 망자의 것은 아니었다. 2013 대한민국 안전대상 소방방재청상 수상 기념 동판이 박힌 어느 통신 대기업의 높다란 빌딩 앞이었다. 일터는 높았고, 비가 줄줄 내렸다. “일이 많이 밀려 있다. 다 처리하라”는 회사의 지시가 떨어졌다. 전봇대를 올랐다. 툭 떨어지던 몸을 잡아 줄 안전줄이 없었다. 머리를 지켜줄 안전모가 거기 없었다. 감전의 흔적이 손에 남았다. 밥 벌어먹기를 바랐던 그는 누워 젯밥을 받았다. 꽃 피워보지 못한 그 이름 앞에 활짝 핀 국화가 쌓였다. 안전은 저기 원청의 경영 지침에 그쳤다. 다단계 하도급 고질병이 뿌리 깊다. 모두의 상식으로 그 죽음은 외인사였으나, 끝내 병사로 남는다.떨어지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비처럼 떨어지던 비정규 노동자 혹은 근로자영자의 작업복 가슴팍에, 또 영정 놓인 높다란 빌딩 앞에 주황색 ‘행복날개’가 있다. 헛된 것이어서 오늘 또 국화가 팔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폐허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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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머리에 빨간색 띠를, 왼쪽 팔엔 붕대를 두른 이재헌 금속노조 갑을오토텍지회장이 서울 용산구 갑을빌딩 앞에서 기자를 기다렸다. 앞자리가 한산했다. 건물 안 경비노동자가 폐문 알림장을 유리문에 붙였다. 양복 차림 사람들이 종종 폐문을 드나들었다. 약속한 시각, 마이크 잡아 말을 풀었는데 말 못할 사연이 많아 말이 길었다. 노조 파괴를 규탄하고 교섭을 촉구했다. 주먹 종종 쳐들어 기세 높였으나 구호는 건너편 버스정류장을 향했다. 무전기 든 경찰이, 수첩 든 회사 직원이 멀찍이서 바빴다. 그 앞 비좁은 인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잠시 멈칫거리다 고개 숙여 휙 지났다. 찌푸린 표정이었다. 푹푹 찌는 날이었다. 홍보팀 직원이 한참을 달려와 다른 기자가 왔는지를 물었다. 다른 기자가 없었으니 대화가 짧았다. “아무래도 사안이 그렇긴 하죠. 노동뉴스니까 오셔야 했을 테고”라고 직원은 덧붙였다.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다음날 포털사이트 뉴스 면에 갑을오토텍 인도법인이 인도 서부지역에서 남부 항만도시로 이사했다는 뉴스가 깔렸다. 사진도 내용도 한 모양새였다. 홍보팀 직원이 진땀을 뺀 모양. 불편한 기사는 구석에 파묻혔다. 물량 공세는 성공했다. 직장 폐쇄와 용역 투입, 복수노조 설립으로 이어지는 노조 탄압도 오랫동안 성공적이었다. 칼날은 대개 비정규직 없는 공장을 향했다. 부당노동행위로 회사 대표가 실형을 받은 일은 이례적이었다. 중요한 뉴스가 되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동료의 영정을 들고 여전히 길에 섰다. 노조 파괴 전문으로 통하는 어느 노무사는 징계 기간이 끝나자 새 사무실 문을 열어 복귀를 선언했다. 충남 아산 문 닫힌 공장 안팎이 연일 흉흉하다. 땀범벅, 눈물범벅이다. 복수노조 시행 5년, 곳곳이 폐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개 풀 뜯어먹는 소리

by 센터 posted Jun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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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개풀뜯어먹는소리.jpg


