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에 들어가는 것은 체온을 잃는 일이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살얼음이 끼었다 달력의 날짜들은 빙점 밑에서 동상을
입었고 나는 그 방의 둘레를 상자라고 불렀다 언 뺨이 터지면
불이 켜지는 어둠이었다 커튼 대신 쳐 놓은 런닝셔츠 사이에
관을 그대로 세워 놓은 것 같은 냉장고가 있었다 빈 그릇들은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떨었고 자주 주저앉았다 불을
얼어붙게 만드는 둘레였다 없는 두부이고 숫자가 사라진 달력
이었다 냉기가 차오르는 방이 사람 하나를 저장하고 있었다
최세라 시인
2011년 계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콜센터 유감》이 있다.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의 통화 기록을 확인합니다
나의 배는 언제나 차가워서
분명 뜨겁지 않은 말들을 밤새
쏟았을 것입니다
소화되지 않는 언어들을
차마 시어로는 만들지 못하고
온몸이 가시로 가득 차지 않게
온몸이 꽁꽁 얼어
스치는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날이 선 말로 상처를 주진 않았을까요
휘청거리는 건물의 불빛을 등지고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게
배를 쓸며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릅니다
주름진 시간이 가득한 좁은 방에
조금은 따듯해진 배를 끌어안고 누워
오늘도 통화기록을 뒤집니다
안녕,
잘 지내고 있니.
발신이 금지된 휴대전화의 통화기록은
오래전 날짜에 멈춰있습니다
김진 시인
2007년 《경남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시집 《바다 고시원》
매량리 산 중턱
빈집을 지키는 개 한 마리
목줄에 매여 있다
지난밤, 흩날렸던 참나무 이파리를
잡초 무성한 마당에 던지며
비가 지나간 것인지
머리 젖은 개가 무너진 마루 밑에 엎드려있다
툇마루 삭아 귀퉁이마다 내려앉았고
가르랑거렸던 안방
바람벽은
흙이 털린 지 오래
햇살도 비껴간 곳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지고
잔잔해진 바람을 등지고
노루잠을 자던 개가 눈을 뜬다
돌담에 앉았던 산 그림자가
매가리 없이 컹컹 짖는 개 소리에 놀라
후딱 지나간다
밥그릇에 고인 물이
바람에 쓸려가는 것이 쓸쓸해서
개는, 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박경희 시인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제3회 조영관 창작기금 수혜.
시집 《벚꽃 문신》,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 권법》,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 《차라리 돈을 달랑께》가 있다.
연필심처럼 뭉툭한 철근을 한쪽 어깨에 인 사람
좀만 더 잘 휘어졌더라면
보다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아시바에서 작업을 하다 건물 4층 높이에서 떨어진 인부
배는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서
엎어진 헬멧처럼
언덕 하나를 만들어내고
금세 빌딩만큼 높아진다
터지지는 않고 숨은 이내 꺼졌다
손에 쥔 만년필을 철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언젠가 내가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말
미끌미끌한 종이에 기댄 만년필촉처럼
궂은일이라면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기질은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생긴 것이다
나는 통유리에 비친 이와 나란히 걷는다
고층 빌딩에 매달린
낡은 옷가지가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농성 현장은 작은 숨김에도 흩어져버리는
종잇조각처럼 보인다,
라고 메모장에 쓴다
누가 죽어야만 잠깐 모이는 광장에서
곧 끝난다는 사람들의 절망 예행연습은
어느덧 진부한 생활로 자리를 잡고
나의 눈망울은 그들이
내려다본 점조직의 밤거리를 닮아간다
그 눈으로 본 세상엔
건물의 밑바닥과 꼭대기를 잇댄
투명한 철근이 있다
온몸이 짓뭉개져
숨을 헐떡이는 내가 있다
문경수 시인
2019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했다.
밤새 달려온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는 순간 어제가 오늘이 되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봄소식과 함께 전해왔다
무료급식소가 있었던 자리
한 아버지가 말줄임표로 서 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림자도 함께 서 있다
무쇠 바퀴 굴러가는
쇠 울음소리가 들리는 서울역
사금파리를 입에 문 그믐달이 오늘도
염천교 다리 위에서 자가격리 중이다
*제목은 이탈리아 루도비코 뒤 마르티노 감독의 영화 〈짐승의 시간〉에서 차용했다.
