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실물

by 센터 posted Feb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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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먹거나, 어쩌다 텔레비전 한 번 보는 일이 세상 중요한 아이에게 아빠는 종종 단호한 목소리 앞세워 약속도 지키지 않는 ‘나쁜 사람’이다. 아차차, 마음 급한 나머지 시원스레 남발한 그 무슨 쿠폰 생각이 떠올라 할 말을 잃고 만다. 평소에 서로 약속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잔소리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눼눼” 하고 받아넘기는 아이의 태도를 꼬투리 잡아 들들 볶는다. 나빴다. 사과하고 약속은 지킬 일이었다. 요즈음 세간에 이런저런 희망찬 약속이 떠도는 걸 보니 곧 선거인가 싶다. 공약은 자주 빌 공자 오명을 뒤집어쓴 채, 쓰레기통에 처박혔는데, 오물 아랑곳하지 않고 거길 뒤져 자꾸 들춰내는 탐정 같은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그 한마디에 웃었고, 지금 흐릿한 약속에 우는 사람들이다. 노사가 합의한 것을 지키라는 뻔한 말을 하느라 밥을 굶는다. 묵은 약속을 다시 읽는 동안 목이 쉰다. 잘려 나간다. 대권행 고속열차가 곧 출발한다. 선물 보따리 같은 약속이 어김없이 짐칸에 가득 실릴 텐데, 종착역에 이르러 유실물로 남을 것들이 적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안다. 귀중한 것도 아니었던지 찾으러 오지 않으면 폐기될 운명인 것도 안다. 그럼에도 다들 여태 살면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배운 적은 없을 테니 유실물 센터 앞에서 농성한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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