한강 노들섬 사는 개 노들이 2세가 한가로이 풀을 씹는다. 보통 터무니없는 말을 두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하는데, 개는 종종 풀을 뜯는다. 먼 친척 중에 진돗개도 있다는데, 종류를 딱히 말할 수는 없단다. 동네 흔한 똥개다. 사람을 물지 않는단다. 거기 텃밭 도시 농부들이 오며가며 아는 체를 하면 좋다고 꼬리치며 바닥을 구른다. “앉아” 소리도 잘 알아듣는다. 지킬 것도, 딱히 바쁠 일도 없어 노들이는 내내 노닐었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에 귀가 쫑긋, 경찰 무전 소리에 화들짝 잠시 놀랐지만 곧 풀 뜯고 자빠졌다. 주말도 아닌데 그 일대가 북적거렸다. 개팔자가 상팔자, 뒷발 들어 가려운 목을 긁다가 파리 사냥에 나섰다. 꼬리 물고 빙글빙글 돌다 멈추고 누군가 던져준 마른 뼈다귀를 으적으적 씹었다. 지금 고분고분 그릇에 얼굴 묻고 사료를 먹지만 그도 분명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졌다. 한때 산과 들판을 자유롭게 내달리며 사냥했고, 날고기 맛을 봤다. 안정적인 먹이와 비와 추위를 피할 나무 집, 그리고 적잖은 애정을 얻었지만 쇠사슬이 그 대가였다. 노닐었지만 그건 쇠사슬 길이 만큼이었다. 빵빵, 자동차 경적이 요란했다. 길 막혀 답답한 사람들이 창문 내려 개새끼를 찾았다. 멍멍, 노들이가 짖었다. 신호등엔 노란 불이 점멸했다. 노동자 둘이 현수막 들고 한강대교 아치를 거닐었다. 카메라가 몇 대 왔고, 국회의원이 왔고, 기사가 몇 줄 났다.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거리라는데, 요사이 노동자는 어딘가 올라서야 잠시 뉴스가 된다. 이게 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일 텐데, 개는 풀을 뜯어 먹는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책임지라 말하고, 어느새 농성은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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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분향소.jpg


봄맞이하느라 사람들이 바쁘다. 노랑 파랑 빨강 온갖 꽃과어린 나무를, 또 잔디를 심는다. 물을 주고 살뜰하게 보살핀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 경고문 세워 지킨다. 봄볕 아래 초록빛 쑥쑥 잘도 자란다. 투실투실 잔디 더미가 저기 가득. 얼음지치던 광장에도 어느새 봄이다. 거기 동료 떠나보내느라 노동자들이 상복 입고 바쁘다. 국화를 꽂고, 향을 심는다. 눈물몇 방울 거기 보탠다. 먼 길을 오가고, 긴 밤을 새운 탓에 언젠가 밤낮 없던 일터에서처럼 깜박 졸았다. 올빼미는 밤에 운다.늦은 밤 상가에서 이들은 울음 참느라 입을 앙다물었다. 노조를 짓밟지 마시오. 오랜 구호 새긴 선전물은 광장에서 부서지고 밟혔다. 영정만을 품어 겨우 지켰다. 앉아 버티며 향을 또심었다. 재가 수북했다. 언젠가 향내 멈추질 않던 거기 또 향내짙다. 건너편 대한문 앞에서 화단 지키느라 바빴던 경찰이 오늘, 광장에서 잔디 지키느라 빙 둘러 우뚝 섰다. 책임지는 이가 없어 탈상이 멀었다. 멀지 않은 곳 옥상에 오른 비정규 노동자 둘이 그 꼴을 지켜봤다. 끝장을 보고 싶다 말하고, 어느새꽃은 피고지고. 매한가지 책임을 묻는 농성이 어느새 길었다.


정기훈 |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출근길

by 센터 posted Mar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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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첫출근1.jpg 쌍용차첫출근2.jpg 쌍용차첫출근3.jpg


