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

by 센터 posted Jul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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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순 쉼표하나 회원



슬며시 이불이 들렸다. 얼굴에 와 닿는 숨결이 느껴졌다. 애써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숨결은 목덜미와 겨드랑이를 거쳐 배꼽노리까지 내려갔다. 나는 부러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도 뜨지 않았다. 숨소리도 최대한 죽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화가 단단히 났다는 것을 전하기라도 하는 양.


한참을 여기저기 부위를 옮겨 다니던 시선과 숨결이 이윽고 잦아들고 낙심한 듯 ‘끙’하고 몸을 누이는 기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끝내 실낱같은 기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아니면 마지막 아양이라도 떠는 듯 엉덩이를 내 배와 밀착시켜 누웠다. 조금 전의 소란을 떠올리며 마음 같아서는 그 엉덩이마저 힘껏 밀쳐내고 싶었지만 생각과 달리 내 손은 그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보들보들하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미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손길을 느껴서일까. 그는 깊은 숨을 길게 뱉어내고는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왼쪽 팔이 저려와 눈을 떴다. 어느 틈에 그는 나의 팔을 베개 삼아 잠이 들어 있었다. 혹여 그가 잠에서 깨기라고 할까봐 저린 팔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동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꿈속에서 새와 같이 날아다니는 꿈이라도 꾸는지 이따금 그는 온몸을 푸드덕거렸다.


그가 내게 온 건 지난해 8월, 극구 반대하는 나의 의견 따위는 간단하게 무시하고 동생은 놈을 데리고 들어왔다. 폭염을 피해 번개 여행을 다녀온 날이었다. 동해안 어딘가에 애써 떨쳐놓고 온 더위가 몇 배로 증폭되어 와락 안기는 기분이었다. 놈은 동생을 향한 지청구를 늘어놓을 틈을 가질 새도 없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짧고 앙증맞은 하얀 꼬리를 흔들면서. 꼬리를 어찌나 세차게 흔들면서 달려오는지 놈의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릴 정도였다. 얼떨결에 답삭 안고 보니 놈은 한 뭉텅이의 솜뭉치 마냥 보드랍고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아 허깨비 같기도 했다.


그날부터 나는 놈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불만은커녕 안으면 깨질라 불면 꺼질라 노심초사하게 되는 자발적 노예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급한 대로 놈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들였지만 정작 더 급한 문제는 6차에 걸친 예방접종이었다.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접종을 고려하니 차일피일 미룰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무시하고 넘기자니 극단적인 상황이 상상이 되어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아무 병원이나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소문 끝에 마포에 있는 동물병원협동조합에 조합원 등록을 하고 2주에 한 번씩 드나들이를 시작했다. 예약일과 시간을 잡고 놈을 데리고 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구로에서 마포까지의 이동거리도 문제였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차멀미가 놈에게는 더 문제였다. 2주에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놈은 속엣 것을 다 게워냈다. 차멀미를 염려해 먹이를 주지 않는 날은 노란 위액까지 다 게워내서 여간 애를 끓이는 게 아니었다. 접종만 다 끝나면 그 다음 일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이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접종을 마치고 나니 이번엔 중성화수술 시행 여부를 가지고 고민하게 되었다. 애초엔 수술을 시키지 않을 요량이었다. 단지 인간의 편리와 욕심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협동조합 이사장과의 면담과 동물보호단체에 문의한 결과 오히려 수술하지 않는 것이 학대라는 대답을 얻게 되었다. 놈을 짝지어 줄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평일엔 혼자 두게 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음에도 나의 어쭙잖은 생각을 신념이라고 들이댈 것이 아니었다. 출근길에 놈을 병원에 들여보내고 퇴근하는 시간까지 혹여 수술 과정에 문제는 없는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놈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으으으으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마치 왜 이제 왔냐고, 종일 무서웠다고 어리광을 피우는 것처럼 놈은 품에 안겨 오랫동안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입춘도 지나고 날이 조금 따뜻해지자 나는 이번엔 놈의 털을 밀어버리기로 작정했다. 종류가 그래서이기도 하겠지만 유난히 놈의 털은 길고도 하얗다.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이거니와 이불이면 이불, 옷이면 옷, 있는 대로 뒤덮인 털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온 집안을 뒤엎어 털고 쓸고 해도 그때뿐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놈을 키우고 말고를 잴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심지어는 밥상 위까지 날아드는 놈의 털은 충분히 고민거리였다. 그런데 두 시간 동안 병원에 맡기고 찾아온 후로 놈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시원하게 털을 밀어버려 체구가 반으로 줄어들어 부쩍 추위를 타게 된 탓인지 계속 몸을 덜덜 떨어대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동안 나와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마치 어딘가 아픈 것처럼 가만히 이불 속에서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다. 평상시 같으면 환장하고 달려들어 빼앗곤 하던 슬리퍼도 본척만척했다. 더 큰 문제는 간식 하나로 어렵잖게 출근길을 배웅하던 놈이 이젠 온 몸을 달달 떨면서 불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놈이 두 시간 동안 겪었을 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마취가 아닌 상태에서 온 몸에 있는 털을 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미용사 두 명이 붙어 놈의 몸을 꽉 잡고 눌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고 발버둥치는 놈을 향해 이따금 윽박지르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늘 보호막이 되어 주던 주인도 간 데 없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마도 놈은 죽음의 공포를 체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결 따뜻해진 햇살을 거실에 욕심껏 들여놓고 이불 속에 있는 놈과 눈을 맞추는 시간이 무척 행복하다. 스멀스멀 잠이 쏟아지는지 놈의 까맣게 맑은 눈은 곧 감겨버릴 것 같다. 그런데도 놈은 애써 감기는 눈을 치뜨며 주인의 눈을 응시한다. 사랑과 신뢰가 묻어나는 눈빛.


이따금 나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의 행복을, 늘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듯 뿌듯한 사랑의 감정을 인간이 아닌 ‘한낱 개 한 마리’를 통해 느끼고 있다. 또한 ‘개 한 마리’에서 발발한 이 사랑의 감정은 비단 ‘개 한 마리’에서만 그치지 않고 평상시에는 끔찍해마지 않는 길고양이한테도, 깃털이 빠져 너덜거리는 날개를 가진 비둘기한테도 뻗어나가는 걸 느끼게 된다. 심지어 혹한 속에서도 푸르게 자라나 준 화단 속 작은 새싹에게도 사랑과 고마움의 마음을 느낀다. 누군가 인간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도 언급해주기를 간구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정면으로 들어오던 햇살은 각도를 달리해 저만큼 비껴나 있다. 공교롭게도 햇살은 놈의 콧잔등 언저리에 얌전히 얹혀있다.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양껏 햇볕을 빨다가 잠이 들었는지 놈의 입 주위로 햇살이 질펀하게 퍼져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놈의 얼굴 위로 평화가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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