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자리

by 센터 posted Jan 0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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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자리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노동에세이.jpg

 

 

규탄하고 촉구할 것이 많아 길에 나선 사람들 구호 따라 입김이 뽀얗다. 맞춰 입기라도 한 것인지 검은색, 또 길고 두터운 패딩점퍼 차림 사람들이 팻말 든 손가락을 파고드는 한기를 어쩌지 못해 자꾸 꼼지락거린다. 그 중 누군가 곡기 끊고 말라가는 사람도 있어 추운 티를 내지 못한다. 동료가 건넨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철 따라 바람 따라 낙엽 구른다.

길에 나서 말하기 고된 철이다. 설 곳 좁아 더욱 그렇다. 한때 울긋불긋 농성 천막 줄줄이 많았던 고용노동청 앞자리에, 또 기자회견 줄을 선 대통령실 앞에 질서유지선이 길고도 촘촘하다. 거기 겨울을 견뎌 사철 푸른 나무 든 커다란 화분이, 아니, 실은 죽지 도, 썩지도 않는 나무 모양 조형물이 빼곡하다. 경찰이 많다.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작동하지 않았던 공권력은 길에 나선 노동자 열댓 명 앞에 추상같았다. 질서정연한 폴리 스라인 안쪽으로 낙엽만 쌓인다. 바람에 뒹군다.


엄마 눈물이 툭

by 센터 posted Nov 0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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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눈물이 툭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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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고리도, 안전모도, 안전교육도 없이 일용직 하청노동자가 툭, 떨어졌다. 먼 길 떠났다. 이해할 수도,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 먼 길 나선 늙은 엄마 눈물이 툭, 아 들 영정 위로 흐른다. 내 아들을 살려내요, 내 아들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이 엄마의 가슴은 찢어지도록 아픕니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비세요. 빌어야 합니다. 영정 끌어안고 엄마가 끊기질 않는 곡을 한다. 통곡 소리 원청 본사 번듯한 로비에 울린다. 툭하면 떨어지고, 끼이고, 깔려 죽는다. 눈물이 툭, 영정 타고 흐른다. 마를 날 없다.


무사고 사이

by 센터 posted Sep 1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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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고사이2.jpg

 

 

 

무사고 사이에 사고가 끼었다. 한 글자 작은 차이에 사고가 있다. 빵 만드는 공장 반죽기에 끼어 노동자가 죽었다. 처음도 아니다. 밥벌이 나선 사람이 퇴근하지 못해 그날 저녁 밥상에 국이 싸늘하게 식는다. 갓 지은 고봉밥 오른 제사상을 받는다. 향냄새 짙다. 그 공장엔 무사고와 안전예방 구호 새긴 형광 조끼가 많고,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 팻말도 있고, 재해 예방을 위한 두툼한 지침서도 있을 테다. 대체 무엇이 없어 한 글자 작은 차이 사고를 불렀는지 보려고 찾아간 국회의원들을 막아선 배짱이 또한 두둑했다. 정문 앞 위생모자 쓴 사람들 어깨 사이에 빈틈이 없었다. 공장 앞마당 막고 줄줄이 세워둔 물류트럭 사이 틈도 그랬다. 세상 가득 맛과 행복을 전달한다고 그 트럭에 적혀 있다. 그 너머로 삐죽, 공장 굴뚝이 높았다. 막지 못한 죽음을 두고 막아선 이와 막힌 사람들 언성이 자주 높았다. 빈틈없는 출입 관리로 그 회사 문턱이 끝내 높았다. 사니 죽니 하는 일 어딘가에 다만 빈틈이 있어 조끼에 새긴 무사고 구호가 오늘 또 무색하다.


