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카 바퀴가 주저앉았다
켜켜이 쌓인 주름살 같은 상자가
안간힘을 다해 도로 한복판에서 벗어나려 한다
늘 벗어나려 했던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바퀴의 그늘
끌어도 끌어지지 않는 상자의 무게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나절 그늘을 받아낸다
푹 수그리고 앉았던 자리에
늙은 그림자는 꼼짝을 하지 않는데
홑겹의 낡은 옷이 휘청거리며
거리를 밀고 간다
묵묵히 바닥만 내려다보던
늙은 그림자가
스러지지 않고 어제도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박경희|1974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제 3회 조영관 창작기금 수혜.
시집 《벚꽃 문신》,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 권법》,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가 있음.
그리고 나는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헤어드라이어 소리에 아버지가 깨셨다 출근하니? 뜨거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바싹 말랐다 오늘도 늦을 거 같아요 가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나는 반대편 출구로 나와서 골목을 쏘다녔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그런 일 같은 건 늘 바닥을 보는 거나 마찬가지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 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오래 씹었다
최지인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까치조차 짓지 않는
30m, 40m 높이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땅 위에서 외치는 소리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 들리지 않아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는 일이야 늘 이어지고 있지만
더 높이 오르면 소리 전할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날개도 없는 사람들
까치집 보다 높은 곳에
이상한 집을 짓는다
* 인권. 통권 78호 한금선 님의 시선에서 인용함.
* 2013년 1월 4일 전주종합운동장, 천일교통 해고노동자 김재주 분회장이 철탑 농성을 함.
이상호 | 창원 출생. 1999년 제11회 ‘들불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개미집》이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5년 《깐다》 등을 펴냈다.
‘객토문학동인’,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명박은 4대강을 1열로 줄세우겠다더니
박근혜는 역사를 1열로 줄세우겠다는구나
이명박은 용산에서 철거민을 불태워 죽이더니
박근혜는 아예 역사를 분서갱유하겠다는구나
이명박은 자원외교랍시고 20억을 해먹더니
박근혜는 역사 자체를 꿀꺽하겠다는구나
도대체 우리는 날강도들을 뽑는 건지
대통령을 뽑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역사가 당신의 가족사인가
역사가 당신 가족의 족보책인가
역사가 고작 새누리당의 국정홍보책인가
역사쿠데타로 어제를 독점하고
노동법쿠데타로 2000만 노동자들의 미래를
한 줌도 안 되는 재벌집단들에게 헌납하겠다는구나
세월호에서
단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해주지 못한 무능 정권이
1년 반이 지나도록
25m 아래 세월호 하나도 인양하지 못하는 정권이
진실규명이나 탄압하는 정권이
역사의 키를 잡겠다고 하는구나
역사의 항로를 밝히겠다는구나
도대체 당신은 어떤
역사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국정원 대선 개입으로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불법탈취한 집단의 수괴일 뿐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사회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모든 노동자민중 시민들의
권리를 뺏아 자본에 헌납하는
좀비들의 우두머리일 뿐
아무래도 되게 맞아야겠구나
역사의 물줄기가 얼마나 거센지를 당해봐야겠구나
역사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숨가쁜 건지를 경험해봐야겠구나
역사의 갈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미로 속에 던져져봐야겠구나
역사의 철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맛봐야겠구나
역사의 평가가 얼마나 냉혹한 지를 맛봐야겠구나
아서라. 당신의 그 멍청한 수첩으로는
다 기록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미성숙한 인격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닭대가리가
해석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아서라. 당신 같은 시대의 죄인이
손댈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끝내 꺾이지 않을 것이며
밟을수록 더욱 날카롭게 솟아올라
당신과 당신 주구들의
심장을 겨눌 것이다
송경동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못난 시인》(공저),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 《사람을 보라》(공저) 등이 있다.
