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by 센터 posted Aug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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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량리 산 중턱

빈집을 지키는 개 한 마리

목줄에 매여 있다

지난밤, 흩날렸던 참나무 이파리를 

잡초 무성한 마당에 던지며

비가 지나간 것인지

머리 젖은 개가 무너진 마루 밑에 엎드려있다

 

툇마루 삭아 귀퉁이마다 내려앉았고

가르랑거렸던 안방

바람벽은

흙이 털린 지 오래

햇살도 비껴간 곳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지고

잔잔해진 바람을 등지고

노루잠을 자던 개가 눈을 뜬다

돌담에 앉았던 산 그림자가

매가리 없이 컹컹 짖는 개 소리에 놀라

후딱 지나간다

 

밥그릇에 고인 물이

바람에 쓸려가는 것이 쓸쓸해서

개는, 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 

 

[크기변환]박경희.jpg

박경희 시인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제3회 조영관 창작기금 수혜. 

시집 《벚꽃 문신》,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 권법》,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 《차라리 돈을 달랑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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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by 센터 posted Jun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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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심처럼 뭉툭한 철근을 한쪽 어깨에 인 사람

 

좀만 더 잘 휘어졌더라면

보다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아시바에서 작업을 하다 건물 4층 높이에서 떨어진 인부

 

배는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서 

엎어진 헬멧처럼 

언덕 하나를 만들어내고 

금세 빌딩만큼 높아진다

 

터지지는 않고 숨은 이내 꺼졌다

 

손에 쥔 만년필을 철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언젠가 내가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말

 

미끌미끌한 종이에 기댄 만년필촉처럼

궂은일이라면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기질은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생긴 것이다

 

나는 통유리에 비친 이와 나란히 걷는다

 

고층 빌딩에 매달린

낡은 옷가지가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농성 현장은 작은 숨김에도 흩어져버리는

종잇조각처럼 보인다,

라고 메모장에 쓴다 

 

누가 죽어야만 잠깐 모이는 광장에서 

곧 끝난다는 사람들의 절망 예행연습은 

어느덧 진부한 생활로 자리를 잡고 

 

나의 눈망울은 그들이 

내려다본 점조직의 밤거리를 닮아간다

 

그 눈으로 본 세상엔 

건물의 밑바닥과 꼭대기를 잇댄 

투명한 철근이 있다 

 

온몸이 짓뭉개져 

숨을 헐떡이는 내가 있다

 

 

 

[크기변환][크기변환]문경수.jpg

문경수 시인

2019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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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시간

by 센터 posted Apr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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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달려온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는 순간 어제가 오늘이 되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봄소식과 함께 전해왔다

 

무료급식소가 있었던 자리 

 

한 아버지가 말줄임표로 서 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림자도 함께 서 있다

 

무쇠 바퀴 굴러가는 

쇠 울음소리가 들리는 서울역

 

사금파리를 입에 문 그믐달이 오늘도 

염천교 다리 위에서 자가격리 중이다 

 

 

*제목은 이탈리아 루도비코 뒤 마르티노 감독의 영화 〈짐승의 시간〉에서 차용했다.

 

[크기변환]이권.jpg

이권 시인

전직 철도 노동자였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민예총 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아버지의 마술》과 《꽃꿈을 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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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맛

by 센터 posted Feb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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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불쑥 손을 내밀었을 때

하마터면 악수를 할 뻔 했다

 

지금 우리는 낯선데

내게 손을 내미는 저의는 무엇인가

 

거절에 대해서 생각한다

뒷맛을 남기는 씁쓸한 손들에 대해

 

일치한 적 없는 손금 때문에

아귀가 맞지 않던 생각의 틈들

 

앞뒤 잴 것 없이 먼저 흔들고 온 날은

기분이 명랑해질 때도 있었다

 

정산할 수 있다면 몸을 숙이며

손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출구에서 알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내민 빳빳한 지폐가

차단기를 들어 올린다

 

[크기변환]권상진.jpg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눈물 이후》 합동시집 《시골시인-K》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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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카를 구원하라

by 센터 posted Dec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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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과 헤어져 혼자 걸었다