추락하는 것은

by 센터 posted Jun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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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에는.jpg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건설노조 사무실 앞에서 ‘뻗치기’ 하던 기자와 교대를 기다리던 경찰이 땡볕을 피해 감나무 그늘 아래에 앉고 섰다. 어어, 저기! 누군가 외쳤고 깜박졸던 오디오맨이 화들짝 놀라 카메라 옆으로 달렸다. 허공에 새똥이 날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기자가 물티슈를 찾았다. 사람들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깃털도 나지 않은 어린 새 한 마리가 2층 옥상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매달렸다 곧 떨어졌다. 날개를 두어 번 휘저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툭, 바닥에서 아직 죽지 않은 어린 새가 몇 번 고개 들어움직였다. 옆자리 경찰이 어린 새를 감나무 그늘 아래 흙으로 옮겼다. 압수수색이 끝나길 기다리던 기자가 종종 고개 돌려 어린 새를 살폈다. 그늘이 움직였다. 그늘 따라 사람들도 움직였다. 떨어진 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낡은 안전화 위로 각반을 한 노조사람들이 꿈쩍 않고 입구를 지키던 경찰 앞에서 정권 규탄 팻말을 들었다. 마이크 잡은이가 추락하는 노동권과 인권과, 국격에 대해 말했다. 감나무 그늘이 내내 짙었다. 해따라 바닥을 흘렀다. 압수수색이 길었다. 깃털도 나지 않은 새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우리 만남은

by 센터 posted Apr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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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장.jpg

 

학교에서 밥 짓던 사람 여럿이 아팠다. 우연이 아니다. 커다란 튀김 솥 앞에서 가자미를, 돈까스를 튀겨 내던 그들은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숨쉬기를 멈출 수가 없어 폐를 혹사했다. 쌀 포대와 업소용 식용유와 양파·당근 자루를 나르고 칼질하느라 근육과 관절을 갈아 냈다. 아이들 밥 짓는 일을, 또 밥벌이를 멈출 수가 없어 견딘 시간은 독으로 남았다. 일하다 아프거나 죽지 않게 하자는 뻔한 말을 하느라 길에 서고, 소리치고,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쏟아야만 했던 사람들은 서로 무척 가까웠다. 언니, 동생, 친구, 동료였고 동지였다. 그들 모인 둥지에서 비로소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집에서 또 일터에서 말없이 꾸역꾸역 온갖 일을 다 해내던 사람들은, 이제 겁 없이 길에 나서서 못 하는 말이 없다. 이 또한 우연일 리 없다. 파업하던 날, 벚꽃 만발한 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그들은 만났다. 서로 꼭 안아 반길 만한 일이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봄 마중

by 센터 posted Feb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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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중.jpg

 

내복에 두꺼운 점퍼를 벗지 못하고 산다. 길에서 바들바들 떨었던 기억 탓이다. 칼날 같던 바람이 어느새 산들산들, 훌쩍 창밖으로 봄기운 스민다. 습관처럼 껴입은 나는 별 수도 없이 땀 흘린다. 그제야 봄 가까운 줄을 안다. 청소해야지, 이불을 빨아야지, 내 맘속 묵은 때도 좀 털어야지, 새봄맞이 계획을 세워 볼 만할 때다. 봄볕 소중한 줄을, 겨울 혹독하게 겪은 사람이 안다. 저기 병원 청소 노동자는 인터뷰 기다리는 그 시간을 그냥 보내질 못하고 틈틈이, 꼼꼼히 걸레질한다. 창가에 가지런히 둔 화분을 제집 것인 양 살뜰히 살핀다. 우유를 물에 섞어 주면 좋다고 집과 일터에서 비밀의 화원을 가꾼 노하우를 전한다. 빨간색 제라늄꽃과 초록의 이파리는 그곳 재활의학병동 휠체어 탄 환자와 간병인 누구나의 시선을 오래 잡아끈다. 사방에 꽃망울 팡팡 터지는 창밖의 봄을 떠올리게 할 테다. 걸레질하는 ‘여사님’은 카메라 앞에 서기를 처음에 꺼렸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단다. 곧, 찍어도 괜찮다고 했다. 정규직 됐다니 그건 좋은 일이었다. 월급이 많이 오른 것도 아니라 민망하다고 노조 사람은 말했지만, 복지 혜택과 고용안정이 저이에게 봄볕 같았다. 마음 써 가꾼 화분 옆에 앉는다. 손 뻗어 꽃 옆에 둔다. 시선은 카메라를 향한다. 사진첩에 수십 장은 보일 법한 그 포즈를 자연스레 해낸다. 능숙한 걸레질에 바닥이 반짝인다. 살짝 주름진 얼굴에 봄볕 들어 웃음꽃 피어났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기자


겨울

by 센터 posted Dec 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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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국회.jpg

 