유제선 씨는 요사이 잠을 설쳤다. 지난밤이 유독 길었다. 새벽 4시 30분까지 버티다 그냥 씻고 나섰다. 가방엔 세면도구와 여분의 양말, 접이식 깔개 따위를 챙겨 넣었다. 없으면 불안한 것들이다. 노조 조끼도 넣을까를 잠시 고민했다. 오랜 버릇이다. 회사 정문 앞 새로 생긴 커피 집에 들러 잠을 쫓았다. 언젠가 분향소와 낡은 농성천막이 있던 자리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걸음이 성큼 가벼웠고 표정이 종종 밝았다. 정문 너머 공장을 슬쩍 훑었다. 우뚝 선 굴뚝에서 연기가 폴폴 솟았다. 뒤따르던 박호민 씨는 노조 사무실 앞에서 사람들을 안고 울먹이느라 눈두덩이 부었다. 흰자위가 붉었다. 축하인사가 내내 민망했지만 내민 손 꼭 잡아 화답했다. 울다 웃던 박 씨는 담배 물고 땅을 오래 살폈다. 비정규직 지회장 서맹섭 씨도 언 손을 비비며 거길 찾았다. 스마트 폰을 들어 노조 현판을 찍었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이름이 거기 나란했다. 그 안쪽 사무실에 일찍부터 김상구 씨가 서성거렸다. 가끔 웃었는데, 표정 변화가 적었다. 말수도 그랬다. 별일도 아닌 듯, 7년 만의 출근을 기다렸다. 윤충열 부지부장이 안쪽 부엌 개수대에서 머리 감느라 바빴다. 낡은 노조 조끼를 서둘러 챙겨 입고 나섰다. 출근길 사람들을 배웅했다. 인재개발원행 버스가 곧 출발했다. 2016년 2월 1일 오전, 손 흔들던 사람들이 길에 남았다.


정기훈 |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올해는 당신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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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정기훈.jpg


새 해가 떴다. 어제 또 그제의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애써 의미를 찾는다. 매듭 삼아 오늘 더 새롭기를 바란다. 그 새벽 어디 높은 곳이며 땅끝을 찾아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볕은 대체로 공평한 편이어서 새벽어둠과 추위를 견디던 사람들의 볼에, 눈에, 코에 고루 이르렀지만, 그늘 짙은 곳엔 미치질 못했다. 오래전 쌓인 눈이 그대로다. 얼음으로 남았다.


어느 광장에서 손잡은 연인은 떨어질 줄을 몰라 이인삼각 꼴을 하고 엉거주춤 빙판을 기었다. 노란색 안전모 쓴 아이들이 겁도 없이 치고 나가는 통에 뒷자리 따르던 부모가 뒤뚱거렸다. 서툰 솜씨였지만 저마다의 속도로 나아갔다. 넘어져도 웃을 일. 손잡아 일으켜 줄 이가 곁에 있었다. 머리 희끗희끗한 왕년의 청춘은 녹슬지 않은 솜씨를 뽐내려다 그만 들것 신세를 졌지만 허허 웃고 말았다. 음악 틀던 디제이가 소리 잠시 줄여두고 말솜씨를 뽐냈다. 흥을 돋웠다. 망원동에서 온 누군가의 가족 사랑 사연을 알렸고, 빙판 위 젊은 남녀의 애정행각을 지적했다. 붉은색 점퍼 입은 젊은 여성의 전화번호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외로운 청춘의 마음도 마이크 잡아 전했다.


새해 광장에서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즐겁다. ‘올해는 당신’이라고 적힌 새 현수막이 도서관 벽에 걸렸다. ‘기아차 비정규직 정규직화’라고 적힌 낡은 현수막이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위에 해를 넘겨 여전하다. 넘어가던 햇볕이 그래도 공평한 편이어서 거기 잠시 머문다. 그 자리 하늘을 지붕 삼아 오래 머문 사람이 엉거주춤 오가다 가만 섰다. 빙판 위 즐거운 사람들을 한참 살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답정너

by 센터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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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의 신조어다. 진짜 생각 따위가 궁금한 게 아니다. 맞장구가 필요할 뿐이다. 격한 공감, 토 달지 않는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한다. 대개는 일방적이다. 그 옛날 왕과 독재자의 질문이 그러했을 터. 신조어는 종종 역사를 거슬러 올라 그 의미를 찾는다. 힘없는 이는 대답을 할 뿐, 질문은 불온한 것이었다. 때때로 그건 목숨을 걸어야 할 문제였다. 저기 머리숱 적은 남자는 여의도 아스팔트에 비닐 집 짓고, 밥을 오래 굶었다. 언제까지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으니 무기한이다. 답을 들을 때까지라고만 했다. 질문의 대가는 그 옛날처럼 가혹했다. 해고가 부당했다고 대법원이 판단했지만 돌아갈 공장이 없었다. 꾸준한 흑자로 우량기업이라던 회사는 미래의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들었다. 재차 해고로 답했다. 길에 떠돈 지가 어느새 9년째다. 집권여당의 대표는 이게 다 노동자와 노조 탓이라고 말했다. 원하는 답이 따로 있었다. 노동개혁, 그건 더 쉬운 해고와 평생 비정규직, 노조 무력화를 뜻하는 신조어라고 길에 선 사람들이 말했다. 머리 희끗희끗한 해고자가 밥 굶어 가며 되묻고 있다. 답이 없어 하루 또 말라 간다. 오래된 미래다. 답은 정해졌다.


