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by 센터 posted Feb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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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명 시골에서 이것저것 하는 사람 

 

 

지난해 12월 30일, 군청 산림과 기간제 일자리가 끝났다. 이제 2023년 새로이 시작될 일을 기대하며 한두 달 쉬게 된다. 예년 같으면 논밭에 가서 거름을 뿌리거나, 잡초를 제거하거나, 산에서 낙엽을 긁어다 뿌리고 원두막 짓는 일을 할 시기지만, 올해는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지난해 공부한 나무의사 시험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맘처럼 공부가 되질 않는다. 허구한 날 술 마실 약속을 잡고, 점심시간엔 약속한 사람과 한잔 나누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척을 한다. 나른하고 졸린데, 젊은(?)지 어린지 모르는 학생들이 있어 졸기도 쪽팔리다.

 

그냥 책 펴놓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2주 정도가 지났다. 가끔 산림과 기간제 채용 공고를 확인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좀 이르게 1월 둘째 주에 광고가 났다. 그런데 내가 공고를 보고 접수하기에 앞서 아는 형님한테 전화가 왔다. 자신이 산림과 모집공고를 보고 군청에 전화해봤는데 “자네는 채용하지 않겠다고 한다네. 그래서 자신이 지원하려고 한다.”라고 얘기했다. “뭐라고요? 아니 내가 3년 동안 해왔고 젤 잘 알 텐데 왜 안 쓴대요?”라고 물었더니 “자네는 거의 3년을 일해서 더 쓰면 공무직으로 채용해야 해서 안 된다.”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자신이 내가 하던 일을 해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럼 형님이 제 일자리 하세요. 저는 상관없어요.”라고 했다.

 

그러는 순간 화도 나고 슬쩍 웃음도 났다. 벌써 일한 지가 3년인데 이제야 공무직 우려가 있어서 나를 그만 쓴다고? 실상은 이미 나는 24개월을 초과해서 반복갱신 근무해왔는데 이제야? 내가 그래도 노동법이나 비정규직 문제는 좀 아는 편인데, 군청에서 나를 더 이상 안 쓴다고 하고, 안 쓰는 이유가 더 시키면 공무직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라니. 하하하 웃음이 났다. 그런 이유라면 진작에 나를 잘랐어야지. 나는 2020년 3월부터 12월까지 근무하고, 2021년 3월부터 12월까지 근무했다. 지난해는 2월 28일부터 12월 말까지 근무했다. 그럼 나는 갱신기대권을 가지고 다퉈보든가 아니면 이미 2년을 초과해서 일했으니 무기계약직에 다름 아니고 나를 기간만료로 종료한 것은 부당해고라고 싸우거나, 법원에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을 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공무직(무기계약직)을 주장하는 여러 사유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동일업무를 반복적으로 채용해서 24개월을 넘긴 사례였다. 내가 이전에 경기지방노동위원회 노동자위원을 할 때 지금과 같은 사유로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진정을 낼 때가 꽤 여러 건 있었다. 대부분 노동자들의 신청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니면 퇴직금이나 위로금으로 조정 합의를 보는 경우도 몇 건 있었다. 당시에 공익위원으로 함께 많은 사건을 다룬 위원장 중에 현 고용노동부 장관도 있었다. 그분은 나름대로 노동자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합의 조정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내가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쟁의조정신청을 할 때도 사 측에게는 엄포를 놓으면서 간을 보고 노동조합에는 원하는 게 파업인지 조정인지를 확인해 주로 조정을 잘 끌어내는 수완을 보여주곤 했다. 얘기가 좀 샜지만, 산림과에서 더 이상은 같은 일자리로 채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게 핵심이다.

 

며칠간 생각을 하면서 ‘그냥 미친 척 부당해고 근로자 지위확인 신청을 해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산골에 와서까지 계속 직장에 목매어 산다는 게 맞지 않아 보였다. 여기서 죽자 살자 공무직 하려고 온 게 아니다. 그래서 이제 군청 산림과 일을 접고 한 두어 달 쉬면서 새로운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공공기관에서 하는 일 말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된다고 했다. 진짜 하고 싶은 일? 그게 뭘까 고민하는 와중에 나무의사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난번 한번 떨어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바심도 나고 긴장도 되었다.

 

나는 가방을 싸 들고 추운 방구석을 나와 따뜻한 도서관으로 출근했고, 금방 따뜻한 도서관에서 나름 열심히 책과 씨름을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아침엔 도서관, 저녁엔 마님 모시고 퇴근하기를 반복하는데 다시 산림과에서 연락이 왔다. 같은 업무는 아니지만, 유사업무에 대한 기간제를 채용할 예정이니 서류 접수하라는 얘기였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쉽게 내치기엔 3년이란 인연이 꽤 긴 시간이지. 혼자 웃음을 지으면서 출근 날짜를 쳐다본다. 다시 주중 노동자로 일하고 주말 취미로 농사짓는 아주 바쁜 삶이 시작되었다. 그 첫 시작을 2월 12일 밭에 가서 무너진 하우스 해체작업을 하고, 양파와 마늘밭에 거름 주는 일로 시작했다. 아~ 나는 내일 산림과에 서류를 접수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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