국회 앞에 농성 천막 빼곡하니, 비로소 겨울이다. 거기 온갖 집회와 행진이 많아 시 끌벅적하니, 연말이다. 무성하던 잎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처럼 삐쩍 말라  가는 사람들이 둥그런 돔 가까운 곳에서 터덜터덜 기운 없는 발걸음을 옮기는 때가 바 로 겨울이고, 연말이다. 밥보다 법이 급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가슴팍에 일력을 달고 하 루하루를 찢는다. 노조법 개정을 따뜻한 잠자리보다 밥이 중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가 슴팍에 핫팩을 끼고 누에고치처럼 실을 짜 그 안에 든다. 밥 짓다 죽지 않겠다고, 급식 실 인력 확충과 복지수당 차별철폐를 말한다. 중단하라, 폐지하라, 제정하라, 저마다 의 절절한 구호 담은 색색의 현수막이 넘쳐 국회 앞 단풍이 철 지나도록 질 줄을 모른 다. 집회 행진하던 사람이 노숙농성 중인 지역 동료를 만나 응원의 5만 원을 건넨다. 날  춥다기에 십수만 원도 넘는 빵빵한 오리털 침낭을 검색했던 사람은 마트에 파는 3만 원 짜리 합성 솜 침낭을 작은 텐트에 넣는다.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니라고, 다들 능숙했는 데, 찬 바람에 아린 볼이며 손끝의 감각은 매번 새로운 것이어서 핫팩을 끼고 산다. 법 치며 불법 엄단이며, 온통 법 얘기만 높아 스산한 계절 겨울이다. 법 짓는 곳 앞마당에  밥 짓는 사람과 배 짓는 사람이, 또 회사 청산을 막으려는 사람이 다 만나 서로를 응원 하는 계절이다. 겨울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가면

by 센터 posted Oct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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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와이퍼.jpg

국정감사 시작하던 날, 저기 자동차 와이퍼 만드는 노동자가 푸른 수의에 가면 쓰고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정문 앞에 앉았다. 목소리 내내 높였다. 그 앞 지나는 국회의원들이, 또 기자가 보고 한 번 보고 묻고 찍기를 바랐다. 바람에 그쳤다. 애써 준비한 보람이 적었다. 눈에 띄기를, 말이 돌기를 바라는 일이 대개 그렇다. 지나던 카메라를 무척이나 반긴 이유다. 저 가면의 주인공은 인근 식당에서 국수 한 젓가락을 뜨던 참이었다. 전화 받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고용노동부 건물을 무대 삼아 상황극을 선보였다. 외국 자본의 먹튀 행각을 꼬집었다. 위장청산 의혹을 제기했다. 국수 면발이 다 붇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숨도 고르질 못하고 가면을 벗고 뛴다. 가면, 속뜻을 감추고 겉으로 거짓을 꾸미는 의뭉스러운 얼굴 혹은 그런 모습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한다. 그 가면을 벗겨 속뜻을 밝히겠다고 길에 나선 사람들은 천막을 치고, 집회를 하고, 먼 길 뚜벅이 행진에 나선다. 눈에 띄기를, 말이 돌기를 바라며 뭐든 한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연인은 웃는다

by 센터 posted Aug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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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바.jpg

 

빵 굽던 사람과 그를 응원하는 이들이 한여름 지글지글 끓던 아스팔트에 철퍼덕 붙어 몸을 굽는다. 벌겋게 잘 익은 얼굴에서 떨군 땀방울이 그들 느릿한 오체투지 행진의 흔적을 한강대로 불판에 잠깐씩 남기곤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흐릿했다. 그 길에 사람들이 아무도 웃지 않았는데, 제빵사 임종린이 다 엎어진 길에 혼자 삐죽 일어나서는 잠깐 웃었다. 내내 반 박자가 빨랐다. 전에도 그는 삐죽 먼저 일어나 밥을 오래 굶었다. 험한 길이다. 교차로 건너 잠시 쉬어 간다. 앉고 눕고 기대어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쉰다. 그들 곁에 딱 붙어 부채질하고 물을 건네고 땀을 닦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널브러진 사람들 잔뜩 찡그린 얼굴에 웃음 번진다. 저기 투쟁 머리띠 맨 스물넷 청년이 행진에 동참한다고 했을 때, 그의 연인은 말렸단다. 고집이 세서 어쩔 수도 없었다고. 옆자리 서서 걷는 것으로 응원했다. 부채질은, 물에 적신 손수건을 목에 둘러주는 일은, 눈 맞춰 괜찮냐고 묻는 일은 대개 간지러운 일인 것인지, 내내 웃음 터진다. 종종 어깨에 폭 기대어 부빈다. 땀 냄새를 나눈다. 엎어지고 일어나는 사람들 곁에 팻말 든 사람들 있어, 잔뜩 찌푸린 벌건 얼굴 땀 닦으라며 수건 건네는 누군가 있어, 또 한 번의 행진 소식 듣고 멀리서 찾아와 함께 바닥을 기는 사람이 있어 거기 고된 길에 웃음 돈다. 파리바게뜨 사태 해결을 위한 오체투지 행진 길에 여러 인연으로 모인 사람들이 연인처럼 다정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비보호