글, 사진 |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당신은 정년 모르시나요

by 센터 posted Sep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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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오래도록 고생하셨으니 이제는 좀 쉬시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맞벌이 나선 젊은 엄마 아빠는 별수가 없었다. 늙은 엄마 품에 딸아이를 안겼다. 무뚝뚝한 할아버지는 손주를 등에 태우고 마루를 기었다. 멍멍 짖고 야옹 울었다. 아이는 잘 따랐다. 잦은 야근에도 아이는 밝게 웃었다. 용돈 얼마간 꼬박 쥐여 드리는 것으로 마음 짐을 덜었다. 아이들 다 키워 낸 늙은 부모는 다시 아이를 키운다. 어머니 당신은 정녕 정년을 모른다. 주름진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아직 멀었다. 아버지 당신도 정년을 미처 몰랐다. 잘리고 나니 그때가 정년이었다. 황혼길이 아직은 억울한 아버지가 구직길에 나섰다. 취업박람회 안내판을 꼼꼼히 살피고, 여기저기 천막에 들러 상담을 청했다. 빨간 치마 꼬마 아가씨가 할머니 손 꼭 잡고 그 길에 쪼르르 함께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마지노선

by 센터 posted Jul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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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불 꺼진 전광판에 현수막이 붙었다. 그건 바람에 휘날려 자주 꼬이고 뒤집혔는데, 구멍 내고 추를 달아 겨우 잡아 뒀다. 그 윗자리 올라 버티던 사람 둘은 현수막 펴는 데에 많은 공을 들였다. 난파선 조각에 매달려 표류하다가 닿은 어느 섬 해변 모래 위에 새긴 조난신호처럼, 현수막에 새긴 요구는 자꾸만 찌그러졌고, 흐릿해졌다. 섬사람들은 날짜 꼬박 세어 가며 하루 또 바람과 햇볕과 무관심과 싸운다. 그 옆 불 켜진 전광판에선 단결투쟁 나선 노동자들이 선을 지켜 행복했다. 경찰과 더불어 환하게 웃고 춤췄다. 선을 지키면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서울경찰청은 광고했다. 뒤따라 어느 보험사의 신상품 광고와 메르스 예방수칙이 화면에 부지런히 돌아갔다. 지키면 안전해진다고 전광판은 또한 말했다. 거제 대우조선해양 크레인 위에서, 부산시청 앞 전광판에서 사람들이 이제는 별일도 아닌 듯 하루 또 섬을 지킨다. 마지노선이라고, 살려야 한다고, 그 아랫자리에서 고개 꺾은 사람들이 말했다.


글과 사진 |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몽당분필

by 센터 posted Jun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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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jpg


사진, 글 |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서울 어디 차 다니던 길에 사람이 들었다. 목소리 높였다. 차벽이 금세 높아 막다른 길이었다. 오도 가도 못했다. 아이가 쪼그려 앉아 길바닥에 글을 남겼다. 하늘나라 간 언니, 오빠의 안녕을 바랐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는데, 분필이 자꾸만 뚝뚝 부러졌다. 몽당분필 겨우 쥐고서야 마침표를 찍었다. 풍선 달린 배 그림을 그 아래에 보탰다. 옆자리 사내아이는 결정적 오타를 남기고 말았지만, 가만히 지켜보던 엄마는 그럴 수 있다면서 아이를 격려했다. 곧 그 앞 높다란 차벽 너머에서 물대포 최루액이 힘껏 솟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몽땅 거칠거칠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매캐한 물이 거기 흥건했다. 쓰고 또 쓰고 몽당분필 되도록 길바닥에 새긴 불온한 추모글을 깨끗이 지웠다. 이럴 수는 없다면서 길 위의 사람들이 밤새 울었다.


