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에 쓰는 농사일지

by 센터 posted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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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명  시골에서 이것저것 하는 사람

 

 

입추立秋를 맞으면서 가을 농사도 시작되었다. 입추는 여름 중에 가장 무덥다는 대서大暑와 모기의 입이 돌아간다는 처서處暑 사이에 있다. 전에는 24절기에 대한 의미는커녕 이름도 관심 없었는데, 시골살이를 하면서 24절기에 관심과 의미를 새기며 농사일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면서 ‘조상들이 참 지혜롭게 절기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태음력을 사용하던 시기임에도 24절기는 양력으로 잡아서 태양과 계절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초를 세웠다는 게 더 놀랍다.

 

입추는 가을 농사의 이정표이고 더위를 마감 짓는 변동표이다. 물론 입추 뒤에 말복末伏도 있어서 아직은 덥지만, 벌써 아침저녁 바람은 이전과 다르게 선선하고 시원하다. 농사 또한 봄에 심은 것들은 성장에서 맺음으로 돌아서고, 수확을 마친 것들은 새로운 작물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때이다. 또 성장을 모두 끝낸 작물들은(대파, 부추, 도라지, 참외, 수박, 옥수수처럼) 씨를 발려 내년 종자를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가을 농사는 뭔가 연결이 되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띄워본다.

 

농사 (5).jpg

 

당근이나 비트, 오이는 4~5월에 심고, 6~7월에 뽑아먹는다. 그리고 7~8월에 또 씨앗이나 모종을 심어 9~10월에 수확해 먹는다. 이게 가을 농사인가? 8월 중하순에 무, 배추, 쪽파를 심어 11월에 거둬 먹는 게 가을 농사인가? 10월 말 콩이나 깨, 고추를 수확한 자리에 양파나 마늘을 심어 겨울을 나고 내년 봄에 수확하는 작물이 가을 농사인가? 하하하~~ 실상, 심는 시기도 다르고 몇 번씩 심고 뜯어먹는 채소도 많고, 가을에 씨를 뿌려 다음 해에 수확하는 작물도 많아서 어느 때를 가리켜 무엇을 가을 농사라 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여름 지나 심고 따고 뽑고 키우는 건 다 가을 농사라 부르고 싶다.

 

가을 농사를 짓기에 앞서 봄, 여름에 지은 농사가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절기에 따라 농사를 얘기하기도 하지만, 동네서는 주변 꽃피는 걸 보면서 농사를 시작하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벚꽃이나 개나리, 진달래, 아까시, 밤꽃이 필 때다.

 

벚꽃이 피는 시기에 심은 상추는 두 번이나 이어짓기해서 뜯어먹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어 누구나 키울 수 있는 만족도 높은 작물이다. 가을 상추도 엊그제 씨를 뿌렸으니 잘 자라리라 의심치 않는다. 감자는 개나리, 진달래 필 때 심어서 6월 장마 전에 캐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노지가 아닌 하우스에 심어서 좀 더 일찍 수확해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생각이었지만, 매주 물 주러 다니다 지쳐버렸다. 또 물 부족이었는지 꽃도 피지 않았고, 자라는 것도 더뎌 장마가 지나서야 수확을 했다. 가장 망친 활작물이다.

 

일 년을 나면서 가장 많이 사 먹은 게 당근이었다. 마트에서 당근 하나를 1,000원씩 사 먹는 게 너무 아까워서 여러 곳에 많이 심었다. 도시에서 주말농장을 하면서도 그렇고 귀농해서도 그렇고 한 번도 제대로 된 당근을 수확하지 못했다. 올봄엔 물 주는 횟수, 집에서 밭까지의 거리, 토질을 구분해서 마당 텃밭에, 집 근처 작은 밭 두 고랑에 나누어 심었다. 맛도 좋고, 수확량도 좋아서 랩으로 포장해놓고 하루에 하나씩 먹고 있다. 가을 당근도 기대만땅이다.

 

올해 처음 도전한 비트는 반타작을 했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 나눠 심었는데 처음 것은 실하게 잘 자라서 동글동글하고 단단해졌는데 일주일 뒤에 심은 것들은 왠지 모르게 부실하고 덜 자랐다. 작물의 시기가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파종 방식 문제인지 다시한번 가을에 시험해 봐야겠다(7월 20일경 심은 비트는 지금 잘 자라고 있어 기대감이 한층 커지고 있다).

 

수박과 참외는 각각 10주, 12주를 심었다. 수박은 한 주에 하나를 목표로 했고, 참외는 한 주에 8개를 목표로 했다. 두 작물은 키우는 방식에 차이가 있어 어릴 때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다. 수박은 원줄기와 아들줄기 하나만을 키워 꽃을 피우고, 수정되면 다른 줄기는 모두 제거했다. 그렇게 10주에 10개의 수박을 보았다. 참외는 원줄기에서 아들줄기가 날 때 원줄기를 잘라주고, 다시 아들줄기에서 손자줄기가 서너 개 생길 때 아들줄기도 잘라줘야 했다. 교과서대로 실행했음에도 결과는 참담했다. 10줄기에서 10개의 참외. “너 혹시 수박의 씨를 받은 참외냐?”라고 되물어야 했다. 지금이 8월인데, 아직도 꽃이 피고 수정이 되는 걸 보면 그나마 개똥참외가 몇 개는 더 열릴 듯하다.