by 센터 posted Jun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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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호.jpg

 

재수 끝에 운전면허를 따낸 어떤 청춘은 당장 차를 끌고 여기저기 달려 볼 생각에 설렌다. 늦은 밤, 탁 트인 자유로를 달리며 평소 꼼꼼하게 선곡해 둔 드라이브 음악을 튼다. 창을 내리고 선선한 바람을 맞는다. 스트레스를 날려 보낸다. 어느 주말이면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들었던 한적한 동네를 찾아가 유유자적 거닌다. 동해안으로 달려 볼까. 저 아래 남쪽 마을은 또 어떨지. 대형마트 장 보는 것도 이제 문제없다. 그러나 초보 운전자는 오늘 도심 복잡한 도로에 나가 거친 야생 속 초식동물의 삶을 겪고야 만다. 온통 바쁜 사람들뿐인 그 도로에 자비란 없으니, 홀로서기 생존이 쉽지 않다. 빵빵 소리에 화들짝 놀라 가슴 뛰는데, 좌회전 신호는 들어오지 않는다. 건너편 직진 차량은 끊이질 않는다. 머릿속이 하얗다. 동공엔 지진이 온다. 어느새 적신호다. 비보호 좌회전은 도로의 효율을 위해서 만든 것이라는데, 능숙한 운전자라도 매번 쉽지 않다. 사고가 날 경우엔 높은 과실 비율을 떠안게 된다. 보호받지 못하는 나의 갈 길을 어찌하나. 비보호 좌회전 표시는 영 반갑지 않다. 마침 표지와 겹쳐 보인 저기 노동자 신세가 또 어떤가. 사람이 들어가 점검하는 중에도 제철소의 기계는, 발전소의 컨베이어벨트는 멈추지 않았다. 안전을 지켜봐 줄 동료가 곁에 없었다. 효율 때문이다. 돈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니 벨트에 말려들어 사람이 죽어 나간다. 끼이거나 떨어져 크게 다친다. 온갖 적신호에도 질주는 쉬이 멈추지 않아 산재 공화국 오명이 여태 선명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이면, 혼신의 힘

by 센터 posted Apr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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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jpg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첫 회의가 열린 날, 회의장 앞 기자회견 자리엔 카메라와 노트북 든 기자가 유독 많았다. 앞자리 선 사람들 할 말도 적지 않아 회견이 언제나처럼 길었지만, 자릴 뜨는 카메라가 없었다. 상징의식을 기다렸다. 줄다리기야 흔한 소재였는데, 그 줄이 무대 삼아 세운 현수막을 관통해 연결되어 있으니 호기심을 자극할 만했다. 찢는 거냐, 새로운 현수막이 짠 하고 등장하는 것이냐, 그도 아니면 뭐냐, 눈들이 반짝거렸다. 플래시가 번쩍번쩍, 드디어 시작된 상징의식은 한껏 높았던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무대그림과 어우러져 한 장의 그림으로 담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의미를 녹여내면서도 요구에 맞추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들의 솜씨다. 줄 잡은 사람들은 힘 모아 당기는 일에 진지했다. 표정 연기까지 어색함이 없었다. 지켜보는 이 아무도 없는 무대 뒤편 줄 맞잡은 사람도 그랬다. 혼신의 힘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든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그 덕에 뭐든 일이 돌아간다. 카메라가 잡지 못하는 이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종종 눈여겨 살필 일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허수아비

by 센터 posted Feb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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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표산업.jpg

 