영등포역 근처에서

복이 많아 보인다며 한 여자가 따라붙었다

빨리 걸으니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얼마 못 가서

행주에 아파트 분양 전단지를 끼워서 주는 여자를 만났다

행주 때문에 받았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라는 남자를 만났다

눈을 맞추기도 전에

다른 사람한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건널목을 다 건넜을 때

뒤에서 비켜달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어카를 끌고 오는 노인이었다

클랙슨 소리가 리어카 옆구리를 물어뜯고 있었다

복도 행주도 아파트 분양 전단지도 예수도 없었다, 리어카에는

빈 박스만 가득 실려 있었다

 

[크기변환]사본 -이장근.jpg

이장근 시인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2010년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동시)으로 등단했다.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불불 뿔》 

시집 《꿘투》, 《당신은 마술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림책 《아기 그리기 ㄱㄴㄷ》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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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의 노래

by 센터 posted Oct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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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장의 웃음이 찍힌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몇 가지 작물이 자라고

가을걷이로 햇빛에 그을려도

접었다 펴면

한번쯤 하얗게 화장발을 곧추 세울 것 같은 너른 밭

 

어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

주름에서 떨어지는 땀

마을을 떠난 나는 주름에서 튀어 나간 것

자식들 다 빠져나가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의 부피

갈수록 비어지는 내부가 쭈굴쭈굴 해 진다

 

접혀져 있는 시간들이 펴질 것 같지 않은 

갈아 놓은 밭이랑 사이

주름의 긴 고랑이 여름을 지난다

연금술처럼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어머니의 주름

주름위에서 자라는 것들

뛰어 놀던 발자국 문양 튕겨 나간 부분이 진하게 남아 있다

한번쯤 뽀얗게 화장시키면

수분을 받은 흙들이 쫙쫙 펴질 것 같은

 

어머니 주름진 얼굴에 화장 하고

도시의 딸집 간다

겨울에 펄럭펄럭 날리는 하얀 비닐처럼

쩍쩍 일어나는 화장기

주름진 부분만 고요하다

 

여름과 가을을 지난

밭이 주름에 잠겨있다

 

[크기변환]이지호.jpg

이지호 시인

2011년 제11회 창비신인 시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말끝에 매달린 심장》,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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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

by 센터 posted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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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이불 속으로

사라진 막내는

숨을 견디는 걸까

 

이불을 당기면

젖은 머리로

악몽을 쥔 사람처럼

숨을 몰아쉰다

 

나는 이불을 훔치고

엄마는 악몽을 태운다

끊어지지 않는

검은 연기를 쫓는다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은 결속일까

 

별이 묻힌다 

별들의 무덤일까 생각한다 

생각 좀 그만할 수 없니,

 

생각을 빼앗길 수 있다  

 

 

 

[크기변환]김미소.jpg

김미소 시인

198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2019년 《시인수첩》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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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그럼에도

by 센터 posted Jun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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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꽃 보러 가자 했더니

 

그 꽃 지면

다른 꽃 핀다고 했다

 

다시는 못 만날 인연일까봐

마음이 아팠다

 

텅 빈 귀를 열어둔 채  

지나간 봄, 

꽃무덤이 가득했다

 

흔들리는 것들은

흔들린 곳에서 

마음을 다 쏟고 말았나

 

붉은 꽃물이 흐르는 길 위에서

나는 또 하루를 더 살고

너에게서 하루 더 멀어진다 

 

박주하.jpg

박주하 시인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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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지 못하는 인사

by 센터 posted Apr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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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씩 익힌 규칙이

어느 날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내가 되었을 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뭉개졌어야 했어

 

뭉개진 것이 나인지 세상인지 구별할 수 없어서

하천을 따라 한강에 가듯이

 

한강에 도착해서 노을이 질 때까지

강물을 접는 리버 한을 부르듯이

 

내가 나에게 당신 언제 왔어?

