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연휴에 환장하는 농부

by 센터 posted Oct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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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명 시골에서 이것저것 하는 사람

 

 

황홀한 시월이 시작되었다. 첫 주 토, 일, 월요일을 쉬고 화, 수, 목, 금요일 출근한다. 또다시 토, 일, 월요일 쉬고 화, 수, 목, 금요일을 출근한다. 셋째 주 토, 일요일을 쉰다. 개인적으로는 10월 20일부터 24일까지 또 휴가를 냈으니 시월 마지막 주말까지 합쳐서 시월에는 보름이나 쉰다. 가히 한 달 내내 징검다리 황금연휴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건 기간제로 출근을 하는 노동자의 처지에서 볼 때 휴가이자 황홀함이지 농사를 짓는 농부 입장으로 돌아오면 반대가 된다. 평소 일주일에 이틀만 일했던 농사일이 일주일에 삼 일을 일해야 하고, 잠시 출근해서 쉬다가 다시 또 삼일을 농사일하고 그도 모자라서 휴가까지 내가며 일을 해야 한다. 그나마 요새는 해가 짧아져서 출퇴근 전, 아침저녁으로 밭에 가서 일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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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기간제 노동자와 농부로 살아가는 내 맘이 마치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둔 어미의 맘과 같다. 그래도 기간제 노동이 주업이고 농사를 짓는 일은 부업이라 친환경 시골 놀이로 생각하면서 오늘도 괭이를 들었다. 시월 첫 주에 밭을 만들고, 둘째 주에 비닐 멀칭을 해두었다가 셋째 주에 마늘과 양파를 심을 생각이다. 내가 고춧대를 모두 뽑아내 밭 어귀에 던져놓으면, 아내는 고춧대에 남아있는 풋고추와 빨간 고추를 딴다. 빨간 고추는 가을 햇볕에 말려 고춧가루로 쓰고, 풋고추는 밀가루를 묻혀서 살짝 데쳐 양념해 고추 무침으로 먹는다. 여기에 삼겹살 구워서 소주 한잔 마실 생각을 하면서 1인 쟁기를 끌고 끙끙거리며 고춧대가 박혀있던 두둑을 간다. 옛날 소가 끌던 쟁기를 이젠 소가 없으니 내가 끌어야 한다. 워낙에 고추밭에 풀매기를 제때 하지 않은 까닭에 쟁기가 흙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해도 쟁깃날이 풀 위를 슬슬 긁어버리고 풀이 쟁기에 걸려 끌려올 뿐, 속 시원히 흙이 뒤집혀서 파지지 않는다. 거기다가 아침저녁은 쌀쌀하고 찬이슬이 내려도 한낮은 왜 이리 더운 거냐? 기온은 25도까지 올라가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10분 일하고 20분 휴식이 필요하다.

 

그늘에 앉아서 토마토와 오이를 먹었다. 토마토는 찬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맞으면서 여름 때보다 더 맛나게 익어가는 것 같다. 조선오이도 시작은 외오이(청오이나 가시오이)보다 늦었지만, 늦여름부터 다산 본능을 발휘하면서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열리고 있다. 오이를 한입 크게 깨물어 먹으면서 선구자의 시선으로 내년 농사를 구상했다. 이제 점점 체력도 떨어져 가는 마당에 언제까지 혼자 쟁기를 끌고 괭이질로 두둑을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런 개고생을 하려고 시골 온 게 아니지 않는가? 내년부터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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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내년 1월에 임업인 생산(유통)기반조성지원사업을 신청해서 관리기를 하나 구해야겠다. 생산기반조성사업은 신청인과 정부가 각 50%를 내서 관리기나 예초기, 엔진톱, 저온저장고, 건조기 등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다. 미리 서류를 만들어 준비해 놓았다가 신청과 동시에 먼저 접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문제는 돈이다. 역시 시골살이는 돈벌레야. 돈과 벌레가 가장 문제다. 관리기 값이 약 300만 원 할 텐데 반값이면 150만 원은 있어야 한다. 다음 달에 직불금이 나올 테니 거기서 120만 원 보태고 나머지는 아내한테 12개월 무이자 할부로 빌려야겠다. 관리기를 사고 거기에 로타리와 두둑 만드는 휴립기를 달면 고추 농사나 양파 농사, 감자, 고구마 농사 같은 건 일도 아니겠지. 지금에 비하면 껌이다. 생각만 해도 농사일이 다 끝난 것처럼 맘이 편해진다. 내년 봄이 오면 관리기를 몰고 쭈욱 한번 돌면 밭이 깨끗이 뒤집어지고, 두둑기를 달고 한번 쭈욱 돌면 고랑과 이랑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휴립피복기를 달고 쭈욱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 풀을 뽑을 때도 관리기에 제초기를 달고 한번 쭉 지나가면 싹 뽑혀지겠지. 처음 농사를 지을 때는 삽질하고 괭이질하면서 맨손으로 흙 비비고 두둑 만드는 게 왜 그리 즐거웠는지. 그런데 한 해 한 해 농사를 지으면서 점점 편하고 싶어진다. 이건 농사가 주업인 사람들의 특성만은 아닌 듯하다. 암튼 나에게 내년은 관리기 농사의 원년이 될 것이다.