경기도 양주 가마골을 지나는 왕복 2차선 좁은 도로는 자주 구불구불 산을 넘는다. 그늘이면 며칠 전 내린 눈이 그대로였다. 검은 도로엔 윤기가 흘렀다. 여기저기 빙판을 경고하는 안내문이 많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차들은 달렸다. 주류 상자 가득 싣고 오르막 커브 길을 오르던 트럭이 소주며 맥주병을 와르르 길에 쏟고 나서야 속도를 줄여 멈췄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피해 상·하행 차들이 엉켜 체증이 지독했다. 안전운행을 당부하거나, 다짐하는 스티커가 사고 트럭 짐칸에도 붙어 있었다. 재 너머 마을 어귀를 지날 때면 노인 보호, 어린이 보호 안내가 신호등과 함께 많았다. 덩치 큰 차들이 그 길을 자주 지났다. 내달리던 차들은 고정식 과속단속 카메라 직전에야 속도를 줄였다. 규정 속도를 지키는 차 꽁무니에 바짝 붙어 압박했다. 사고 잦은 곳 표시가 선 곳도 다를 바 없었다. 풍경에 섞였다. 저기 사람이 있다. 아니 사람 모습을 한 마네킹이 안전모를 쓰고 지시봉을 들었다. ‘결빙 위험 절대 감속’ 안내판 옆자리다. 멀리서 얼핏 보면 제법 그럴 듯했지만 거길 자주 지나다 보면 곧 무뎌질 테다. 차들은 달렸다. 허수아비 선 자리 낙엽에 허연 가루들이 잔뜩 앉았다. 그 앞 삼표산업 채석장에서 날아온 돌가루일 테다. 안전모 쓴 직원들이 안전제일 새겨진 펜스 뒤에 줄줄이 서서 정문을 지켰다. 카메라 든 기자들로 그 앞이 붐볐다. 고용노동부 산업안전패트롤 차량이 지나갔다. 경찰이 많았다. 지난 설 연휴 채석장 토사가 무너져내려 일하던 사람 셋이 깔렸고, 죽어 발견됐다. 사고가 잦은 곳이었다고 뉴스 앵커가 전했다. 일하던 사람 깔려 죽은 채석장 정문 앞에 중대재해처벌법 법률 상담을 홍보하는 법무법인의 현수막이 붙었다. 그 법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사람들은 기자들 앞에 섰다. 엄중 처벌을 촉구했다. 어렵게 만든 법이 허수아비 노릇에 그치면 안 된다고 사람들은 걱정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손잡아 주는 일, 기대어 서는 일

by 센터 posted Dec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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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jpg

 

아들 먼저 보낸 엄마는 오늘 또 눈이 퉁퉁 부었는데, 전처럼 사람 많은 데서 자주 울지는 않았다. 3주기를 맞아 엄마는 자신을 사회운동가로 소개한다. 억울한 죽음을 막는 일을 한다. 떠난 이의 이름을 딴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과 중대 재해를 처벌하는 법을 곡절 끝에 만들었지만, 죽음이 여전하다. 김용균의 동료는 지금도 비정규직이다. 탄가루 쌓인 현장에서 언제든 자신에게 덮칠 수도 있는 참사를 예감한다. 그러니 추모는 지금도 시위가 된다. 영정은 말 없는 구호다. 아들 잃은 엄마가 동생 먼저 보낸 누나 손잡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지금껏 길에서 바쁘다. 검은색 긴 패딩 점퍼 벗을 날이 없다. 국회에서 열린 추모 사진전에 가면서 지독하게 추웠던 지난해 국회 본관 앞 단식농성장을 회상한다. 그즈음부터 유가족의 영상을 기록하던 다큐멘터리 감독이 오늘 건넨 손편지를 손에 들고 엄마는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말하고 또 말했다. 그뿐인가. 곁을 지킨 사람들이 많았다. 주저앉지 않고 3년을 달려온 힘이다. 사람들은 기대어 선다. 손잡고 산다. 선거철이니 유력 정치인의 악수야 뻔하고 흔한 일이라지만 여전히 절박한 엄마는 두 손 포개어 꼭 쥔다. 눈 맞춘다.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 그 뻔한 말을 하느라 오래도록 잡고 섰다. 카메라 다 떠나고 돌아서는데, 엄마는 울지 않았다. 그저 삼켰던지, 낯빛이 온통 붉었다. 옆자리 울음 터진 고 김태규의 누나 손을 꼭 잡고 다독였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훈장처럼

by 센터 posted Oct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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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jpg