힘이 빠진 인사를 건네듯이

 

봄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지만

봄이 도착해서 펼쳐놓고 있는 꽃들이

이름을 떨어뜨리며 시들어갈 때까지

 

봄은 온다

 

하지만 헤어질 때 하는 인사에는

이별이 스며들지 않는다

 

이상해 달라진 게 없는데

어느 날 너무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작은 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공포

 

반복이 되면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진 것 같기도 해

 

내가 꿈꾸던 생활이 너무 시시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

나 아마도 시시하게 살다 죽을 것 같아

 

너는 잘 지내고 있니? 내가 나에게 건넨 인사가 되돌아올까

급하게 다시 걷기 시작했어

 

[크기변환][크기변환]안주철.jpg안주철 시인

200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느낌은 멈추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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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역吃逆

by 센터 posted Feb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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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날 때마다 비가 오네

당신의 말이 도시 틈새로 스며들어 비구름을 만들었다

 

붉은 육개장 국물을 삼키는데

왜 하필 고사리가 왜 하필 토란대가

비 오는 날은 억울한 일 천지 

 

우기도 아닌데 비는 계속 내린다 저녁에도 새벽에도

설거지통에 밀린 그릇들이 쌀통의 벌레들이

스멀스멀 빗방울처럼 기어나와

뒤통수가 가렵다

 

온몸이 물로 꽉 찬 다육식물처럼

시치미 뚝 떼고 살아가는 게 생이란다,

꿈에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다시 쌀을 씻어 안친다 

고등어를 구워도 가시를 삼켜도 딸꾹질이 

 

그치지 않는다

 

김은경.png

김은경 시인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량 젤리》,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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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의 나라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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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처럼 비가 흐를 때

사람들이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핥고 서로에게 키스하던

때, 덩굴풀이 무성하게

담장을 허물던 날들에


빗방울을 모아 접시에 두고

여름의 짧은 밤을

춤추며 보내던 시절에


비를 말려 얻은 색으로

연인의 이마에

혈관의 무늬를 탁본하던 꿈결에


잡아먹힌 빛들이 흐르고

어둡다 여전히 비는 가볍게

빛나며 나는데


목덜미의 흰빛을 물고 비가 툭,


사라지는 비

깔깔 웃으며 가버리는 비


사람 잡아먹는 비에 홀렸대

소중한 걸 묻어둔 곳을 찾지 못해서

맹렬하게 건조한 우기를

그저 견디고만 있는 거래


범람하지 않는 비를 골몰한다

눈이 타버릴 때까지

좋았던 날의 돌을 움켜쥐고


때가 오면 내리칠 것이다


또 한 명이 쓰러진다 어스름이 짙어진다


기도를 잊고 텅 빌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주마등 속에 산다

비가 속살거리는 옛 기억에 들려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또 한 명이 쓰러진다 비가 툭,

주검의 관절마다 비가 툭,


빗방울만 환한 나라에서

비에 갇힌 꿈의 군락에서


오로지 비만,

사랑스럽다


이용임.jpg 이용임 시인

2007년 한국일보 시 부문 당선. 시집 《안개주의보》 《시는 휴일도 없이》, 산문집 《당신을 기억하는 슬픈 버릇이 있다》가 있다.


말의 힘

by 센터 posted Aug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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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닿아 반짝이는 칼끝 마주치면
반짝이는 그 칼끝 닮고 싶었다

미풍에 부드럽게 떠는 깃털 발견하면
부드러운 그 깃털 닮고 싶었다

자주 
손과 발이 차디찼다 몸의 온기
칼끝과 깃털에 온통 빼앗긴 것처럼
마음이 텅 비었다 약탈하도록 
칼끝 햇빛과 깃털을 건드리고 간 바람에게
빗장을 열어둔 것처럼

나 아닌 것을 닮으려고 했다
나 아닌 것이라면 
대체로 아름답고 부드럽다고 여겨져

온기도 영혼도 없던 나에게도
아름답다고 얘기해 준 이가 있었으나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오래도록

여전히 손발이 차가워질 때가 있지만
이제는 손발이 차가워질 때면 스스로에게 
크게 소리 내어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이진희.jpg 이진희 시인
2006년 계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실비아 수수께끼》, 《페이크》가 있다.

안녕

by 센터 posted Jun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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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는 멀어지고 그 사이 맨 얼굴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방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두루마리 화장지로 가끔 콧물을 닦으며 지나간 사람을 지나온 사람처
럼 불렀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애써 웃어주는 사람과 그 웃음 뒤의 막막함에 숨는 일로 잠시 웃어 보였으나

여름은 발에 걸리지 않아 부를 이름이 없고 수제비 같은 맨 얼굴은 수시로 뚝뚝 끊어졌다

간밤엔 기억에도 없는 일을 하였다가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아닐까 마신 술에 속아 울면서

수용하였다 

간신히 입 다문 정든 수용소와 그 너머 안부까지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며 여름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도 속았다는 걸 모르는 거다 

빌려온 슬픔을 되돌려 보낼 수 있어 한여름은 없었다 

그래서 안녕

이돈형.jpg 이돈형 시인
2012년 《애지》로 작품 활동 시작. 제9회 김만중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가 있다.