이권 시인
전직 철도 노동자였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민예총 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아버지의 마술》과 《꽃꿈을 꾸다》가 있다.
옆에서 불쑥 손을 내밀었을 때
하마터면 악수를 할 뻔 했다
지금 우리는 낯선데
내게 손을 내미는 저의는 무엇인가
거절에 대해서 생각한다
뒷맛을 남기는 씁쓸한 손들에 대해
일치한 적 없는 손금 때문에
아귀가 맞지 않던 생각의 틈들
앞뒤 잴 것 없이 먼저 흔들고 온 날은
기분이 명랑해질 때도 있었다
정산할 수 있다면 몸을 숙이며
손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출구에서 알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내민 빳빳한 지폐가
차단기를 들어 올린다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눈물 이후》 합동시집 《시골시인-K》를 냈다.
일행과 헤어져 혼자 걸었다
영등포역 근처에서
복이 많아 보인다며 한 여자가 따라붙었다
빨리 걸으니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얼마 못 가서
행주에 아파트 분양 전단지를 끼워서 주는 여자를 만났다
행주 때문에 받았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라는 남자를 만났다
눈을 맞추기도 전에
다른 사람한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건널목을 다 건넜을 때
뒤에서 비켜달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어카를 끌고 오는 노인이었다
클랙슨 소리가 리어카 옆구리를 물어뜯고 있었다
복도 행주도 아파트 분양 전단지도 예수도 없었다, 리어카에는
빈 박스만 가득 실려 있었다
이장근 시인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2010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동시)으로 등단했다.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불불 뿔》
시집 《꿘투》, 《당신은 마술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림책 《아기 그리기 ㄱㄴㄷ》 등이 있다.
수만 장의 웃음이 찍힌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몇 가지 작물이 자라고
가을걷이로 햇빛에 그을려도
접었다 펴면
한번쯤 하얗게 화장발을 곧추 세울 것 같은 너른 밭
어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
주름에서 떨어지는 땀
마을을 떠난 나는 주름에서 튀어 나간 것
자식들 다 빠져나가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의 부피
갈수록 비어지는 내부가 쭈굴쭈굴 해 진다
접혀져 있는 시간들이 펴질 것 같지 않은
갈아 놓은 밭이랑 사이
주름의 긴 고랑이 여름을 지난다
연금술처럼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어머니의 주름
주름위에서 자라는 것들
뛰어 놀던 발자국 문양 튕겨 나간 부분이 진하게 남아 있다
한번쯤 뽀얗게 화장시키면
수분을 받은 흙들이 쫙쫙 펴질 것 같은
어머니 주름진 얼굴에 화장 하고
도시의 딸집 간다
겨울에 펄럭펄럭 날리는 하얀 비닐처럼
쩍쩍 일어나는 화장기
주름진 부분만 고요하다
여름과 가을을 지난
밭이 주름에 잠겨있다
이지호 시인
2011년 제11회 창비신인 시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말끝에 매달린 심장》,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가 있다.
애착 이불 속으로
사라진 막내는
숨을 견디는 걸까
이불을 당기면
젖은 머리로
악몽을 쥔 사람처럼
숨을 몰아쉰다
나는 이불을 훔치고
엄마는 악몽을 태운다
끊어지지 않는
검은 연기를 쫓는다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은 결속일까
별이 묻힌다
별들의 무덤일까 생각한다
생각 좀 그만할 수 없니,
생각을 빼앗길 수 있다
김미소 시인
198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2019년 《시인수첩》으로 등단했다.
더 늦기 전에
꽃 보러 가자 했더니
그 꽃 지면
다른 꽃 핀다고 했다
다시는 못 만날 인연일까봐
마음이 아팠다
텅 빈 귀를 열어둔 채
지나간 봄,
꽃무덤이 가득했다
흔들리는 것들은
흔들린 곳에서
마음을 다 쏟고 말았나
붉은 꽃물이 흐르는 길 위에서
나는 또 하루를 더 살고
너에게서 하루 더 멀어진다
박주하 시인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가 있다.
한줌씩 익힌 규칙이
어느 날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내가 되었을 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뭉개졌어야 했어
뭉개진 것이 나인지 세상인지 구별할 수 없어서
하천을 따라 한강에 가듯이
한강에 도착해서 노을이 질 때까지
강물을 접는 리버 한을 부르듯이
내가 나에게 당신 언제 왔어?