 

띄엄띄엄 벽에 붙어 선 사람들이 그 앞 길어질 것이 뻔한 기자회견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린다. 굵고 짧은 발언을 주문하는 사회자의 요청도 따로 없었으니 마이크 쥔 사람은 할 말이 하염없고 막힘없다. 술술 쏟아진다. 해고의 부당함과 책임 있는 자들의 무책임과 헛된 약속을 읊는 일이 두세 번째도 아닐 테니, 미리 준비한 원고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해고 생활이 길었다. 물 빠진 낡은 조끼엔 어느 참전용사의 훈장처럼 주렁주렁 배지가 많이 달렸다. 연대할 곳도, 기억할 것도 그간 많았다. 서는 곳마다 치열한 전선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전선에 서 있다. 해고된 지 20년, 산전수전 또 공중전을 다 겪었을 노장은 구부정한 자세로 팻말을 들고 서 있다가 햇볕에 달아오른 머리를 버릇처럼 쓸어 넘긴다. 얼마 남지 않은 흰 머리칼이 반짝거린다. 아직은 머리숱 많은 해고자가 복직판정 이행 구호를 새긴 팻말을 올려 들고 벌을 선다. 가슴팍에 바늘로 꽂아 둔 죽지 않고 일할 권리, 리본이 바람에 흔들린다. 가을볕 눈부시니 그늘이 더 짙다.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린 배지가 어둠 속에서 밝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붉은 ‘농성’

by 센터 posted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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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오.jpg

 

에 안 보이면 흐릿해진다. 기억은 시간을 이기지 못해 풍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길에 나와 싸우는 사람들은 뭐라도 한다. 굶고 기고 소리 지르는 것 같은 일 말이다. 잊히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 농성 천막이 있다. 거기, 꿈적 않는 사람이 있다. 한때 굶고 땅을 기고 점거 농성을 벌였던 그들은 오늘 또 새로운 농성 날짜 팻말을 건다. 455일, 코로나 위기와 함께 시작된 싸움이 길다. 언젠가 구호 새겨 그 앞에 걸어둔 일회용 방역 마스크엔 매연이 덕지덕지 붙어 잿빛이다. 정년이 진작에 지났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한다. 부당해서라고, 또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잘못한 게 없으니 그렇다고 했다. 노조 만들어 싸운 죄가 다만 중했다. 유명 로펌을 앞세운 회사는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큰돈을 아끼지 않았다. 지노위와 중노위의 부당해고 판정에도 행정소송이 뒤따랐다. 얼마 전 감옥에서 풀려난 어느 재벌 얘기를 하면서는 험한 소리가 따라붙었다. 개돼지 신세를 한탄했다. 안 해본 걸 꼽기가 어려운 이들은 이제 포기 않고 버티기를 하는 중이다. 낡은 천막 안에 걸어둔 달력에는 연대투쟁 일정이 빼곡하다. 행정소송 선고일도 거기 보인다. 인스턴트 커피를 찬물에 풀어 냉커피를 만든다. 양재동 법원 앞 기자회견에 갈 준비를 한다. 마스크를 고쳐 쓴다. 원래는 붉었을 농성 두 글자가 물이 다 빠져 이제는 누렇다. 아시아나케이오 해고자의 농성 천막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밥 냄새

by 센터 posted Jun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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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보호.jpg

 

어느 저녁 연장 가방 달그락거리며 집에 들어온 아빠 몸에선 시멘트 냄새가 났다. 발 구린내가 섞였다. 종종 술 냄새, 홍어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얼굴 벌건 아빠가 까칠한 턱으로 내 얼굴을 부볐다. 땀 냄새가 시큼했다. 싫다고 버둥거렸다. 그게 다 밥 냄새였다. 저기 조경관리 노동자들이 초여름 땡볕 아래 연신 허리 굽힌다. 거름 포대 둘러매고 청와대 앞 너른 화단을 훑는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동작으로 거름을 흩뿌린다. 구린내가 진동한다. 지극한 관심 덕에 잔디는, 또 거기 색색의 꽃과 온갖 풀이 쑥쑥 자란다. 뒤편 가족상이 변함없이 화목하다. 폐지 더미에 깔려 퇴근하지 못한 아빠의 죽음을 알리느라 상복 입은 딸이 양손 가지런히 모은 채 기자들 앞에 선다. 초점 흐릿한 눈으로 먼 데를 살피다 종종 고개를 숙인다. 험한 말을 참느라 꺽꺽 말이 끊긴다. 옆자리 함께 선 유가족이 등을 쓰다듬는다. 현장을 목격한 동료는 마이크를 잡았지만 끝내 말 한마디를 못 하고 만다. 지극한 관심사에 들지 못해 오늘도 사람들은 일하다 죽는다. 깔리고, 끼이고, 질식하고 떨어져 그렇다. 그 저녁 뜨뜻한 밥 한 공기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고 제삿밥을 받는다. 향냄새만 짙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꼿꼿하게