 

오늘은 10월 9일이고 또다시 3일간 연휴가 시작되었다. 농부로서는 반대로 3일간 중노동이 시작되었다. 10월 9일은 마늘·양파밭에 비닐 멀칭을 하고, 들깨를 벤다. 10월 10일은 파밭을 김매고 두릅 밭에 예초기질을 한다. 10월 11일은 들깨를 턴다. 3일의 농사 일정이 딱 잡혔다. 그런데 하늘도 나를 돕는 것인지 토요일 맑음, 일요일은 오후부터 비, 월요일은 온종일 비 예보가 있다. 이게 웬 떡이냐? 그럼 오늘 가서 마늘·양파밭에 멀칭만 하고, 산에 가서 감을 따야겠다. 내일 오전은 집 텃밭의 들깨를 털고, 오후엔 마라톤 연습을 하자. 마라톤 연습하고 나서 막걸리 한잔 쭈욱~ 월요일은 하루 종일 비라고 하니 호박전을 부쳐서 하루 종일 막걸리나 마셔야겠다.

 

아침에 아내가 “같이 갈까?” 묻기에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이 왜 필요하냐?”고 큰소리치고 밭으로 갔다. 익숙하게 비닐 감긴 두루마리에 쇠파이프를 끼우고 잘 돌아가게 양쪽을 고정한 후에 밭고랑 끝으로 끌고 갔다. 30여 미터 끝에다 비닐 끝을 묻고 돌아오면서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겨 멀칭을 했다. 서둘러 비닐 멀칭을 마치고 설레는 맘으로 들통과 장대를 챙겨 들고 뒷산 기슭으로 갔다. 밭에서 200여 미터 거리인데 사람이 다니질 않고 관리가 되질 않아서 온갖 풀들이 무성하다. 결초보은이라는 고사성어에 나오는 매듭 풀도 많고, 강아지풀도 열매가 맺혀 작은 풀씨가 장화 속으로 흘러든다. 작은 나뭇가지에는 환삼덩굴과 칡덩굴이 엉켜서 길을 막고 호랑이가 나올 지경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도깨비 풀이며 우슬이며 꼬투리 열매가 팔 다리, 허리춤에 들러붙었다. 거기에 가끔 얼굴을 스치는 거미줄은 왜 이리 찜찜하냐? 감나무엔 사오십 미터 멀리서 바라봐도 눈에 확 띠게 누런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어 혼자서도 환호성이 나왔다. 다음 순간, ‘저걸 어떻게 다 따가지?’ 하는 걱정까지 생겼다. 일단 가까운데 있는 것부터 살살 따기 시작했다. 감나무는 아주 쉽게 부러지는 성질이 있어서 감이 달린 가지를 끝에 잡고 살짝 구부리면 쉽게 부러진다. 좀 멀리 있는 것은 장대로 잡아당겨 땄다. 감은 금방 들통 두 개에 가득 찼다. 감은 나무마다 지천이라 더 따고 싶어도 담을 그릇도 없고 들고 갈수도 없어 아쉽지만 돌아서야 했다. 이럴 때 아내가 같이 오면 좋지만, 나는 감을 잔뜩 따다가 떡하니 보여주면서 놀라게 하고 싶었다. 아내는 곶감을 아주 좋아해서 곶감이 익어가기 시작하면 하루 몇 개씩 빼먹는다. 지난 두 해 동안 수백 개나 곶감을 만들었지만, 늘 설이 오기 전에 끝이 났다. 뿌듯한 맘으로 양손에 감이 가득 담긴 들통을 들고 산길을 다시 천천히 되돌아와서 차 있는 곳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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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들통을 양손에 들고 풀길을 헤치고 내려와서인지 산길을 걷는 게 긴장이 되어서인지 몸에는 땀이 물씬 났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행복한 상상을 했다. 이번 주에 이만큼 땄으니 다음 주에도 또 이만큼이 되겠지. 거기다가 오면서 아주 커다란 감나무를 한 그루 발견했는데, 그건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은 따갈 수도 없을 만큼 높게 달린 것이다. 아무도 딸 수 없고 나만이 딸 수 있다는 이기적인 상상을 하니 안심을 넘어 왠지 뿌듯하기까지 하다. 이 감정은 뭐지? 올가을은 내가 키운 농사가 아닌 자연이 키운 농사가 그야말로 대박이다. 밤도 세 포대를 주웠고, 감도 몇 통을 딸지 아직 계산조차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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