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축구하는 여자들_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by 센터 posted Feb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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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 민음사

 

 

 

조건준 아유 대표

 

 

이거, 너무 재밌잖아“

 

근데, 왜 하필 저 남자한테 팬티를 벗었어!” 여성 축구팀의 예쁘장한 언니의 남편이 열쇠를 받으러 들렀다 돌아가자, 팀 최고령 언니가 툭 치며 한 얘기다. 그런데 당사자가 “아냐, 언니. 내가 안 벗었어. 쟤가 벗겼지!”라고 받아치자 팀 전체가 폭소를 터트린다. 처음 여자 축구팀에 가입해 첫 경기를 마치고 이런 상황에서 약간은 혼미해질 수밖에. 축구를 계속하게 된다고 해도 팬티 때문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당장 축구를 때려치운다고 해도 팬티 때문일 것 같았다는 김혼비 씨는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이렇게 시작한다.

 

첫 경기에 나선 저자를 무던히 괴롭히던 상대방 어르신 선수에게 “치사하게 말년에 이렇게 살다 갈 거냐.”라며 소리치는 언니는 ‘유교걸’에게 경악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쾌하고 자연스럽다. 며칠간 출장을 다니며 퍼부은 술과 피로에 절어 떨어진 다음 날 새벽에 너무 일찍 일어나 집어 든 것이 바로 이책이다. 이거 뭐지? 너무 재밌다.

 

기억이 마구 떠올랐다. 팬티 얘기는 직장과 가사로 바쁜 여성 조합원들이 작심하고 하루를 비운 후 뒤풀이를 하면서 튀어나온 적도 있다. 해방감과 여유 탄탄히 깔린 순간들에 드러나는 여성 조합원의 걸쭉한 입담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솔직하고 강렬하다. 중년의 여성 조합원들이 당당하게 첫 단체협약을 맺고 노조 사무실 개소식에 온 다른 사업장 간부들에게 기념 떡을 돌리며 “아시죠? 떡은 먹는 것이 아니고 치는 겁니다!”라고 했단다. 젊은 간부는 당혹했다. 맥락에 따라 의미는 다르다. 남자가 그랬으면 큰일이지만 승리한 여자들이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상황에서 이 말은 불쾌하기보다 굳건히 승리한 “쎈언니들”의 내공으로 다가왔다.

 

하필이면 왜 축구

 

필라테스, 요가, 발레, 크로스핏 등이 아니다. 운동복도 예쁘고 라켓이나 골프채를 잡고 우아하게 스윙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유용한 운동이 아니다. 여자가 하는 축구 얘기? 군대에서 축구했던 남자들 얘기가 질색이라는데 여성이 축구 얘기를 한다. 유럽 축구의 세계에서 사업에 성공한 여성의 책을 읽은 적이 있지만, 이 책은 완전히 다르다. 이 책은 사업이 아닌 축구 경기에 직접 뛰면서 하는 얘기다. 발야구나 피구를 했던 경험뿐인 여성이 축구팀에 들어가 경험한 세계가 펼쳐진다.

 

축구는 사회가 여성의 신체에 강요하는 미적 기준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결과를 가져온다. 꾸준히 하면 매끈한 다리에 근육이 붙어 알통이 생기고, 땡볕에 뛰어다니다 보면 타버린 피부에도 좋지 않다. 축구는 아저씨 냄새가 배어 있다. 그런데 많은 여자가 전국 곳곳에서 축구를 엄청나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여자 중에 원래부터 축구 팬이었던 사람들은 별로 없단다. 그냥 얼결에 한 여자들이 대부분이란다. 평범하고 시시하게 시작한 것이다. 국악하는 송소희의 플레이에 깜짝 놀랐는데, 텔레비전에 여자 축구 예능 프로그램이 등장한 것은 어쩌면 이런 저변이 깔려있기 때문이리라.

 

나도 군대에서 축구를 했고 그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일 때가 많았다. 초등생이던 딸과 집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으로 놀기도 하고, 아직 탄탄한 몸을 유지할 때까지 야유회나 체육대회에 출전한 경기에서 한 골씩은 넣곤 했다. 지금도 유럽 축구 경기를 통해 방송으로 자주 본다. 멋진 골이나 엄청난 역전 드라마들을 기억한다. 그런데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 역전승하던 날 등 그 속에 오직 자기 자신, 자기가 속한 팀만이 있다. 굳이 유명하고 대단한 누군가에 의존하거나 매개되지 않고 스스로 만들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멋지다. 유명 프로팀과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오직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 꽉 찬 축구하는 여자들이 멋지다.

 

시시하고 ‘쎈’ 그녀들

 

재밌는 얘기가 가득하지만 더 얘기하면 혹시 읽을 분들의 재미를 훔치는 것이니 여기서 그만하자. 여자들이 축구하는 예능 방송을 한동안 유심히 보았다. 여성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어질 때면 좀 그랬다. 멋진 플레이를 하는 송소희 팀이 지고, 거친 몸싸움을 하면서 악착같이 승리하려고 애쓸 즈음에는 결국은 거친 경쟁의 세계로 달려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패배 후에도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에 감동할 수도 있겠지만 스포츠는 늘 팀은 협력하고 다른 팀과는 격하게 경쟁한다. 이걸 아름다운 앙상블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앙상블은 몇 가지 요소들이 개입하면 금방 깨지고 만다.

 

“왜요? 냅둬요.” 망치질하는 후배는 내가 나서려 하자 단호하게 거부했다. 왜 망치질은 남자만 해야 하냐고, 가구를 조립하는 즐거움을 누릴 기회를 왜 어린 여자들에게는 주지 않는 거냐는 반문에 말문이 막힌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남자가 필요한 것은 힘쓸 때뿐이라는 얘기를 듣곤 하지만 불쑥 자란 딸들은 열리지 않는 병뚜껑 따기에서부터 주문한 가구나 전자제품 조립에 이르는 여러 가지를 척척 해낸다. 여성이 세상의 절반이라는 말은 어쩌면 틀렸다.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세상 전부를 떠받쳐온 여성들의 당당함이 묻어져 나오는 순간들이 이 책을 보면서 자꾸자꾸 떠올랐다.

 

노동현장에서 만나온 ‘쎈’ 언니들은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거의 쓴 적이 없다. 시시껄렁한 노동을 하는 시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통 큰 여성 파워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아함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축구하는 여성분들의 호쾌함이 강렬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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