by 센터 posted Apr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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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꼿하게.jpg

 

무성하게 자란 장미 넝쿨을 쳐내느라 가지를 잡아 비틀다 그만 가시에 찔렸다. 따끔하고 말 줄 알았는데, 종일 욱신욱신 찔린 자리가 아팠다. 다가올 여름에 빨갛게 피어 예쁠 장미는 꼿꼿한 가시를 촘촘하게 품었다. 그래선지 집 울타리에 흔했다. 철 따라 붉어 멀리서 보면 예뻤지만 가까이하기엔 위험했다. 함부로 넘나들지 말란 뜻일 테다. 길가 어디고 말 무성하게 뻗는 곳이면 거기 화분이 있다. 언젠가 대한문 앞에서 수십여 영정을 두고 해고는 살인이라고 말하던 쌍용차 해고자들 천막 뜯긴 자리엔 어느 날 화단이 들어섰고, 예쁜 꽃 무더기로 피어났다. 정부서울청사 앞 언제나 말 많은 그곳에도, 광화문 세월호 광장이라 불리던 자리에도, 여의도 쌍둥이빌딩 앞 청소 노동자 농성하고 기자회견 마이크 잡던 데에도 화분이 곧 빼곡해 그 위로 색색의 꽃들이 노랗고 붉었다. 비록 거기 가시는 없었지만, 그 품은 뜻이 뾰족했던지 안 그래도 할 말 많은 사람들은 화분 얘기를 두고두고 한다. 눈엣가시였다지, 예쁜 꼴을 한 울타리 앞에서 분을 참지 못한다. 텐트 치고 꿋꿋하게 버틴다. 종종 아니 자주 가시 돋친 말들만이 화분을 넘나든다. 저기 서울시청 정문 앞에도 화분이 빽빽하게 들어서 선을 그었다. 폴리스라인을 대신한다. 할 말 미룰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앞에 꼿꼿하게 선 채로 마이크를 들고 이따금 주먹을 뻗는다. 할 일을 미룰 수도 없는 조경 관리 노동자가 물 주느라 별 일없이 거길 지난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유실물

by 센터 posted Feb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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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jpg

 

라면을 먹거나, 어쩌다 텔레비전 한 번 보는 일이 세상 중요한 아이에게 아빠는 종종 단호한 목소리 앞세워 약속도 지키지 않는 ‘나쁜 사람’이다. 아차차, 마음 급한 나머지 시원스레 남발한 그 무슨 쿠폰 생각이 떠올라 할 말을 잃고 만다. 평소에 서로 약속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잔소리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눼눼” 하고 받아넘기는 아이의 태도를 꼬투리 잡아 들들 볶는다. 나빴다. 사과하고 약속은 지킬 일이었다. 요즈음 세간에 이런저런 희망찬 약속이 떠도는 걸 보니 곧 선거인가 싶다. 공약은 자주 빌 공자 오명을 뒤집어쓴 채, 쓰레기통에 처박혔는데, 오물 아랑곳하지 않고 거길 뒤져 자꾸 들춰내는 탐정 같은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그 한마디에 웃었고, 지금 흐릿한 약속에 우는 사람들이다. 노사가 합의한 것을 지키라는 뻔한 말을 하느라 밥을 굶는다. 묵은 약속을 다시 읽는 동안 목이 쉰다. 잘려 나간다. 대권행 고속열차가 곧 출발한다. 선물 보따리 같은 약속이 어김없이 짐칸에 가득 실릴 텐데, 종착역에 이르러 유실물로 남을 것들이 적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안다. 귀중한 것도 아니었던지 찾으러 오지 않으면 폐기될 운명인 것도 안다. 그럼에도 다들 여태 살면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배운 적은 없을 테니 유실물 센터 앞에서 농성한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인지부조화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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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통.jpg