현장으로 가는 길

by 센터 posted Apr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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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동양시멘트42.jpg

정기훈 /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현장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멀다고, 그 앞 움막 사는 남자가 말했다. 신작로가 반듯했지만 실은 거기 깊은 산골이었다. 겨울이면 가슴팍까지 눈이 쌓이고 삵과 노루가 먹이 찾아 내려와 붐비는 자리란다. 재 너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자는 늙어 낯익은 골짜기에 움막을 지었고 빨간 머리띠를 둘렀다. 보이지도 않는 현장을 바닥 그림 보태 가며 상세히 설명했다. 석회석 광산은 그의 오랜 일터였다. 바닥에 빨간색 페인트가 채 마르지 않았고, 발자국 하나 없이 선명했으니 글씨는 오늘 새로운 것이었다. 크고 작은 싸움이 그 자리에서 잦았다고 남자는 전했다. 작은 열쇠와 쇠사슬은 끊으려면 끊을 만한 것이었지만 회사의 것이었다. 그 위로 감시카메라가 분주히 돌았다. 저 아래서 빨간색 진달래를 봤느냐고 남자가 물었다. 오르는 길에 붉은 것이라곤 곳곳에 깃발이며 현수막뿐이었다고 답했다. 거기 위장도급 철폐 구호가 봄볕에 반짝였다. 오랜 법 다툼을 예고했다. 현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나같이 가파르고 멀다.


일상다반사

by 센터 posted Mar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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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엘지오체투지.jpg

정기훈/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노조를 만들었고, 파업에 나섰다. 겨울, 해는 짧았고 그림자가 길었다. 여의도 쌍둥이빌딩 짙은 그림자가 종일 그 앞 농성장을 덮었다. 거기 강바람이 내내 드셌다. 누군가는 권한이 없었고, 또 누군 책임이 없었으니 교섭은 지지부진했다. 언젠가 회장님 집 앞을 찾아 여럿이 머릴 깎았고 남산을 올라 외쳤다. 또 같은 처지 동료 농성장을 부지런히 다니느라 이들은 바빴다. 쉬는 틈이면 담뱃불을 나눴다. 우린 어디에 올라가야 할지를 농담 삼았다. 생활 자금 대출 요령도 나눴다. 그리고 또 하루, 행진했다. 두 팔과 두 다리 쭉 뻗고 길에 엎드렸다. 꾸물꾸물 기었다. 행렬이 길었다. 행진은 느렸다. 갈 곳이 눈앞에 금방인데, 가려니까 멀었다. 며칠 포근하더니, 어찌 알고 한파가 닥쳤다. 누구한테 절하는 거냐고, 지나던 할머니가 혼잣말을 했다. 전화기 들어 사진 찍었다. 마음 급한 운전자가 빵빵거렸다. 무전기 든 경찰이 뒤따라 바빴다. 늘어선 경찰버스 공회전 소리가 멎질 않았다. 거기 빨간색 단결투쟁 머리띠 묶은 노동자가 그저 말없이 길에 엎드려 절절했다.


어느 출근길

by 센터 posted Dec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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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한편 밝게 빛나는 전광판에 사람 둘이 올라 겨울바람을 버틴다. 현수막 내걸고 농성한다. 가끔 손짓을, 때때로 구호를 외친다. 그 아랫자리에 비닐 집 짓고 동료들이 버틴다. 자주 고개 꺾어 하늘을 살핀다. 저녁 문화제에 선보일 노래 연습을 한다. 틈틈이 누워 쪽잠을 청한다. 낡은 침낭이 한낮 인도 위에 능청맞게 뒹군다. 끼니 삼은 단팥빵 포장지가 바람 따라 구른다. 바싹 마른 귤 껍데기가 분주한 발길 아래 바스러진다. 노숙 농성이 이미 길었다. 고공 농성이 어느새 기약 없다. 어서 퇴근하여 가족과 함께 지내라는 정부 광고가 전광판에 오른다. 하트 뿅뿅 정겹다. 태극기 휘날린다.



