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거리 두기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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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카스 무데,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 지음 / 교유서가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추석 연휴에 강화도에서 바다 풍경을 보며 《포퓰리즘》이라는 얇고 작은 책을 읽었다. 예전에는 포퓰리즘을 인기영합주의, 대중주의, 인민주의, 민중주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이제는 포퓰리즘이라고 그냥 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할 때, 국민은 피플이고 민중이다. 민중은 권력과 지위를 가진 엘리트와 상대적 개념이란다. 바로 이 피플the people에 대한 정치가 문제다. 긍정적으로 보면 포퓰리즘은 민중이 정치 참여를 통해 만드는 민주적 생활 방식이다. 정치의 본질이고 해방의 힘이기도 하다. 부정적으로 보면 민중을 자극하고 꼬셔서 무책임한 경제정책을 만들고, 열정적 추종자를 가진 지도자가 ‘빠’들을 동원해 통치하는 정치 전략이다. 혹은 통속적으로 지도자와 정당이 대중을 동원하는 정치 스타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저자들은 포퓰리즘을 이념적으로 본다. 포퓰리즘은 숙주 이념(이데올로기)을 기초로 한 얕은 이데올로기다. 대체로 좌익 포퓰리즘은 사회주의, 우익 포퓰리즘은 민족주의를 숙주 이데올로기로 삼아 인종이나 이민자 문제를 섞어 짬뽕한다. 

저자들은 공산주의와 파시즘 모두 본질적으로 포퓰리즘보다 엘리트주의에 더 가까운 이데올로기로 본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공산당이 민중(노동계급)의 전위, 즉 민중의 뒤를 따르기보다 앞에서 이끄는 전위라고 천명하는 등 중심부의 강한 엘리트주의를 가지고 있단다. 돌이켜 보면, 군사독재에 맞서 혁명적 열기로 전위가 되고자 했고 전위당을 만들려 했던 그때 “대중은 오직 전위인 우리를 통해서 진실에 이를 수 있다.”라는 태도로 의식화하고 지도하려 했다. 이런 엘리트주의는 사라졌을까. 소위 민주화 세대인 386들은 전위당을 지금 자신이 속한 정당으로 바꾼 것 같다. 혁명을 꿈꾼 조국, 학생운동을 했지만 통일부 장관이 된 이인영 등 386 상당수는 지배 엘리트가 되었다. 뭐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먹고 살 만한 그 세대들은 기득권층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면서 자기 정파 세력화를 꿈꾸고, 민중의 직접정치를 주장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정치 권력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예전 전위가 요즘엔 활동가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전위당은 정파로 바뀌었다. 노조에선 활동가가 간부로 바뀐다. “노조는 간부 하기 나름”이라며 간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간부가 중요하지만 때로는 조합원의 일부라는 것을 잊고 권력자가 되게 한다. 

저자들은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펜이나 베네수엘라 차베스를 비롯해 여러 사례와 함께 노무현도 포퓰리스트로 본다. 이런 주장에 고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나기 하는 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회운동에도 포퓰리즘이 있다고 한다. 흔히 비공식 네트워크(또는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로 묘사되며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뚜렷한 적을 상대로 집단행동을 촉구하는 개인과 정치집단의 지속적인 관여를 특징으로 한다. 흥미로운 측면은 사회운동의 포퓰리즘은 상향식 동원을 한다는 점이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포퓰리즘적 사회운동에는 통상 중앙집권적인 지도부나 지배적인 지도자가 없다고 한다.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위험”으로 보는 입장과 “배제당한 사람들의 요구를 결집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촉진한다”라고 보는 엇갈리는 입장이 있다. 저자들은 어느 쪽이든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가장 적절하게 정의하면 ‘국민주권과 다수결의 결합’이다. 그런데 ‘다수결 원리와 소수자 권리 사이에서 조화롭게 균형을 잡으려다 생기는 긴장’을 파고들어 활용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라고 본다. 

포퓰리즘은 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독재정권에서 민주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포퓰리즘은 긍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성숙한 민주주의인 자유민주주의에선 부정적 역할을 한다. 민주화를 촉진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민주주의를 망칠 수도 있다. 

포퓰리즘은 왜 생길까. 한국에서는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로 알려진 링컨의 ‘민중의,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by the people’라는 생각이 깔려있고 민중이 주권을 정치꾼에게 위임하지 말고 직접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 경기침체나 체계적인 부패가 생기고 이와 함께 정치나 지배 엘리트들이 우리의 고통과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작용하면 포퓰리즘을 불러온다. 뉴미디어들과 경쟁하는 전통 미디어들은 잘 팔릴 핫이슈를 찾아다니다가 범죄나 부패 같은 사건에 훅 쏠린다. 소셜미디어도 엄청나게 성장해서 포퓰리즘에 유리한 정치문화가 된다. 이것들이 포퓰리즘을 요구하는 수요의 측면이다. 포퓰리즘을 공급하는 것은 ‘인싸(인사이더)’지만 ‘아웃사이더’가 되었든, 혹은 본래 ‘아싸(아웃사이더)’였던 정치인 개인과 정치 권력을 쥐고 싶은 정당이다. 

포퓰리즘을 막는 방법은 뭔가. 수요 측면에서 경기침체는 세계화 등 외부 탓으로 돌리거나 부패를 은폐하고 부정할 것이 아니라 실상을 더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치고 극단주의적 도전자의 위험을 경고하는 ‘시민 사회화’가 필요하단다. 공급 측면에서 주류 정치인은 포퓰리즘 세력 주위에 방역선을 설치해 협력에서 배제하고 싸워야 한다. 기본권 보호에 특화된 헌법재판소나 대법원 등 기관들이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한다. 미디어가 포퓰리즘에 대응해야 한다. 초국적 기구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늘 활동하고 정치를 한다. 때문에 포퓰리즘에 대한 전략은 완전 배제와 완전 통합이라는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다. 얇은 책이라 쉽게 생각했는데 꽤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정치를 주식시장과 연결하곤 한다. 주가를 보고 정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대통령과 정당에 대한 여론 조사를 수시로 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다. 다르게 보면 여론을 핑계로 인기투표를 통해 대통령에게 인기영합주의, 포퓰리즘을 부추긴다. 정치에 대한 과잉몰입은 무조건 빨아대는 ‘빠’를 만들고, 과잉 냉소는 무조건 까대는 ‘까’를 만든다. 특히 노동 시민은 권력 엘리트들의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고 자력화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자는 얘기가 아니다. 노동 시민이 스스로 힘을 키우고 독립적으로 생각하면서 정치와 사회를 만들어나가자는 얘기다. 

지금까지 민주노조들이 ‘정치세력화’를 주장했기에 무슨 소리냐고 생각할 수 있다. 이 파 저 파에 휩쓸리는 시민이 아니라 노조를 비롯해 각각 자율적인 시민사회조직으로 뭉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민들이 많을 때 포퓰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코로나19 전염병에 대응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만이 아니라 진영 논리에 전염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정치적 거리 두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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