해고

by 센터 posted Apr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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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시인

우리는 철탑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개 없이도 하늘을 밟고 살아요
등을 돌리면 아무나 와서 내 등을 밀어버릴 것 같습니다
엉겁결에 그어진 하늘선을 밟고 죽을 것 같습니다

퇴근길 창문에서 서녘의 새떼를 자주 봅니다
작은 머리통들이 느닷없이 날아가 나란히 사라지는 걸
왜 자꾸 보게 되는 걸까요?

지평선에서 새들이 멀어지면 깃털이 빠진다고 해요
아주 사라지지 못하는 거죠

내 몸으로 새가 들어온 날
영하의 날씨에도 창문을 반쯤 열어둡니다
하늘 한쪽 해고당한 새들만 모여 사는 곳이 있다지요?
고공농성 간호사가 복직을 약속 받고 털모자를 쓴 친구를 끌어안고 웁니다
기쁨은 아닙니다
몸 안의 새를 내보내는 일은 기쁨의 영역이 아니죠


송전탑과
크레인에서 사는 사람들
몸 안에 들어온 새를 내보내려고 애를 씁니다
중력을 얻으려고 환약을 삼킵니다
경험 많고 침묵이 깊은 새들입니다

갓 날개 달은 새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날
별자리는 어둠에게 눈멀지 말라고 촛불 하나씩 쥐어 줬다지요
우리 언제쯤 상공에 맺히는 아침이 다시 오겠습니까?


이소연2.jpg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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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 시인

두통 없는 하루가 지나가요
멀미 나지 않는 하루가 저물어요
몸살 없이 무사한 오늘이에요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라 믿었어요
오늘이 지나도 내일은 아니었어요
오늘 하루만큼 죽어간 나의 오늘이었어요
나를 죽이면서 날름 삼킨 오늘이에요

농담이라고 하니 몸살이 났어요
별것도 아닌데 예민해서 더 예민해졌어요
오늘이 잘릴까 봐 두려웠어요

나 없는 나의 하루하루 일상이에요
야금야금 파먹는 미세먼지처럼 달라붙었어요

억누르고 침묵했던 오늘이 길이 되었어요
냄새 난다고 버리지 못하게 한 생리대를 다시 가방에 쌌어요 
거식과 폭식이 앞뒤로 치고받으며 슬픔을 외면해요
수행하듯 삭였던 침묵은 진짜 인형이 되었어요
오늘이 쌓은 그 인형의 길을 소리 없이 뒤따르고 있어요
그래요 중독된 날들이에요

나를 찾아오는 기억이 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나는 지하방 너머 어슴푸레한 달빛처럼 희미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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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이 시인_2002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반성하다 그만둔 날》,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가 있음.

공장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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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감귤밭에서 일하다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요 하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작은언니 중학교 졸업식날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구나, 말하며 울었지만요 
  아버지는 내일도 다시 입을 작업복을 공장에 걸라고 하셨지요 새 옷과 겹치지 말아야 하는 먼지 묻은 옷이 걸려 있던, 공장은 벽에 못 하나를 박아 만든 아버지 혼자만의 장롱이었지요

  바람이 지나가는 구멍을 가진 제주 돌담은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허기진 구멍을 가지고 있어요 굶주리면 흙이라도 풀이라도 입 속에 넣어야지요 허기처럼 쉽게 사라지는 우리들은 새 달력에 죽음을 먼저 기록하지요

  새 달력을 앞에 두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새 달력에 나의 공장이 두 개, 심장처럼 두 개, 심장에 박힌 못에 걸어 둘 민호와 고래,

  민호는 음료수 공장에서 사라진 학생, 태평양 고래들도 해파리 대신 비닐을 삼키며 사라져 갑니다 무릎을 꿇고 투명한 못 두 개를 박습니다 열아홉 민호는 젊기도 전에 사라졌고,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고래들도 텅 빈 뱃속 채우다 사라져 갑니다 