부서진 사월
시계침에 매달린 인간들이 땅을 보며 걷는다
어젯밤에 썼던 콘돔은 튼튼한 것이었을까
일본 원전을 덮어씌운 콘크리트는 안전한 것일까
어제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이 오늘은 당신을 모른 체하고 지나간다
바닥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포개졌다가 흩어진다
잠시, 괴물의 형상이 되었다가 딱딱한 혼자가 된다
빈혈에 시달리는 가로수들
나뭇잎의 뒷면에서 어둠이 뚝뚝 떨어져
나무 밑동에 고인다
저 멀리서 온통 눈물로 젖은 얼굴이 걸어온다
그의 자식이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의사에게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은 것일까
그는 자신의 눈앞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불행들을 손으로 걷어내려는 듯
양팔을 휘저으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눈을 감았다
그를 붙잡고
내가 같이 울어줄까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를 껴안으면 그는 물이 되어 쏟아질 것 같았다
눈을 뜨니 구명정 같은 구름이 떼를 지어 흘러가고 있다
나는 햇살의 뼈를 만져본다
뼛가루 같은 햇살이 내 손바닥을 데웠다
죽어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나뭇잎이 떨고 있다
이 지상에 파견된 봄은 갈 곳을 몰라 서성거린다
가운데부터 검게 시드는 목련 잎에는 자신의 몸에 권총을 쏜 것 같은
탄흔이 남아 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붕대를 감고 또 하루를 건너가겠지
눈을 감으면 수면을 뚫고 수많은 소금 인형이 걸어나온다
데운 조약돌로 눈두덩을 지져도 사라지지 않는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부서진 사월〉은 계간《시로 여는 세상》
2014년 가을호에 발표됨.
엄지손가락
20년 전 보상금으로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
고춧대로 박아놓은 깃발 하나
덩그러니 마을 푯돌 앞에서 서성거린다
갈 데라고는 노인정밖에 없는 이씨 아저씨
한숨이 집까지 가 있다
그 많던 논밭 노름 바람으로 날려 보내고
엄지손가락 하나 끊고서야 멈췄는데
마누라도 날아간 자리에
개발인지 게발인지 신축부지 조성한다며
고향 밖으로 날아가란다
앞에서 막아도
뒤에서 밀어도
용달차가 울고
경운기 달달 거려도
보리 빤쓰 젖고
쌀 빤쓰 찢어져도
굴착기 돌아가는 소리 요란하게
벚꽃만 날린다
치켜들 엄지손가락 없이
주먹 쥐면 헛바람이 먼저 날아가는 자리
이씨 아저씨 바지춤 올리며
대낮 술주정이 한창이다
박경희
충남 보령 출생. 《시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벚꽃 문신》,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가 있음.
알 수 없는 것들
김은경
오늘도 우리는 구름을 흠모하고
곧 탄로날 거짓말을 공모하네
그 수북한 라이터는 매일 어디로 사라지나
물은 누가 마셨나
펜은 어디 두었나
흡혈귀 같던 장미는 누가 썩게 놔뒀나
햇반은
라면은
어느 구석에 있다가
유통기한 지나서야 찔끔 나타나는가
이 많은 바람은 누구의 부역인가
태풍은 어디서 오는가
안남마을 사과나무 과실은 누가 달았나
자욱한 안개는 누구의 몫인가
남은 자의 유산인가 떠난 사람의 상흔인가
만장 같은 시신은 대체 누가
나무에 매달아 놓았나
혐의는 추억처럼 펄럭인다
눈부시게
뻔뻔하게
흰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
마당에 떨어진 깃털을 무겁게 주워든다
아름답다
죽고 없는 모든 것들과
고통스럽게 죽어간 이들이 겪었던
세계가 협소한 침대 안에 웅크리고 있다
잘 잠들고 잘 깨어나기 위해
사이좋게 살아가기 위해
근육과 뼈와 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다
잠과 삶
무신경과 죽음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바깥
어제까지 살아 있던 이들의 아침저녁과 다르지 않은
우리 대신 죽어간 모든 이들의 손발과 다르지 않은
내가 그들 대신 죽을 순간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잘 헤아리며 차분히 살아야지
글|시인 이진희
멀쩡하고 매끈한 밤 속에 웅크리고 앉아
속살을 파먹고 있는 애벌레
가부좌를 틀고 앉은 폼새가
부처님 못지않은데
겉은 멀쩡하니 건강미 넘쳐흘러서
한눈에 보기도 탓할 것 없다
머리도 없고 가슴도 없고
겉옷 매무새만 단정하니 차려입은 알밤들이
지하도 에스컬레이터 계단에서
우르르 쏟아진다
필살기로 뜨거운 냄비에 투항한다
벌레에 속살이 파먹히는지도 모른 채
남의 속살이나 탐내며 분주히 걸어가는
가공할 껍데기들이
앞다투며 삿대질하며
도심 속 빌딩 꼭대기를 향해 질주한다
글|시인 조혜영
어머니는 초상이 날 때마다 내 손을 잡고 갔다 놀다가도 재 너머까지 가곤 했는데 초상집