힘이 빠진 인사를 건네듯이
봄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지만
봄이 도착해서 펼쳐놓고 있는 꽃들이
이름을 떨어뜨리며 시들어갈 때까지
봄은 온다
하지만 헤어질 때 하는 인사에는
이별이 스며들지 않는다
이상해 달라진 게 없는데
어느 날 너무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작은 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공포
반복이 되면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진 것 같기도 해
내가 꿈꾸던 생활이 너무 시시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
나 아마도 시시하게 살다 죽을 것 같아
너는 잘 지내고 있니? 내가 나에게 건넨 인사가 되돌아올까
급하게 다시 걷기 시작했어
안주철 시인
200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가 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비가 오네
당신의 말이 도시 틈새로 스며들어 비구름을 만들었다
붉은 육개장 국물을 삼키는데
왜 하필 고사리가 왜 하필 토란대가
비 오는 날은 억울한 일 천지
우기도 아닌데 비는 계속 내린다 저녁에도 새벽에도
설거지통에 밀린 그릇들이 쌀통의 벌레들이
스멀스멀 빗방울처럼 기어나와
뒤통수가 가렵다
온몸이 물로 꽉 찬 다육식물처럼
시치미 뚝 떼고 살아가는 게 생이란다,
꿈에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다시 쌀을 씻어 안친다
고등어를 구워도 가시를 삼켜도 딸꾹질이
그치지 않는다
김은경 시인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량 젤리》,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냈다.
꿀처럼 비가 흐를 때
사람들이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핥고 서로에게 키스하던
때, 덩굴풀이 무성하게
담장을 허물던 날들에
빗방울을 모아 접시에 두고
여름의 짧은 밤을
춤추며 보내던 시절에
비를 말려 얻은 색으로
연인의 이마에
혈관의 무늬를 탁본하던 꿈결에
잡아먹힌 빛들이 흐르고
어둡다 여전히 비는 가볍게
빛나며 나는데
목덜미의 흰빛을 물고 비가 툭,
사라지는 비
깔깔 웃으며 가버리는 비
사람 잡아먹는 비에 홀렸대
소중한 걸 묻어둔 곳을 찾지 못해서
맹렬하게 건조한 우기를
그저 견디고만 있는 거래
범람하지 않는 비를 골몰한다
눈이 타버릴 때까지
좋았던 날의 돌을 움켜쥐고
때가 오면 내리칠 것이다
또 한 명이 쓰러진다 어스름이 짙어진다
기도를 잊고 텅 빌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주마등 속에 산다
비가 속살거리는 옛 기억에 들려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또 한 명이 쓰러진다 비가 툭,
주검의 관절마다 비가 툭,
빗방울만 환한 나라에서
비에 갇힌 꿈의 군락에서
오로지 비만,
사랑스럽다
이용임 시인
2007년 한국일보 시 부문 당선. 시집 《안개주의보》 《시는 휴일도 없이》, 산문집 《당신을 기억하는 슬픈 버릇이 있다》가 있다.




삼촌은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고
엄마는 노동자의 날이라서 쉬고
삼촌은 회사 안 가서 좋다고 하고
엄마는 회사 잘릴 것 같다고 하고
삼촌은 굴뚝이 있었다는 옛날 목욕탕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굴뚝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삼촌은 누나 일 아니니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라 하고
엄마는 내 일 될 수 있으니까 관심 가져야 한다고 하고
난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나 노동자의 날이나 상관없다
엄마나 삼촌이나 저런 소리 안 하고
삼촌이나 엄마나 잘릴 걱정 없이
편안히 쉬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시끄러워 죽겠다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냉장고에 호박 오이 무생채 무쳐놨으니까 대접에 넣고 비벼먹어 고추장은 베
란다에 있고 참기름은 가스레인지 찬장에 있어 맨날 빵 같은 거 먹지 말구 된장
국은 쉬었는지 확인 한 번 해보고 먹어 오늘은 어디 가니 일찍 들어와 엄만 새벽
에 나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했다
엄마는 집에 없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집에 있고
시위대가 톨게이트 옥상을 점거 중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퇴근했다
올라간 지 한 달째라고 했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잤다
이종민 시인
2015년 《문학사상》 등단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