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핵소 고지에서 본 진짜 용기 <핵소 고지>

by 센터 posted Apr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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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소 고지 / 멜 깁슨 감독 / 앤드류 가필드 주연

 

 

그저 무료했다

 

다락방이라고 하기엔 넓고 2층이라고 하기엔 무리인 복층 방, 유폐라고 하기엔 강제성이 부족한 약간 자발적 고립 속에 쌓이던 시간이 불쑥 가져다준 권태였다. 예전의 일상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실감하며 흩어진 자료를 찾아 시간순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2012년, 삼성 노동자들을 만났을 때부터 깊이 몰입했다는 걸 새록새록 확인한다. 

 

이젠 과거다. 아니 현재다. 몰입한 만큼 그날들로 인해 지금 일상을 잃었다. 두려워하던 슈퍼 재벌의 벽을 뚫으려 그토록 마음 쏟았다. 2009년 쌍용차에서 쓰러지기 시작한 생명이 아팠기에, 삼성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두 생명이 스스로 꽃을 꺾어버리자 울었고 몰입했다. 

 

무료 아닌 피로였다. 외면은 쉽고 대면은 어렵다. 대면이 아픈 만큼 피로했던 것이다. 작업을 멈추고 이불을 뒤척이다 기억을 되새기는 노트북 화면을 지웠다. 재밌는 거 없나. 왓챠플레이를 뒤져 액션 영화, 역사물을 거치다가 발견한 영화 한 편 〈핵소 고지〉. 이게 뭐지.

 

양심적 협력자

 

기억이 살아났다. 좀처럼 아름드리 나무를 보기 어려운 섬이었건만 일제식 목재 교실을 나서면 큰 나무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에워쌌다. 교문의 짧은 비탈을 내려가 축대 밑을 도란도란 걸어 귀가하곤 했다. 어느 날 돌 축대 밑에서 친구들의 싸움은 아수라장이었다. 고교 시절 귀찮다 해도 깝죽대던 그놈에게 버럭 화가 나 욱하고 발산한 힘 때문에 저만치 나가떨어지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걸 새겼다. 그래서 저 부조리하고 과격한 권력에 맞서 나간 첫 거리 시위가 두려웠다. 최루탄 쏴대며 쳐들어오던 전투경찰에게 첫 화염병을 던질 때 요동치던 마음의 벽을 마주해야 했다. 

 

영화 시작과 함께 산과 들에 둘러싸인 영상이 펼쳐지고 어린 형제가 치기 가득 찬 내기로 산양처럼 바위에 오를 때 일상의 평화에 스민 불안이 우리를 감싼다. 격한 형제의 주먹질이 어떤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종교보다 전쟁의 상흔으로 늘 취한 애비의 폭력에 저항하는 마음이 주인공을 ‘양심적 거부자’로 만든 강한 이유다. 총을 잡지 않겠다는 집총 거부는 그에게 쏟아진 폭력과 멸시, 그가 존재를 부정당하는 이유다. 전투력 충만한 상남자가 있어야 할 신병훈련소에서 비겁자로 낙인찍힌 주인공은 ‘양심적 협력자’임을 질기게 주장한다.

 

매혹적 사랑의 맥락

 

공격과 상처의 얼룩만이 세상 전부가 아니다. 살핌과 치유가 있는 곳에 선 그녀는 삶을 바꾸는 세례였다. 양심적 협력자의 길에 함께 서서 다가오는 자태는 무엇으로도 누를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을 솟게 한다. 왜 이리 사무치게 아름다울까.

 

이런 사랑으로 삶은 충만하리라. 어린 시절 초가집 밖 무동골 보리밭에서 동네 형이 살짝 펼쳐 보여준, 처음 본 성인만화의 충격을 떠올린 내가 의아했다. 키보드 하나, 터치 하나만으로 지랄맞은 성인물을 즐비하게 만나는 세상엔 감시와 금지가 붙는다. 그럼에도 N번방은 수두룩하다. 감시와 금지, 폭력과 잔혹의 조건을 훌쩍 넘는 사랑의 맥락을 넘치게 보고 싶다.

 

죽거나, 죽이거나, 다르거나

 

총을 들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총을 들면 너를 죽여야 한다. 간단하다. 

“뭘 망설여, 죽지 않으려면 총을 들어야 하는 거지.”

우린 안다. 일상은 생존게임이 되곤 한다. 이러다 관계의 막장인 사법 현장에 서면 어떻게 할까. ‘너 죽고 나 살자’는 법칙을 따르며 생존해온 판에 망설임은 없다. 너에게 모든 혐의를 돌린다. 그것이 집총이고 너를 향해 당기는 방아쇠다. “함께 살자”는 건 ‘양심적 병역 거부자’나 할 헛소리쯤으로 여긴다.

 

일상에서 생존 법칙을 어김없이 실천하고, 비상에서 ‘너 죽고 나 살자’를 오차없이 실행하는 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다. 그 누굴 원망하랴. ‘총 들지 않은 내 탓’일 뿐.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르게 말한다.  

 

핵소 고지의 용기는 다르다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한다, 착취하지 않으면 착취당한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다, 노동과 자본가 사이엔 결코 평화란 없다, 이것이 나와 우리의 전쟁이다. 총 들어 죽이거나 아니면 집총 거부로 죽거나다. 투쟁만이 살길이다. “No way out!” 다른 길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죽을 것이라는 공포가 그들을 죽이는 과격함으로 나타난다. 강한 투쟁에는 강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이걸 알아챈 순간, 마냥 투쟁을 칭송할 수 없었다. 핵소 고지에서 용기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죽고 죽이는 폭력과 대항폭력이 압도하는 지옥에서 한 생명이라도 살리려 한다. 전쟁의 복판에서 반폭력의 용기를 건져낸다.

 

명화는 관객이 처한 맥락이 만든다

 

영화는 극적 장치를 빼면 실화다. 실화는 극적 장치를 가미하면 영화가 된다. 이미 우리는 영화가 될만한 실화를 산다. 나는 핵소 고지에 산다. 

위대한 영화는 없다. 우연히 만난 영화가 사무치는 것은 명화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 삶의 맥락이 영화를 만났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인가보다 어떤 맥락 속에서 만난 영화인가가 중요하다. 이것이 명화를 만드는 관객의 힘이다. 

내겐 섬겨야 할 주님이 없다. 마셔야 할 주님만 있다. 그럼에도 나는 핵소 고지 기도를 되새긴다. “오 주여, 한 명만 더 구하게 하소서.”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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