축소_어느 출근길.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주마등처럼

by 센터 posted Oct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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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사내는 동료 품에 들어 한참을 울었다. 꺽꺽 소리 불규칙했고 어깨 따라 들썩거렸다. 품을 내어 준 동료는 내내 웃었지만, 눈시울이 차츰 붉었다. 눈두덩이 그새 부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법원 정문 앞을 맴돌았다. 입 꽉 다물고 먼 곳을 살폈다. 버릇처럼 스마트폰 들어 대화창을 보고 또 훑었다. 등을 툭 치며 인사 건네는 동료 손짓에 참았던 울음이 툭 터졌다. 언론사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분주히 터졌다. 법원은 이날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 지위를 인정했다. 4년여 만의 일이다. 1심 선고였다. 회사는 항소를 예고했다. 검찰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싸운 이들에 무더기 실형을 구형했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주마등처럼 돌고 돈다.


주마등처럼.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오! 재미

by 센터 posted Aug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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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 내걸렸다. 세월호 유가족이 앞장섰다. 파업 중인 티브로드 노동자가 뒤따랐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이니, 생활임금 쟁취는 소박했지만 절박한 요구였다. 박 대통령과 여당은, 또 원청 사용자는 모르쇠로 버틴다. 짐짓 뒷짐이다. 문전박대가 한결같아 야박했다. 모래주머니 쥔 손에 힘 들어갔다. 이 꽉 깨물고 던졌다. 두들겨라, 언젠가 열릴 것이다. 박 터지게 던지니 박이 터졌다. ‘안전규제 강화’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려왔다. 박수가 터졌다. 웃음 뒤따랐다. 오! 재미도 있다. 대박이다.


축소_박터지게4.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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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어야 보배

by 센터 posted Jul 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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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던가. 노동자가 수천이라도 조직해야 보배다. 사람답게 살자고 나선 일인데 죽어 앞장선 이가 검은색 머리띠에 흔적을 남겼다. 같이 울고 웃던 동료였으니 남은 사람들은 상복을 입었다. 영정 들고 거리를 헤맸다. 밤이면 서초동 어느 높은 빌딩 앞자리에서 노숙을 했다. 눈 뜨면 또 하루 머리띠 묶고 바빴다. 살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죽자고 달려들었다. 그곳에서 노조는 오래도록 금기였다. 이름값이 높았다. 때로 목숨값을 넘었다. 법당을 찾았다. 전자제품 정교한 부품을 다루던 손이지만, 염주 알 하나 실에 꿰는 게 쉽지 않았다. 절 한 번에 한 알이었다. 땀 한 방울씩이 거기 섞였다. 늦었지만 온전히 꿰어 염주 알을 셌다. 108개였다. 먼저 간 동료의 넋을 기렸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의 손이다. 피땀으로 만든 이름이다.




축소_삼성서비스조계사24.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돈보다 사람, 꽃보다 노조

by 센터 posted Jul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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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자리에 방송 카메라 한 대 보이질 않았다. 대신 무전기 들고 분주한 경찰이 많았다. 커다란 펼침막엔 누구라도 알 만한 사람의 얼굴과 누군지도 모를 이의 영정이 줄줄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사선을 넘은 이들도 한때 자랑스러워했을 회사 로고가 그 뒤로 보였다. 삼성을 넘겠다고 선언한 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옆자리에 섰다. 그곳에서 노조는 오래도록 금기였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니 차라리 광기였다. 금기를 부수겠다는 다짐에 결기가 섞였다. 탄압 사례를 읊었다. 지난 설움을 복기했다. 박수 오가며 사기 높았다. 온기 모였다. 할 말 있는 사람은 모였으나, 들어줄 이가 그 앞자리엔 적었다. 화분 속 봄꽃이 그 자릴 메꿨다. 돈보다 사람이, 꽃보다 노조가 먼저라더라.



돈보다 사람, 꽃보다 노조_축소.jpg



글·사진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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