이 누구네냐 물어도 그냥 따라오기나 하라며 발길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대문에 들어서자마
자 아이고 아이고 하며 구성지게 곡을 하셨다 옆 사람도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어머니의 곡
소리였다 친척집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왜 그리 슬피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죽
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 슬프게 곡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빨리 먹으라고 나만 듣게 눈짓
을 하셨다 한참 곡을 하며 울다가 고개를 돌려 살짝 웃으며 많이 먹었냐며 소근댄다
그때 바뀌던 어머니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그 슬픈 끼를 이어받았다는
어느 중년배우의 고백을 듣다가
우리는 늘 제 기쁨을 위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모두가 배우라는 생각을 한다, 역만 달랐을 뿐
글|시인 조문경
너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자본에 혹사당한 이 땅의 노동자
자본과 정권과 관료의 결탁으로
바다에 수장된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장, 특근, 휴일노동 수난을 당하듯
너도 어찌할 수가 없었구나
20년이 한계였던 너의 노동력은
자본과 정권과 관료에 의해
30년으로 늘어나는 수난을 당했지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증축이라는 수난을 당했지
택배 특수고용 노동자가
할당량을 무리하게 배정받듯
네 몸에 과적된 화물들
네가 감당해야 할 짐은
너무나 무겁고 버거웠다
병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제때에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하듯
고장 난 너의 부품들 또한
제때에 제대로 정비를 받지 못했다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최소한의 생계비마저 착취당하듯
노쇠한 네가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평형수마저 착취당했다
이 땅의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무소불위 자본에 착취당하며
사랑하는 가족 가슴에 품고
막막한 노동판에서 병들어 죽어가듯
망망한 바다에 침몰된 세월호여!
떠안은 짐 힘이 부쳐
사랑하는 꽃다운 어린생명들
가슴에 품고
바다에 수장된 세월호여!
너는
바다에 수장된 비정규직 노동자!
다시, 떠올라라
분노하듯 떠오르고
떠오르듯 분노하라
그리하여
푸른 새벽바다 파도 헤치고
새날을 여는 붉디붉은 태양처럼
새 세상을 열자
글|시인 정세훈
밀양밀양 하고 입안에 되뇌기만 해도
미량미량 부드러운 햇살이 온몸을 소곤소곤 감싸던 밀양 간다
언제였더라, 영남루에 올라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게도 부러워했던
그런 진한 풍경을 더듬으며 밀양 간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서로 몸을 의지하며
정겹게 흐르는 밀양강
그런 강 같은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밀양 간다
76만 5천 볼트를 실어 나르는 송전탑이 날벼락처럼 떨어지고부터
밀양강으로 햇살이 떼로 몰려왔다
흔적 없이 사라진 자리마다
무성한 소문들만 둥둥 떠다닌다는 밀양에 간다
밀주교를 지나 남천교를 빠져나가면서도
내 기억의 눈부셨던 햇살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밀양, 지난여름 가혹한 시간을 견디느라
산이며 들이며 강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밀양
나 오늘 밀양 간다
글|시인 최상해
땀내가 유난히 시큼했다 뜨거운 여름보다 더 뜨겁게 달아오른 2011년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서 꽃 한 송이 말라가고 있었다 태풍이 불어 휘청거리는 크레인 위에서 꽃은 제 몸을 뜯어먹고 몹시도 흔들려 낙화 직전이었다 꽃잎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줄기는 말라비틀어질 무렵 난쟁이꽃들이 꽃잎을 떼어 엮은 다리를 타고 꽃은 현세로 내려왔다 형형색색 수천 송이 난쟁이꽃들이 물을 주고 그늘을 만들고 목숨을 나누었다 다시 꽃봉오리가 쑤욱 올라왔다 찬란하게 삶을 태우고 물들어가는 꽃 한 송이보다 작은 난쟁이꽃들이 모여 거대한 꽃밭을 이루었다 나비도 벌들도 날아들었다 흙으로 강으로 스며들어 더 척박한 곳에 뿌리를 뻗고 또 다른 꽃을 피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작은 난쟁이꽃들의 반란 찰나에 낙원이 지나가신다
글|시인 김사이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