오토바이엔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뒤쪽에 앉았던 사람이 가게 앞까지 날아왔다고 바퀴 고치던 자전거가게 사장님이 말했다. 바퀴에 바람 넣느라 그 앞에 섰던 사람들은 넘어진 오토바이에서 뜯겨나간 잔해와 배달통을 튀어나와 날아간 포장 음식 따위를 살펴보다 혀를 찼다. 거길 지나던 동네 사람들에게 사고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틈틈이 인도 한편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던 라이더를 살펴봤다. 얹어 배달하던 음식 보따리 여러 개엔 붉은 국물이 줄줄 흘렀다. 지켜보던 아빠는 자전거 뗀 지 얼마 안 된 아이에게 안전모를 꼭 써야 한다고,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잔소리했다. 좁은 골목길을 빠른 속도로 내달리던 배달 오토바이에 놀라 아이 손을 급하게 잡아끈 아빠는 씩씩거리면서 저만치 간 오토바이 꽁무니를 흘겨본다. 저녁 밥상을 차리려 냉장고를 뒤지던 아빠는 다 귀찮아 배달 앱을 뒤진다. 예상 시간이 길다.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아이한테는 금방 올 거라고만 거듭 말했다. 오토바이 소리 들려 나가보면 옆집 것이었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배달 기사의 말에 괜찮다고 했는데, 거기 짜증이 잔뜩 묻었다. 그리고 일 나간 아빠는 어디 배달플랫폼 업체 본사며 국회 앞에서 헬멧 쓴 라이더의 이야기를 듣고 찍는다. 최소한의 안전망 없이 위험한 질주에 내몰린 특수고용 노동자의 사연 전하던 사람을 그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 꽁무니와 엮어 사진에 담는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는 요지의 설명을 보탠다. 조화롭지 못한 여러 생각 보따리가 머릿속을 내달린다. 오늘도 배달 오토바이가 내달린다. 균형 잃은 배달통에서 붉은 국물이 쏟아진다. 코로나 시대 일상다반사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발전 없다

by 센터 posted Aug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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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없다.jpg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멘 라이더는 토끼처럼 빨라야 했다. 재빨리 눈을 굴려 콜을 확인해야 했고, 밥이 식기 전에 자전거와 오토바이 타고 내달려야 했다. 신호등 붉은빛은 밥 식는 신호였고, 평점 깎이는 표시였다. 차와 차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좁은 틈이 갈 길이었고, 살길이었다. 세차게 쏟아지던 장맛비 속에서도 페달 질을, 액셀러레이터 당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국이 식기 전에, 아이스아메리카노 얼음이 녹기 전에 가야만 했다. 넘어지면 국물 걱정, 일어나면 시간 걱정, 다치면 치료비 걱정을 했다. 새빨간 떡볶이 국물 같은 피가 흘러도 떡이 불기 전에, 튀김이 눅눅해지기 전에 목적지에 가야 했으니 그들은 거북이 등짐 지고 내달렸다. 그러는 사이사이 배차 기회를 잡기 위해 스마트폰을 살펴야 했다. 배터리는 빨리 닳았다. 보조배터리 크고 묵직한 것을 밥 가방 한구석에 넣고 긴 줄로 연결해 충전해 가며 살펴야 했다. 충전 선이 곧 밥줄이었다. 그러니 그는 노동 3권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자리에 서서도 그 줄을 치렁치렁 달고 있었다. 할 말을 그 끝 스마트폰에 적어 읽었다. 플랫폼이니, 4차 산업이니 하는 수익 모델은 빠르게 발전하는가 본데, 일하는 사람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움직임이 느렸다. 발전이 없다. 3일이면 나올 노조 설립신고증을 받기 위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를 그들은 걱정했다. 기자회견이 끝났고 털털거리던 발전기가 멈췄다. 라이더는 잠시 내려둔 밥 가방을 다시 멨고, 충전선 길게 늘어진 스마트폰을 살피느라 거기 노동청 앞 화단 턱에 한동안 꾸부정히 앉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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