  민호가 없는 텅 빈 하루를, 허기로 가득 찬 고래 배를, 손가락 하나 없는 손으로 단추를 채워 나갔을 아버지는 몇 번이나 울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다시 새 달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두 개의 울음을 공장에 겁니다 

  새 달력에는 이미 무릎을 꿇고 박은 투명한 두 개의 못이 박혀 있으니까요


*선반 같은 것이 없는 작은 벽에 못을 박아 옷을 걸어두게 한 자리를 제주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공장이라 불렀다. 그것은 허공에 둔 장롱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김신숙.jpg 김신숙 시인
2012년 《제주작가》, 2015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발간.

근로하는 엄마 노동하는 삼촌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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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고
엄마는 노동자의 날이라서 쉬고


삼촌은 회사 안 가서 좋다고 하고
엄마는 회사 잘릴 것 같다고 하고


삼촌은 굴뚝이 있었다는 옛날 목욕탕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굴뚝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삼촌은 누나 일 아니니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라 하고
엄마는 내 일 될 수 있으니까 관심 가져야 한다고 하고


난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나 노동자의 날이나 상관없다
엄마나 삼촌이나 저런 소리 안 하고
삼촌이나 엄마나 잘릴 걱정 없이
편안히 쉬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시끄러워 죽겠다


유현아.jpg 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이 있다.



밥은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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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에 호박 오이 무생채 무쳐놨으니까 대접에 넣고 비벼먹어 고추장은 베
란다에 있고 참기름은 가스레인지 찬장에 있어 맨날 빵 같은 거 먹지 말구 된장
국은 쉬었는지 확인 한 번 해보고 먹어 오늘은 어디 가니 일찍 들어와 엄만 새벽
에 나가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했다
   엄마는 집에 없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집에 있고
   시위대가 톨게이트 옥상을 점거 중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퇴근했다
   올라간 지 한 달째라고 했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잤다


이종민.jpg 이종민 시인

                                                                2015년 《문학사상》 등단


오후대책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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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줍는 방식으로 
모처럼의 연휴가 가고 있다
택배 상자를 차곡차곡 접어 내면서
나보다 더 자주 집에 오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과
감쪽같이 사라지는 상자들의 행방에 놀란다

노후대책을 세우려면 좀 아껴야지 않겠냐는 말을 주고
골목에는 당장 오후대책이 
더 급한 이가 있다는 대답을 돌려받는다 

아내는 큰그림을 그리는 사람 
소파와 리모컨과 홈쇼핑 채널이 
오후의 골목에 미치는 영향을 설파하며
끼니도 못 되는 책만 들이는 나를 방으로 돌려보낸다

구천 원을 주고 산 174그램의 시집들이 
빈 밥그릇처럼 가지런히 꽂힌 위에 또 엎어져 있는, 책장
먹지도 못하는 걸 자꾸 사온다는 아내의 핀잔을 
참 많이도 견뎠구나 위로 하다가
불현듯 오후를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 생각이 간다 
 
파지가 키로에 백 원이면 시집 한 권은 17원
삼백 명의 시인이 
오후 난민의 밥 한 그릇 해결하기 벅차다는 사실에
시 쓰는 일 참 부질없다 싶어서
내 시집 몇 권을 섞어 삼백 권 쯤 노끈으로 묶는다
시 쓰는 일도 밥이 된다는 듯이  

다시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건다
질세라, 어느 시인에게는 또 미안한 일이지만
서명된 페이지는 오려서 비닐 파일에 넣고
그 위에 내 책을 또 몇 권 보태보는 오후가 저물어 간다


권상진.jpg 권상진 시인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복숭아문학상 대상, 경주문학상 수상.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눈물 이후》 한국작가회의 회원, 문학동인 Volume 회원


빛의 탄생

by 센터 posted Apr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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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쓰러지고 나면 밤이 찾아왔다. 미싱이 돌고 도는 동안 밤의 거리가 얼어붙었다.
여성들은 향수 대신 먼지를 뒤집어썼다. 마른기침 뱉는 꿈이 멈추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 모든 걸 불과 함께 태워 올린 이가 있었다. 눈을 뜨면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안다.jpg 양안다 시인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작은 미래의 책》,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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