 

계획대로 잘된 건 옥수수이다. 좀 늦은 5월에 첫 모종을 심고, 2주 뒤에 두 번째, 다시 한 달 뒤에 세 번째 옥수수 모종을 심었다. 네 번째는 7월에 심었다. 한 번에 모두 익어버리면 딱딱해져서 맛이 떨어지기에 2~3주 시차를 두고 네 번에 걸쳐 심었다. 예상대로 일찍 심은 옥수수는 7월 중하순에 따 먹었고, 2주 뒤에 심은 것은 8월 초에 따먹었다. 그리고 3차 모종은 8월 중순에 수확할 수 있고, 7월에 심은 것은 다음 달에 수확해 쪄먹을 것 같다. 농사가 이렇게 톱니바퀴 돌 듯 맞아떨어질 때 나도 이제는 농부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내가 가장 좋아한 건 토마토이다. 토마토 또한 세 곳에 나눠 심었는데 기대에 맞게 차례대로 잘 열리고 익어서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 마당 텃밭이 7월 말에 전성기를, 집 근처 작은 밭은 8월 중순에 전성기를, 산서 멧골은 8월 하순에 전성기를 보여주며 두 달 넘게 풍성하게 수확했다. 토마토를 달게 익히려면 쌀뜨물에 소금을 타서 거름으로 뿌려주면 좋다는 꿀팁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농사 (2).jpg

 

아까시꽃 필 때는 참깨를 심고, 밤꽃이 필 때 들깨를 심으라고 했다, 장마를 앞두고 심은 들깨는 점점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첫해는 네 말 반을 수확했고, 지난해는 세 말 반을 수확했다. 그럼 올해는? 풀 관리가 쉽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다. 입추에 한 번 더 풀을 잡아줘야 하는데 매주 쑥쑥 자라는 풀을 보면 기가 죽고 지겨워진다.

 

예년과 달리 올해 많이 심은 것은 서리태콩이다. 밥에 얹어 먹는 서리태는 밥맛도 좋고 영양도 좋다고 해서 늘 먹는데 한두 되 정도를 수확하곤 했다. 올핸 야심 차게 한 말을 목표로 여섯 고랑을 심었다. 지금까지는 잎이 무성하게잘 크곤 있는데 과연 꼬투리까지 잘 맺힐지는 모르겠다.

 

그 외 생강, 호박(단호박), 고추, 오이, 가지, 고구마, 도라지, 부추, 대파등은 관행대로 심고 풀 뽑고 김매주며 그럭저럭 키우고 있다. 입추는 가을걷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풀을 잡아주어야 제대로 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가을 농사는 자동차로 본다면 ‘페이스 리프트’라고나 할까? 봄 농사를 계속이어가면서 새롭게 몇 개를 추가하는 방식이라 딱히 무엇에 주력해야 하는지잘 와 닿지 않는다. 다만, 당근이나 비트, 감자처럼 이모작이 가능한 것을 다시 심고, 무, 배추, 쪽파처럼 김장철에 쓰일 것을 심고, 10월 말에 내년 봄 수확을 목표로 마늘, 양파를 심는다.

 

봄 당근에 대한 자신감으로 7월 20일경 또 세 곳에 씨를 뿌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직도 싹이 나질 않고 있다. 보통 열흘이면 야들야들한 새싹이 올라와야 하는데 말이다. 봄에 충만했던 자신감은 분노로 바뀌어 종자를 탓하고 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종묘사에서 봄에만 싹이 나게 하고 가을에는싹이 나지 않게 종자 소독을 한 건가? 그런 기술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1년 지난 종자는 발아율이 50% 미만으로 뚝 떨어진다. 요런 저런 생각으로 골똘히 매달려 보지만, 이미 때가 늦은 터라 시작도 하기 전에 망쳤다. 때 놓친 당근은 기대를 내려놓고 싹만 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 또 씨를 뿌렸다.

 

무와 배추는 자신 있게(?) 농사지을 수 있는데 김장을 처가에서 가져다 먹기 때문에 내겐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도 모종 한 판(105주)을 사서 여기저기 심었는데 가을 되면 처치 곤란이 될 수도 있겠다.

 

감자는 봄에 이미 망쳤는데 가을 감자에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계곡물을 끌어와서 물통에 담아두는 관수 시설을 설치했다. 이른바 점적관수. 이젠 밭에 가서 조리 들고 물 주러 고랑 사이를 다니지 않고, 그냥 밸브를 열어 물방울이 떨어지는 점적관수를 하면 된다. 과연 이 정도 물량으로 충분할지는 두고봐야 하지만 나도 신농사 기법을 도입한 것이 은근 뿌듯하다.

 

가을걷이하면서 줄기는 수명을 다해 말라비틀어지고 잎사귀 역시 노랗고 뻘겋게 단풍 지는 틈새에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누렇게 커진 늙은 호박이다. 나는 서리 내리기 시작하는 가을걷이에서 밭이나 울타리, 담벼락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늙은 호박을 만날 때 왜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올핸 호박을 30주나 심었기에 아마 호박 풍년이 되지 않을까 하고 김칫국부터 마셔본다.

 

커다란 기대를 걸었던 당근이 시작부터 저러하니 벌써 뭔가 허전하다. 마음과 바구니를 채우기 위해서는 ‘오래된 미래’의 유목민으로 돌아가야 할듯하다.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뜯어먹고 따먹고 캐 먹는 삶이다. 어디에 뭐가 많고 어디 것이 좋은지만 알고 때맞춰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다래는 말티재 세 번째 굽이에 많고, 알밤은 백운리 창터에 많고, 은행은 멧골 저수지 옆에서, 칡은 용계리 임도 옆에서, 겨우살이는 장안산 능선에서···. 그리고 능이나 송이는? 하하하~ 이건 여기에 적을 수 없다. 그냥 머릿속에만~

 

가을 문턱이라는 입추에 쓰는 가을 농사에 대한 단상이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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